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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눈으로 판례 분석하는 과정 담은 ‘생각 레시피’
사상의 눈으로 판례 분석하는 과정 담은 ‘생각 레시피’
  • 박준석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법철학
  • 승인 2015.12.09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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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법사상, 생각할 의무에 대하여』 박준석 지음|아카넷|344쪽|25,000원

어쩌면 우리는 법사상이 유난히 실천적인 학문인 ‘법학’의 기초 분과라는 점을 망각한 채, 실제 법현상의 문맥이 반영되지 않은 논의에 안주함으로써 역으로 법사상의 진면목마저 오랫동안 놓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법사상은 법철학과 더불어 우리 법학교육의 체계에서 그나마 가장 널리 개설되고 있는 기초법학 교과라 할 수 있다. 법사상과 법철학. 사실 이 둘이 서로 확연히 구별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법철학의 경우는 근원적인 문제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짜여 있다면, 법사상의 경우는 주요 인물들의 말과 생각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통상 법사상 강의는 ‘법사상사’라는 이름의 강좌를 통해 행해진다. 법사상에 관한 책을 냈다고 말하면 예외 없이 “아, 법사상사” 하는 반응이 돌아올 정도로, 우리에게 각인된 법사상의 인상은 시대순으로 나열된 수많은 사상가들을 주마간산으로 훑고 지나가는, 마치 미술관 단체 관람 같은 것이었다.

『법사상, 생각할 의무에 대하여』는 ‘법사상사’ 책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콰인까지 철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말과 생각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동행으로서 그러할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책은 법사상적 시각에서 우리 판례를 분석하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생각 레시피’이다.

돌이켜 보면, 정신없는 단체 관람의 후유증처럼 남는 것이 “도대체 법사상이라는 것을 왜 공부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사회를 살다 간 누군가가 법과 정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댄 것을 그토록 힘겹게 이해하려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혹은 그들의 이야기를 잘 정리하면서 흔히 그러하듯 누구누구의 ‘정치사상’이나 ‘사회사상’이라 부르는 것과 달리, 굳이 그들의 ‘법사상’이라 구분해 줘야 할 특별한 무언가가 따로 있는 것인가? 혹시 그들이 했던 이야기 중에 법에 대한 성찰적 언급이 등장하기만 하면 ‘법사상’이 되고, 이로써 그것의 연구 가치는 자동적으로 확보되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결국 법사상의 연구가 도대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또한 어째서 그러한 연구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존 연구의 한계와 학문 분과의 특성 

사실 이러한 의문을 품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법사상에 대한 기존의 연구 결과들이 다양한 인접 분과의 연구 결과들과 내용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철학사의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법사상, 정치사상, 경제사상, 윤리학, 사회철학 등 분야에서의 논의들을 직접 비교해 볼 것을 권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고전이라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특정 분과의 연구자들만 관심 가지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양한 분과의 연구자들이 서로 비슷한 연구 결과만 반복ㆍ재생산하는 것마저 당연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사상가의 동일한 저작을 읽더라도, 누가 어떠한 연구 관심에서 읽었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은 그야말로 다양한 학문 분과들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존의 연구는 법사상이라는 독립된 학문 분과의 존재 이유를 보여 주는 데 썩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법사상 연구만의 독특한 가치라는 것이 있을까. 나는 분명 그렇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그 가치는 법사상의 창을 통해서 볼 때 비로소 법이 ‘이해가능한(intelligible)’ 것이 되는 순간들과 관련이 있다. 즉 법사상의 연구는 다른 인접 분과들의 연구와 달리 과거 누군가의 말과 생각이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법질서의 아주 구체적인 부분들을 비로소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과정을 담아 낼 수 있다. 법사상적 논의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판례에 의한 법의 해석과 적용을 더 잘 근거 짓거나 정당화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혹은 이전에 잘 보이지 않았던 판례의 문제점을 드러내거나 합당한 비판을 제기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만약 이러한 색깔이 없다면, 그와 같은 연구는 인접 분과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구들과 잘 구별되지 않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예를 한 가지 들어 보자. 국가가 개인의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해 그의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강제하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제시했던 타인에 대한 해악 방지의 기준을 언급하는 연구들은 적지 않다. 하지만 그에 관한 연구가 모름지기 법사상적 시각에서의 연구라면, 우리 판례가 안전띠 착용을 강제할 때는 타인에 대한 해악 방지의 기준을 적용하면서, 자동차전용도로에 오토바이의 진입을 금지할 때는 본인에 대한 후견적 보호의 기준에 호소하는 점을 지적하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이율배반적 논리의 허점을 드러낼 수 있으며, 또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법사상이라는 창을 통해서 판례를 들여다봄으로써 판례가 담고 있는 의미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놀랍게도 법사상적 논의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지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법사상이 유난히 실천적인 학문인 ‘법학’의 기초 분과라는 점을 망각한 채, 실제 법현상의 문맥이 반영되지 않은 논의에 안주함으로써 역으로 법사상의 진면목마저 오랫동안 놓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주제와 함께 구체적 판례 분석도 함께 소개

이 책의 본문은 총 10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각 장마다 중요한 법사상적 주제를 관련 판례에 대한 분석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굳이 법사상의 실천성이나 법사상 연구의 학문적 정체성을 겉에서 외치기보다는, 본문의 내용 자체가 그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가령 헌법의 평등 조항에 대한 판례의 해석은 적절한지, 재산권 행사의 사회적 기속성에 관한 판례들 사이의 긴장은 해소할 수 없는 것인지, 올바른 법해석 기준의 구성요소로 판례가 제시하는 구체적 타당성의 개념은 문제가 없는지, 법률이 금하고 있는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인정하는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문제가 없는지, 헌법의 재판청구권 조항으로부터 이른바 법원의 논증 의무를 직접 도출할 수는 없는지 등 굵직한 법률적 난제들을 파헤치는 데 다른 어떤 접근법보다 법사상적 시각에서의 접근이 훨씬 더 매력적일 수 있음을 독자들 스스로 확인하게 하는 식이다. 그저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보다는, 고전에서 어떻게 영감을 얻는지 실제로 보여 주는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철학이나 법에 관한 이야기는 자칫 한없이 무겁고 지루해질 수 있지만, ‘생각’의 아이콘인 사과 그림의 표지를 넘기는 순간, 독자들은 그러한 걱정이 쓸 데 없는 것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공들였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법학 전공자가 아니어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흥미진진한 구조와 흐름을 설계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깨알 같은 재미와 의미가 숨겨져 있는 은유적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할 수 있었다. 독자들은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가운데 어느덧 책의 내용을 진정 즐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박준석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법철학

서울대 법과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분석적 법철학이 가리키는 명료함의 길을 따르고 싶어 하며, 최근에는 법의 사상과 실무를 잇는 작업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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