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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성 버텨내려 안간힘 쓰다 길 잃고 말았다”
“불안정성 버텨내려 안간힘 쓰다 길 잃고 말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1.23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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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특수신분교수의 ‘직업인 양성기관에서 경계인으로 살아남기’

지난 21일(토) 인문학협동조합과 민족문학사연구소가 함께 개최한 ‘대토론회’의 주제는 ‘위기의 대학, 연대는 가능한가?’였다. 대학원생 및 시간강사 문제, 대학구조조정을 겨냥해 대학원생, 시간강사, 특수신분의 연구자가 함께 머리를 맞대 ‘위기’를 솔직하게 대면코자 했다.특히 이날 대토론회 2부 대학구조조정 세션에 「직업인 양성기관에서 경계인으로 살아남기」를 들고 참여한 박태건 원광대 연구교수의 고백록은 숙연했다. “자기 조정성의 존재론적 불안정성에서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길을 잃고 말았다”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국 대학과 학문공동체에서 독특하면서도 어쩌면 ‘보편적인’ 고뇌로 새겨질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의 발표문을 발췌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비정규직 연구자의 일상은 생존에 급급하다. 연구자의 길을 선택했는데 여전히 진로 걱정에 목이 마르다. 구조조정인지, 구조개혁인지 말놀이 ‘도리뱅뱅’인지. 이 갈증은 나 또한 고도화된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지식 장사꾼화 되는 것 같은 자괴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주 혼잣말을 한다. 결국 생활의 문제다. 지역대학에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무한경쟁에서 조금 비켜서 있다는 말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각자도생의 의미다. 이제 연구실을 나서는 것은 이념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연구자의 노력이 발현되는 것은 사회와 交融하며 새로운 ‘장’을 발견할 때일 것이다. 그런데 연구자의 길을 걷는 동료들은 전선을 잃고 헤매고 있다. 구조개혁이라는 파도 하나를 넘으면 더 큰 파고를 일으키는 파도가 끝도 없이 밀려든다. 어느덧 학교엔 10년 선배도 없다. 학문탐구에 대한 열정을 접고 취업 잘 되는 교과목을 개발하는 작문이 우선이다. 제자들의 취업을 잘 되게 하는 것이 ‘돈을 받는 이유’가 됐다.

지역대학에 붙어있으면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연구자로서 정체성을 자각하는 노력도 사그라진다. 한 인문대 교수는 며칠 전 ‘프라임사업이니 코어사업이 들이대지 말고 차라리 연봉을 깎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가만히 내버려 둬라’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대학구조조정의 압력에 지친 무력한 지식인의 현 단계.

대학구조조정을 대하는 연구자의 무력함은 학술대회의 썰렁함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학술 연구자들의 잔치는 고사하고 고독한 지역 연구자에게 ‘장’을 마련해주고, 선배, 동료들에게 기를 받는 자리라는 생각에 회의가 든 것도 한참 전이다. 발제자와 토론자, 그리고 진행자만 있는 발표장이 허다하다.

 

직업인의 일

대학구조개혁의 광풍이 지식인 사회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경쟁 구도의 정착이다. 언제나 자리는 적고 사람은 많다. 조직의 생존을 우선하며 대학 존립의 의미론적인 발언은 낭만적인 희망으로 치부된다. 도구적 개량화의 정도는 서류의 생산량과 비례한다. 대표적으로 한국연구재단의 등재 논문에 대한 평가가 일반화되면서 논문 수량 생산은 하나의 일이 됐다. 나의 경우는 일정량의 논문 업적을 채우는 부담에서 벗어나 있다. 특수신분교수는 교원 정원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논문을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신분은 곧 ‘2류 교수’로 취급된다. 개량화의 목적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에서 나는 다른 용도로 분류된다. ‘취업 대비 교과목 개발과 운영’이 그것이다. 목적 달성에 대한 요구는 있으나 특수신분교수의 이익을 보호해주는 장치는 없다.
제도의 차별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통치 전략이다. 명예와 돈의 차별이 존재한다. 차별은 같은 대학교수끼리 같은 과 교수도 다른 ‘공기’로 느끼게 한다. 차별의 구조는 평가를 기반으로 한다. 해가 갈수록 세분화된 평가 시스템이 도입된다. 그것도 결국 서류다. 불안한 존재는 더 많은 평가(시험)에 들고, 그럴 때마다 불안하다. 나는 이번 달(11월)만 해도 매주 토요일에 학교에 나와서 일을 했다. 갑작스런 업무지시와 수행으로 퇴근이 늦어진다. 교직을 수행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경계인의 욕망

구조개혁의 대상이 되면 일상이 피곤하다. 나의 미래가 어디로 휘둘릴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피곤할수록 선명해지는 나의 세속적 욕망이다. 메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눴지만, 비정규직 교수는 3단계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이상을 넘지 못한다.

시간강의를 시작할 때엔 강의를 좀 더 많이 했으면 했다. 학위를 하고 나자 주 20시간 넘게 강의를 했다. 아침 첫 시간부터 야간수업을 하던 어느 날, 운전석에 앉아 끼니를 때우며 생각했다. ‘낡은 책상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마침 모교에 연구원 자리로 들어오면서 안정이 됐다. 그러자 이번엔 개인 연구실을 갖고 싶어졌다. 운 좋게 연구실이 생겼으나 그곳에선 연구를 하지 못했다. 조교와 근로학생을 두고 ‘사업’을 한다. 교육역량강화 사업, 지방대 특성화 사업, 고교 정상화 지원 사업, 센터 기획사업, 이런 저런 재정지원사업 기획… 사업이 늘어나면서 회의가 일상이 됐다.

경계인의 관심은 종종 열정의 부산물인 피로를 동반한다. 자발적 모험은 하지 않는다. 하고 있는 일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다. 조금만 일을 해도 피로가 가중된다. 피로한 일상에서 또렷해지는 욕망, 다음은 정년 보장일까. 현 단계에서 연구의 진보성은 유지될 수 있는가. 술 한 잔 하며 고민을 나누고 싶어도 찾아갈 스승도, 동료도 없다. 대부분 각종 연구 지원비를 받기 위해 바쁘거나, 연구실 문을 닫고 귀가한 상태다.

 

입이 없는 존재

비정년 계약직 교수로서 가장 크게 느끼는 문제는 대학에서의 소외감이다. 나와 같은 신분이 별로 없다. 모두 조금씩 다른 형태의 소외감과 차별을 받는다. 비정규직에게 의무는 있으나 권리는 없다. 그래서 명절이 싫다. 교수 교직원, 조교들까지 받는 몇 푼의 상여금이 특수신분교수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더 기분을 잡치게 하는 것은 대학 홈페이지 게시판에 표시까지 해가며 ‘시간강사와 특수신분교수는 해당사항 없음’을 친절하게 밝혀주는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잘 버티고 있을까.

공동체의 기획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나를 취하게 하는 요인이다. 사업 수행의 하부구조이다 보니 언제나 학내 의사결정과정에서 제외돼 있다. 자신의 삶을 재기획하기 위한 연구, 연수, 시설 지원에서도 특수신분교수는 제외된다. ‘입이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수업 종료와 동시에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래서 어쩌다 한가해지는 저녁에 ‘삐딱한 존재’끼리 만나서 연구자의 삶을, 사회의 미래를 기획하는 일도 요원하다.

어디에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현재의 대학 시스템으로는 지식유통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잉여 생산물밖에 배출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구조조정도 자본을 무기로 이뤄지고 있다. 이 강고한 체제에 대응하기 위해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기엔 어려운 걸까.

민주주의의 발전은 곧 학문의 발전이다. 세상의 진보는 ‘삐딱한 존재’들에의 실천에서 시작했다. 다양성과 차이의 소통을 거듭하면서 갈등을 극복하려는 과정이 곧 학문의 발전사다. 그런데 소통의 구조가 막혀있다. 모든 게 돈으로 가름되는 이 세상에서 대학구성원들이 의미론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리고 현 상황을 성찰을 해야 한다.
다면 평가의 개량화된 증거를 바탕으로 지식 생태계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지배하려는 것이 대학구조조정의 음모였다. 대학은 교육부 평가지표에 따라 교육프로그램들을 재세팅했고 과정중심교육의 시도는 사라졌다.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곧 나의 평가지표기도 했다. 임용초기 맞춤형, 수준별 교육을 계획했던 나의 일상은 점점 개량화된 지표를 정리, 보고하는 분주함으로 바뀌어갔다. 자기 조정성의 존재론적 불안정성에서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길을 잃고 말았다.

인간은 시장의 횡포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할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우리의 노동, 환경, 생산조직이 대학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가면서 ‘조직의 자기보호’ 장치는 언제부턴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선 안 된다. 학문공동체의 질서를 복원해야 한다. 구조조정의 칼날이 향하는 것은 결국 노동 유연성이다. 가장 원론적인 대처 방법으로 나(우리)가 생산수단을 점유한다면 교육 생산물을 통한 권한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방법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대안적인 생산물과 대안적인 유통구조를 설립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지식노동자의 힘은 자발적인 기획과 실천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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