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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는 공자를 集註의 무덤에 유폐시켰다”
“朱子는 공자를 集註의 무덤에 유폐시켰다”
  • 이수태 저술가
  • 승인 2015.11.16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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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공자의 발견: 脫朱子論語學』 이수태 지음|바오출판사|456쪽|20,000원

공자의 ‘修己’는 우리가 알고 있는 『大學』의 수신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 수신이 어떻게 수기를 왜곡하게 됐는지, 어떻게 『대학』이 논어를 배신하고 말았는지, 어떻게 주자가 공자와 그의 수기를 集註의 무덤 안에 유폐시키고 말았는지를 이야기했다.

 

이번에 나온 나의 책, 『공자의 발견』을 이야기하자면 부득이 16년 전에 동시 출간했던 두 권의 책 『논어의 발견』과 『새번역 논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두 책은 나로서는 첫 저서였고 독자들에게는 어느 무명인의 도발적 저술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논어』 521개 단편 중에서 75개 단편에 대한 해석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것도 『논어』 마지막 5개 편처럼 중요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에는 거의 없고 대부분 최고봉에 해당하는 공자 특유의 발언에 걸쳐 줄줄이 전통적 해석이 잘못 됐다고 나는 지적했던 것이다.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75개 단편들은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대부분 공자만의 수준 높은 체험을 담고 있고 둘째, 그런 체험을 진술할 때 공자는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러니나 패러독스 등의 다양한 논리적 반전을 보여준다는 것. 셋째, 그 반전에 이르면 해석자들은 예외 없이 해석을 그르치고 말며 넷째, 그렇게 그르쳐진 단편은 공자 이후 2500년 동안 한 번도 그 정체를 드러내 본 적이 없었다는 것. 이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언론도 학계도 당혹스러워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여건 속에서 용기를 낸 것은 먼저 <한겨레신문>이었다.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학술담당 기자는 아직 출간도 안 된 원고 상태의 두툼한 B4 복사물에 밑줄을 쳐가며 꼼꼼히 읽고 있었다. 며칠 후 나의 책은 북리뷰의 거의 전면에 걸쳐 큼직하게 보도가 됐다. 획기적 해석의 사례로는 「자로」편의 ‘不得中行章’을 소개했다. 그 단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맹자로부터 비롯됐다는 나의 주장이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경향신문>에서도 제법 크게 보도를 했는데 “2500년의 전통을 뒤엎은 재야학자의 독창적인 논어 읽기, 학계의 반론도 예상되지만 철저한 문헌 해석과 고증에 바탕을 둔 그의 해석은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다”고 평가했다.

학계는 나의 이런 주장에 지지도 비판도 하지 않는 식으로 불편한 침묵을 이어갔다. 이후 논어와 관련된 많은 저술에서 나의 책은 빠지지 않는 참고도서가 되면서도 직접적인 인용이나 논의는 하지 않음으로써 그 불편한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후 나는 공직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면서 『논어』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론도 학계도 어느덧 이 한 때의 돌풍을 잊었다. 내가 활동을 재개한 것은 공직을 떠난 다음 날부터였다. 두 군데 지면에 『논어』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절판된 두 책의 개정판 작업에도 착수했다. 그렇게 하여 작년에 개정판이 나왔고 올해 이 책이 나온 것이다.

나는 나의 『논어』 해석을 둘러싸고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타당성 논란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나는 새 해석을 바탕으로 한 단계 진전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쓴 글들이 이번 책의 제2편 「공자의 3대 관점」과 제3편 「논어 깊이 읽기」였다. 일반 독자들을 위해 쉽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모은 제1편을 제외하고 그 두 편의 글을 비교적 앞부분에 배치한 것이다.

나는 특히 제2편 「공자의 3대 관점」을 주목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과 세상을 보는 공자 특유의 세 관점은 ‘修己’, ‘不貳過’, ‘兩端의 극복’이다. 첫째, 수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大學』의 수신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 수신이 어떻게 수기를 왜곡하게 됐는지, 어떻게 『大學』이 논어를 배신하고 말았는지, 어떻게 주자가 공자와 그의 수기를 集註의 무덤 안에 유폐시키고 말았는지를 이야기했다. 둘째,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不貳過는 주자의 터무니없는 해석처럼 “한번 저지른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잘못을 이중으로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인류사에서 오직 공자와 예수라는 두 이례적 인물에서만 나타나게 됐는지 그 기막힌 사정을 이야기했다. 셋째, 양단의 극복. 그것은 중용을 말한다. 다만 내가 중용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가급적 그 말을 피했을 뿐이다. 『중용』에는 중용이 없다. 『논어』에만 중용이 나온다. 주자는 그 중용 관련 단편의 해석에서 철저히 헛다리를 짚었다.

이 위대한 세 관점은 모두 개별 단편들의 그릇된 해석 아래에 묻혀 있었다. 머리말에서 나는 “공자의 관점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해석을 그르쳤고 해석이 그르쳐졌기 때문에 그의 관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저 2천500년에 걸친 악순환의 구조”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해석상의 문제가 제기만 되고 제대로 된 논의를 거치지 못한 채 잊혀져 왔다는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싫든 좋든 나는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쓴 글들이 「논어의 무덤-논어집주」였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재론이었기 때문에 책의 뒷부분인 제4편에 배치했다. 다시 거론하는 대신 나의 어조는 좀 더 강해졌다. 나는 “주자의 논어 해석 800년의 역사는 이제 종막을 고해야 한다”라고 단호히 주장했다. 낡은 『논어』에 길든 눈에는 외람된 도발로 보이겠지만 나로서는 솔직히 지겹기까지 한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새 책에서 해석상의 문제를 다루되 얼마만큼은 지나간 이야기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해석상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차라리 이번에 출간한 책보다는 16년 전의 두 책에서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해 그 옛날 <한겨레신문>에 실렸던 ‘부득중행장’을 다시 한 번 소개해 본다. 이 단편을 두고 당시 <한겨레신문>은 이렇게 썼다. “지은이는 공자가 무덤에서 나와 틀렸다고 말해도 물러서지 않을 만큼 자신 있는 부분도 있다고 말한다.”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乎. 狂者進取, 者有所不爲也.(논어 13/21)

“중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급진적인 사람이나 결곡한 사람을 택하겠다. 급진적인 사람은 진취적인 데라도 있고 결곡한 사람은 하지 않는 바라도 있기 때문이다”(전통적 해석)

“中行을 얻지 못하고 간여하면 반드시 급진적으로 되거나 결곡해진다. 급진적인 자는 나아가 취하려 하고 결곡한 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새번역)

 

 

이수태 저술가

필자는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공직에 발을 디뎠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대전지역본부장, 일산병원 행정부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새번역 논어』, 『논어의 발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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