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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위협·안보 취약점으로 떠오른 대규모 전염병”
“생물학적 위협·안보 취약점으로 떠오른 대규모 전염병”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1.10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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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대한의사학회 가을철 학술대회 ‘역사와 방역’
▲ ‘콜레라를 막자’(1963)는 캠페인이 벌어지면서, 시민들이 예방접종을 받고 있다. 출처=행정차지부블로그

대한의사학회(회장 서홍관, 국립암센터)는 창립된 지 70년이 넘는 기초의학 소속 의학회 중 하나로, 의학사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회다. 의학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의료인뿐만 아니라 의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역사학계 연구자들이 함께 연구, 활동하고 있다. 그런 대한의사학회가 지난 6일(금) 경희대에서 ‘역사와 방역’을 주제로 가을철 학술대회를 열었다.

메르스 사태를 경험한 뒤라 ‘역사와 방역’이란 대한의사학회의 주제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주최측에서도 올 여름 메르스 사태를 역사적으로 성찰해보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메르스와 같이 특정 방역의 경험이 다음 방역의 전개에 어떤 역할을 미쳤는지,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자리였다.

이날 발표는 기획발표 ‘역사와 방역’, 자유연제발표 세션1·2로 진행됐다. 기획발표에는 주제 그대로 ‘역사 속에 경험한 방역’의 실제 사례들을 짚은 논의들이 주를 이뤘다. 자유연제발표 세션1·2에서는 논의가 좀 더 다양하게 펼쳐졌다.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2000년대 이후의 방역-보건 안보 프레임의 대두를 중심으로」: 이종구(서울대 의과대학)·최은경(서울대병원)
현대의학과 방역의 발전으로 이제 더 이상 대규모 전염병의 위협은 없다고 믿어졌으나 탈냉전과 9·11 테러의 경험은 이러한 믿음을 뒤바꿨다. 과거에 사라졌던 천연두균과 탄저균은 가장 강력한 생물학적 무기중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방역은 대규모 전염병=생물학적 무기=전세계적인 공중보건상의 위협이란 안보 프레임으로 재구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국가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행정권력)과 방역 전문가들이 전염병 위협을 대응했던 과거 프레임에서 각지에 주둔하는 NATO군 등의 군대를 중심으로 현지의 전염병을 다룰 수 있도록 하는, 전세계적인 보건 안보와 대규모 전염병에 대한 준비의 프레임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전염병을 생물학적 위협이자 안보적 취약점으로 간주하고 군민이 합동해 이러한 위험에 준비하는 시스템으로 방역 시스템이 이전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남한정부의 콜레라 대응과 그 영향-1963·1969~1970년 방역경험을 중심으로」: 천병철(고려대 의과대학)·김진혁(고려대 문과대학)

1960년대 후반은 전세계적인 7번째 콜레라 유행시기였다. 한국에서는 8월 군산항에 입항한 동남아 무역선을 통해서 콜레라가 들어왔다. 연구팀은 초기 콜레라를 괴질, 비브리오균으로 파악했고 보건사회부는 콜레라 방역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콜레라 지역 확산이 계속됐고 9월 초에야 보사부가 콜레라를 확정짓게 됨에 따라 본격적인 방역활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보사부는 여전히 콜레라의 의사/진성, 콜레라형 확정에 매달렸다. 이에 초기 대응에 실패했고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만연하게 됐다. 11월 콜레라는 1천396명 환자 발생, 125명의 사망자를 남기고 종식됐다. 이 해 국정감사에서 보사부와 국립보건연구원에서는 콜레라 판명의 기술적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방역활동에 최선을 다했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과 맞물리며 방역활동에 대한 국가적 총의를 모아야 할 국회는 파행상태에 있었다. 아울러 이후 미국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수출문제를 중시해 콜레라에 대한 국제적으로 대처할 의지를 갖지 않았으며, 능력 또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고 평가했다. 이듬해 1월 정부와 언론은 콜레라균을 북한에서 침투시켰다고 하며 책임소재를 돌리기까지 했다. 1969년 한국정부의 콜레라 대응은 수출 목표치 달성에 몰입해 국민의 생명권을 방기한 ‘예정된’ 人災였다.

 

「소위 ‘니담 보고서’를 중심으로 본 한국전쟁 중의 세균전 조사활동」: 여인석(연세대 의과대학)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22일 당시 북한의 외교장관 박헌영과 중국 공산당 외교부 부장 주은래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국제사회에 항의했다. 1952년 3월 29일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중국과 북한의 대표들은 세균전에 관한 자료를 제시하며,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엄정한 조사활동을 촉구했다.

특히 중국 측 대표였던 곽말약은 국제적십자사의 인물들은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독립적이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된 국제적 조사단을 조직해 세균전과 관련된 조사를 수행해달라고 국제사회에 요구했다. 이 요청에 따라 세계 각국의 관련 분야 과학자들로 구성된 국제과학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회는 7개국의 학자(스웨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브라질, 소련, 중국) 10명으로 구성됐으며, 후일 중국과학문명사의 저술로 유명해지는 조셉 니담은 영국 대표로 참가했다. 1952년 6월 21일 중국에 도착한 위원회는 6월 23일부터 북경을 시작으로 중국의 동북지역과 북한에서 조사활동을 벌였다. 북한에 들어가 조사활동을 벌인 것은 7월 말이었다. 북한 지역의 조사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았고, 나머지 기간은 대부분 중국지역에 대한 조사에 소요됐다. 위원들이 다국적이었던 만큼 언어 문제가 컸으나 위원회의 내부 활동에서는 불어가 사용됐다. 조사는 현지조사, 현지인들의 증언청취, 항공조사, 포로가 된 미국인 조종사에 대한 면담 등 다양하게 진행됐으며, 8월 말에 마무리됐다.

조사보고서는 본문은 65쪽이지만 첨부된 각종 관련 자료들을 포함하면 전체 6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서이다. 보고서는 불어, 영어, 러시아 어, 그리고 중국어로 간행됐다. 이 보고서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미군에 의한 생물학전의 공격대상이 됐으며, 이들이 세균전에 사용한 방법의 상당 부분은 2차대전 중 일본군이 개발한 생물학전의 방법을 사용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보고서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왔다. 일단 조사에 참여한 위원들이 중국혁명에 호의적인 사람들이라는 점, 조사가 중국 측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이뤄지고 보고서도 북경에서 출판됐다는 점, 또 미군의 세균무기 사용을 증언한 미군 조종사들이 본국 송환 후에 자신들의 증언을 부인한 점, 그밖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 주장된 매개곤충의 살포가 효과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점 등이 그 이유로 거론됐다. 이런 논란과는 별도로 이 보고서는 역사적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의료사를 연구할 때 진지하게 고려해야할 자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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