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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에서 이 한 권의 소설이 방대한 「인간극」의 대표작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어떤 이유에서 이 한 권의 소설이 방대한 「인간극」의 대표작으로 받아들여졌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1.09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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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39강. 이동렬 서울대 명예교수의 ‘발자크 『고리오 영감』’

지난 7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시즌2 고전읽기 39강은 6섹션 ‘근대·현대 소설’의 세 번째 강연으로, 이동렬 서울대 명예교수가 발자크 『고리오 영감』을 읽어낸 자리였다.
이동렬 명예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한 뒤 프랑스 몽펠리에대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 교수,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 한국18세기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스탕달 소설 연구』(1982), 『문학과 사회묘사』(1988), 『프루스트와 현대 프랑스 소설』(공저?1998), 『빛의 세기 이성의 문학』(2009)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좁은 문』, 『소설과 사회』, 『적과 흑』, 『말도로르의 노래』 등이 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10월 31일 진행된 38강 전형준 서울대 교수의 ‘루쉰 『IQ정전』’은 PPT강연으로 진행돼 지면 소개를 생략합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자크(1799~1850)의 소설 작품에 대해 얘기할 때에는 그의 방대한 작품군인 「인간극」의 구조부터 살펴보는 것이 한 방편일 수 있다. 1842년 발자크는 그때까지 자신이 쓴 소설과 앞으로 쓰려고 구상한 소설 작품 137편을 「인간극」이라는 제목 하에 묶으면서, 긴 서문을 붙여 그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발자크가 1850년 51세의 나이로 일찍 서거했기 때문에 애초의 방대한 「인간극」의 구상은 다 완성되지 못했다. 편집자의 방침에 따라 작품 수에 약간씩 가감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인간극」에 편입되는 작품의 수는 90편 내외를 헤아린다.

▲ 발 자크(1799~1850)

우선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라는 「인간극」의 세 범주사이에는 (개념적 애매성도 있지만) 양적 불균형이 대단히 심하다. 「인간극」은 대부분이 풍속 연구이고, 일부분이 철학적 연구, 그리고 극히 일부분이 분석적 연구로 구성돼 있다. 좀 더 심각하게 제기되는 의문은 분류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여섯 개의 정경으로 나뉘는 풍속 연구의 하위 구분에서는 분류 개념의 층위가 달라서, 정경의 구분이 대단히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극」은 논리적 엄밀성이 결여된 얼마간 자의적이고 애매한 분류 체계로 이뤄져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극」의 분류 체계는 독자 일반에게 적어도 발자크의 방대한 작품 목록을 정리해 보여 주는 유용한 도구의 역할을 한다.

                     
『고리오 영감』의 대표성

『고리오 영감』을 발자크의 대표적 작품으로 보는 데는 폭넓은 합의가 이뤄져서, 이제 발자크 문학을 얘기할 때는 그 견해가 일종의 관례처럼 굳어 있을 정도다. 어떤 이유로 이 한 권의 소설이 방대한 「인간극」의 대표작으로 받아들여진 것일까. 발자크의 특징적인 소설 기법 중 하나는 한 소설에 출현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도 다시 등장하는 인물 재등장 기법이다. 작자 스스로 더없이 대담한 시도라고 말하고 있는 이 방법에 의해서 발자크는 자신의 소설 작품들을 각각 독립된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연관을 갖는 하나의 전체로 만들 생각이었다. 『고리오 영감』은 이 인물 재등장 기법이 처음 시도된 작품인데, 이것이 이 소설을 「인간극」의 대표작으로 만드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발자크의 묘사 기법이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소설이라는 점 또한 『고리오 영감』을 「인간극」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람과 그가 처한 환경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정론적 사고의 소유자였던 발자크는 사건 전개에 앞서 소설의 서두를 긴 배경 묘사로 채우는 경우가 흔하다. 『고리오 영감』은 이 묘사가 철저하게 방법론적으로 실현된 전형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리오 영감』은 작가로서의 발자크의 생애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시기의 작품이다.

발자크 연구자 대부분은 이 작가가 원숙한 경지에 이른 시기를 1834년경으로 보고 있다. 『고리오 영감』은 이 시기를 특징짓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소설 작품으로서의 흥미와 가치에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우선 치밀하게 짜인 단단한 구조의 소설이라는 인상을 준다. 보케르 하숙집의 상세한 묘사로 시작되는 도입부에서 구성원들이 차례로 떠남으로써 하숙집이 와해에 이르는 결말 부분까지 『고리오 영감』은 빈틈없는 구성을 보여 주는 한 편의 완결된 소설로 평가받을 만한 작품이다.

부성애의 화신 고리오

작품 제목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이 소설은 우선 고리오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가 소설의 주요한 흥미를 이루고 있다. 1834년 9월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할 때, 발자크는 딸들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한 노인의 비교적 단순하고 짤막한 일대기로 소설을 구성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집필 과정에서 분량이 늘어나고 구조가 복잡해져서 『고리오 영감』은 마침내 「인간극」의 대표작인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지만, 고리오의 이야기는 여전히 소설의 중심적인 한 뼈대를 이루고 있다.

『고리오 영감』의 서두에는 고리오와 아울러 또 하나의 수상쩍은 인물 보트랭의 정체가 수수께끼처럼 제시되는데, 이 두 가지 수수께끼가 풀려 가는 과정이 소설적 흥미의 일부를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추리 소설적 흥미를 연상시키는 발자크 소설 기법의 한 예를 볼 수 있다. 『고리오 영감』에서 고리오의 정체를 밝히는 임무를 일종의 탐정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이 소설의 중심인물 라스티냐크이다. 보케르 하숙집과 상류 사교계를 오가며 파리의 미궁으로 독자를 인도하는 역할의 라스티냐크가 고리오라는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젊은 주인공의 변모

▲ Honore-de-Balzac

『고리오 영감』은 부성애의 비극을 그린 것 이상으로 젊은 주인공이 사회와 부딪쳐 변모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하나의 중심인물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는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스탕달의 소설과 달리 발자크의 소설들은 대체로 복수의 인물이 이니셔티브를 나누어 갖는 구조를 보여 준다. 『고리오 영감』에서는 고리오, 보트랭, 라스티냐크가 각각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고, 이 세 인물 이외에 보세앙 부인 및 고리오의 두 딸이 비중 있는 인물로 등장해서 파리 상류 사회의 이면과 실상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파리로 올라가 성공을 추구하는 지방 출신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인간극」에서 익숙한 주제의 하나인데, 라스티냐크의 경우도 그 범주에 속한다.

신속한 출세를 꿈꾸는 젊은 야심가가 치열한 경쟁 사회와 빚어내는 갈등의 드라마가 『고리오 영감』이란 소설의 중심 주제의 하나다. 젊은이가 사회에 나가 사회와의 접촉으로 변모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은 서양 전통 소설에서 흔한 유형의 하나인데, 프랑스 문학에서는 이런 유형의 소설을 교육 소설(roman d’?ducation) 내지 수련 소설(roman d’apprentissage)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젊은 주인공 라스티냐크에게 초점을 맞출 경우, 『고리오 영감』은 교육 소설의 한 예가 될 수 있는 소설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육은 심원한 자아의 계발과 개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고리오 영감』에 나타난 젊은 주인공의 변모는 사회 현실과 다수의 여론에 인간 개성이 복속되는 결과를 보여 줄 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교육 소설이라고 일컬을 경우, 그것은 지극히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교육 소설일 것이다. 이 교육의 결과 라스티냐크는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인상적인 야심가의 한 전형이 된다.
 
물질적 가치관  

「인간극」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충실한 기록이며 그 사회에 대한 탁월한 역사적 증언으로 평가받는다. 「인간극」을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소중한 기록으로, 그리고 작가 발자크를 위대한 리얼리즘 작가로 얘기할 때 주로 대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 시기가 배경이 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유형의 사회든 물질적 가치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 사회가 없겠지만, 특히 산업 사회는 물질적 가치가 지배적 가치로 통용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왕정복고와 7월 왕정을 주 대상으로 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탁월한 기록으로 통하는 「인간극」이 물질적 가치관에 지배되는 세상을 표상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극」은 일반적인 상식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물질적 가치관이 가차 없이 지배하는 세계를 보여 준다. 발자크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만큼 『고리오 영감』은 「인간극」 전체의 물질 만능의 세태를 반영하는 점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물질적 이해관계에 무관심하거나 초연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남녀 관계의 양상도 황금만능 사회의 왜곡된 인간관계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고리오의 드라마 역시 그 핵심에 금전 문제가 놓여 있다. 고리오 영감이 신속히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을 잘 이용한 것이므로 그는 어느 면에서 그 사회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의 비극은 막대한 부를 잘 관리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젊은 주인공 라스티냐크의 변모는 물질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고리오 영감』 이후의 그의 행적은 궁핍한 가문의 장자의 운명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정도가 지나친 타락처럼 보인다. 「인간극」은 때때로 보통 사람의 상식적 수준을 넘어서는 가혹한 현실을 얘기하면서 병리적 사회를 폭로한다.

발자크의 작품들이 동시대에 종종 비도덕적이라는 공격을 받았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발자크의 소설을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 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인정하는 데 별 이의가 없는 현대 독자들은 「인간극」의 현실을 감상이 배제된 정확한 인식의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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