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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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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15.11.0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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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 모리스 버먼 지음|김태언·김형수 옮김|녹색평론사|272쪽|15,000원

기술과 시장의 힘의 압력하에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였던 본래의 소도시는 천천히 변해 마지막에는 사람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엘리트 호텔, 초고속도로, 주차장들의 집합인 악몽의 게젤샤프트(이익사회)가 됐다. 본래는 개성과 목적이 스며 있던 장소가 이제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완전히 삭막하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그것을 ‘진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 답은 쉽다. 미국사람들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고독의 미로』(1950)에서, 미국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보란 기본적으로 새로움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새로운 발명품을 향유하지만, 그들의 생명력은 억지웃음으로 고정돼, 노련과 죽음을 부정하면서 삶은 움직임 없는 돌덩이로 변해버린다”라고 그는 썼다. 미국에서 진보는 삶의 질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오히려 진보는 조이스 애플비의 표현대로 “버릇없는 ‘더 많이’의 역학”을 가리킨다. 모든 것에 있어서 또 무엇이든지 ‘더 많이’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서는, 정말 아무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근본적으로 아무 생각이 없다. 허슬링은 기술의 종교에 힘입어서 우리를 의미가 배제된 빈곤한 장소로 데려왔다. 이 생활방식에 대한 비판자들은 완전히 무시됐고, 방송 전파들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계속하라는 권유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활동 밑에는 커다란 슬픔이 있다. 허슬링과 기술은 그 슬픔을 억누르도록 고안돼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논의가 암시하듯이 표면이 이미 부서지고 있다.

미국 역사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그것이 이끈 삶의 방식에 대한 조금이라도 중요한 정치적 반대자는 오직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미국 남부였다는 것을 깨달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노예제라는 낙인 때문에―그리고 나는 노예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경시하려는 게 아니다―남부의 바깥에서 대안적 생활방식으로서의 남부의 가치를 깨닫는 데 거대한 저항이 있었다.

실제로 남북전쟁은 노예제를 둘러싼 전쟁이었지만 갈등은 그보다 더욱 깊었다. 그것은 ‘문명의 충돌’을 나타내었다. 물론 남부인들이 프레더릭 테일러와 로이드 블랭크페인 같은 사람들을 예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예고를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런 유형을 알았던 것이다. 1860년 링컨 공화주의자들의 선출과 함께 그들은 점점 더 북부의 특징이 돼가고 있는 허슬링이, 진보에 대한 잘못된 개념과 여유로운 삶에 대한 몰이해와 함께 오직 더 심해질 것이고,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남부를 경제적 식민지의 지위로 추락시키는 것임을 이해했다. 바로 그래서―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미국의 문화사가·사회비평가인 저자 모리스 버먼은 존스홉킨스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럽 및 북미 유수의 대학에서 가르쳤으며, 2006년에 멕시코로 이주했다. 주요 저서로 The Twilight of American Culture(1989), Dark Age of America(2006) 등이 있다.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는 “미국 역사의 모순들과 그것들이 변화된 세계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예민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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