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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풍경 혹은 풍속사의 진실
역사의 사각지대를 비추는 풍경 혹은 풍속사의 진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10.19 1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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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_ 『경성 상계史』·『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화 100년』

우선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한 권은 『경성 상계史: 잃어버린 반세기의 기록』(박상하 지음, 푸른길, 448쪽, 22,000원), 다른 한 권은 『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화 100년: 풍속의 형성, 도시의 탄생, 정치의 작동』(손정목 지음, 한울, 248쪽, 23,000원. 이하 『근대화 100년』)이다. ‘경성 상계’란 말 그대로 ‘서울 상업계’다. 그러니 ‘서울 상업계의 역사’인 셈인데, 저자는 이를 가리켜 ‘잃어버린 반세기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눈여겨볼 부분이다. 『근대화 100년』 역시 부제가 책의 성격을 다 말해준다. 근대의 풍속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빚어낸 도시가 태어나고, 그 위에 정치가 교묘히 작동하는 한국 근대화의 시간표를 경험적 차원에서 재구성한 책이다.
 
『경성 상계史』는 사실 2008년(생각의나무)에 ‘근대 상업도시 경성의 모던 풍경’이란 부제를 달고 『경성 상계』로 출판됐던 책이다. 새로운 출판사에서 내용을 상당 부분 더 추가해서 거듭났다. ‘근대 상업도시 경성의 모던 풍경’이란 부제가 ‘잃어버린 반세기의 기록’으로 바뀌었고, 300쪽 분량이 448쪽으로 늘어났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출전을 밝혀주는 원주 목록’, 전작에선 없었던 두 개의 장을 보탰다.

이 책은 구한말부터 광복 전후의 격동기까지 한국 상업 발달의 시초를 연 생생한 근대사의 현장을 하나씩 복원한다.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한국 근대 경제경영사의 기록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구한말 개항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8·15 광복 전후기까지 근대 자본주의의 싹을 틔우는 경성 商界의 모습과 변화과정을 담고 있다. 5백 년 조선 상계를 대표하던 종로 육의전의 붕괴, 쏟아져 들어온 근대화의 새로운 문명의 이기, 일제 강점기 일본의 거대 자본에 맞선 경성 상계의 흥망성쇠, 그 줄기를 계속 이어 와 지금의 한국경제계를 짊어지고 있는 기업의 탄생과 역사적 배경이 때로는 소설적인 얼개로, 때로는 방대한 사료를 기반으로 기록돼 있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경성 상계史’는 어떤 황당무계한 신화가 결코 아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애써 찾아야 하는 유효한 역사다.”

 

한국 근대 경제경영사의 기록

저자 박상하가 말하는 ‘유효한 역사’는 풍속사의 모습이지만, 한국 기업의 탄생과 쇠락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것은 종로 육의전 상인의 맥이 끊기는 대목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잘 알려져 있듯, 조선 육의전의 명맥을 이은 최후의 상인 백윤수(훗날 백남준의 조부)다. 훗날 ‘태창 재벌’을 있게 한 인물이다. 이 태창의 성장과 쇠락 속에 조선 상계의 상징 육의전의 마지막 모습이 오버랩 된다.

“백윤수는 종로 육의전에서 조상 대대로 견직물 시전을 경영해온 거상으로, 혹독한 화폐 개혁의 고비를 힘겹게 넘어선 1907년에는 전통적인 시전 상인의 모습에서 탈피해 기업 형태의 ‘백윤수상점’을 열었다. 이어 1926년에는 다시 지금의 종로 2가 종각 건물 바로 옆에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손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 백윤수의 후계자 백낙승은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기 직전에 타계했는데, 그의 장례는 매우 쓸쓸했다고 한다. 종로 시전 상인의 마지막 후손이자, 이 땅에 맨 처음 재벌을 건설한 총수의 죽음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었다.”

『근대화 100년』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와 『한국도시 60년의 이야기』를 쓴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의 10년 만의 신간이다. 1928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 광복, 6·25, 3·15 부정선거, 서울의 도시 개발 등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직접 겪으며 역사의 당사자이자 학자로서 자신이 기억하고 기록한 것을 한국 근대화 100년이라는 화두로 묶은 책이다. 1951년 제2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3·15 부정선거로 실직했다가 복직, 이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등을 역임했다. 1977년 서울시립대(당시 서울산업대학) 부교수로 부임해 연구자의 길을 걷다가 1994년 정년퇴임했다.

서울의 현대사를 입체적으로 다뤄온 전작과 달리, 이번 책에서는 일제 강점기 징병제에 항거하기 위해 줄담배를 피웠던 중학교 학생들의 사연, 통금 해제로 인한 사회상의 변화, 1960년 정·부통령 선거의 실무자로서 바라본 3·15 부정선거의 전모 등을 풍속, 도시, 정치라는 키워드로 정리했다.

저자는 제1부 ‘풍속의 형성’을 담배 이야기로 시작한다. 왜 담배였을까. 저자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고 양심선언(?)을 했는데, 사실 이런 ‘조기흡연’은 1940년대 조선의 중학교에선 무척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때는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미나미 지로)은 전 조선인을 충분히 ‘황민화된 신민’으로 만드는 것을 통치의 제1의 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그 사전 작업으로 조선 반도에 대한 전면적인 징병제 시행을 추진했으며 이는 ‘조선 지원병 제도’라는 이름으로 1938년 공포된다. 저자를 포함한 당시의 모든 중고등학생이 이 징병제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담배를 피움으로써 일제 징병제를 부정했다. 흡연은 하나의 저항 운동이었다.

“‘흡연의 풍속’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인의 황민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일본인 지도층이 부르짖는 내선일체 사상이 조선인 머릿속에 주입돼 있었다면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건 전쟁터에서 죽건 문제 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조선인 스스로 일본의 황민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기 싫다고 저항한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흡연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시의 탄생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저자는 시민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전기를 추적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갈 즈음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할 무렵, ‘전기 사업’이 시행된다. 그러나 저자는 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된 전기 사업이 실상은 제국주의 열강과 일제의 야욕에 속아 넘어간 ‘국제사기’라고 지적하면서,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오늘의 ㈜한국전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짚어낸다.

 

역사의 당사자 혹은 학자로서의 기억

『근대화 100년』의 또 다른 한 축은 ‘정치의 작동’이다. 3·15 부정선거를 이렇게 증언한다. “‘야당 도시 대구에서 이기붕 표가 80%를 넘지 않도록 조작을 하라.’ 그것이 내가 상부로부터 받은 긴급지시였다. 결국 모든 선거구에 개표의 실제에서 자유당의 이승만·이기붕 표 98표 묶음을 만들고, 그 앞뒤로 민주당의 장면 표 한 표씩을 섞어 장면 표 100표라는 식으로 발표를 하도록 긴급지시를 내렸다. 그때부터 선거는 엉망진창이 됐다.”

저자는 일제 패망 후 전국의 행정 공백을 미군과 함께 메운 한국인들에 관해서도 지면을 할애했다. 이 시기, 정치와 행정을 장악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른바 ‘한국인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미군정 장관들의 선택을 받은 한국인들은 누구였을까. 저자에 따르면 정답은 뜻밖에 간단하다. 미국인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며(영어 가능자),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으며(영·미 유학파), 종교라는 인맥에 포함된 자(개신교 신자)였다. 당시의 인선을 두고 저자는 이렇게 일갈했다. “개신교 신자도 아니고 영어에도 능통하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단명했다.”

두 책 모두 역사를 해석하거나 설명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 아직 주류 학계에서 다루지 못한 역사의 사각지대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망의 노래가 될 수 있다. 두 책 모두 ‘풍경’을 다뤘으되, 자신의 지나온 풍경을 반성하는 풍경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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