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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 길에 만난 ‘단식하는 부처상’ … 라호르에서 문득 삶을 깨닫았을 때
방황 길에 만난 ‘단식하는 부처상’ … 라호르에서 문득 삶을 깨닫았을 때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10.1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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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48. 구슬(玉)족이 세운 쿠샨 제국, 동서를 연결하다
▲ 페샤와르 거리의 남자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로마제국, 파르티아 제국, 쿠샨 제국, 흉노 연맹, 한 제국이라는 상호 인접한 강대 세력이었다. 이들의    지배 아래 국제 교역이 이뤄졌다. 제국은 필요할 때 전쟁을 하고, 또 다른 필요에  의해 교역을 했다.

 
불행이나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느닷없는 재앙은 인간을 극도의 공포, 슬픔, 절망의 상태에 빠트린다. 지진은 그런 재앙 중의 하나다. 이런 면에서 지진과 같은 재앙은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선물이다.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고, 존재의 의미를 숙고하고, 하여 마침내 스스로 겸허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정자

 사는 일이 고달프지 않을 리 없지만, 유난히 고통스러운 시기가 있다. 내게는 30대 중후반이 그랬다. 피한다고 피할 수 없는 이상 기왕에 닥친 고난을 인내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졌다. 정신적 번민이 깊어만 갔다. 여행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지친 마음에 위안이 됐다. 낯선 곳에서 나는 거리를 두고 나 자신을 바라봤다. 질식할 것 같은 숨통이 트이고 여유가 생겼다. 삶의 무게를 견딜 힘, 역경에 굴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단식하는 부처상」을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 파키스탄 라호를 박물관 소장 「단식하는 부처상」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

루디야드 키플링의 아버지 존 록우드 키플링(John Lockwood Kipling)이 초창기에 큐레이터로 일했다는 파키스탄 라호르(Lahore) 박물관을 찾았다가 당시의 비쩍 마른 내 모습보다 훨씬 처연한 불상을 보고 나는 사는 일이 별 거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건방진 말을 쓰자면 삶에 대한 開眼이라고나 할까. 더 이상 삶에 꺼둘릴 필요 없다는 일종의 頓悟 상태를 체험한 것이다. 진정한 지혜는 漸修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오랜 단식으로 피골이 상접한 나머지 핏줄 하나하나가 도드라져 보이는 인간 붓다의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단식 부처상은 볼수록 압권이었다. ‘釋迦(Shakya)족의 聖者’라는 의미의 釋迦牟尼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覺者 즉 부처(Buddha)였다. 釋迦(Shakya)족은 페르시아인은 Saka, 중국인은 塞種이라 부른 유목민이다.

라호르는 파키스탄 북동부에 자리한 펀잡(Punjab) 주의 주도다. Punjab라는 말은 ‘다섯 개의 강(five rivers)’이라는 페르시아어 ‘panj-ab’에서 비롯됐다. 인더스 강의 지류인 젤룸강(the Jhelum), 첸납강(the Chenab), 라비강(the Ravi), 수틀레지강(the Sutlej), 베아스강(the Beas)이 흐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인도 정벌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 곳이 바로 라호르와 잘란다르(Jalandhar) 사이를 흐르는 베아스 강 앞이었다.

아라비아 해에 면한 상공업도시 카라치에 이어 파키스탄에서 둘째로 큰 이 도시는 인더스 강의 지류인 라비 강을 끼고 있으며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제국의 중심도시로 발달해 왔는데, 특히 16세기 무굴제국 하에서는 인도의 델리, 아그라 등과 더불어 제국의 중심 도시로 발달했다. 라호르 시내에 있는 샬리마르 정원과 라호르 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라호르를 중심으로 한 펀잡 지역은 인더스 문명의 태동기부터 인도-아리안인들의 터전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그리스계 박트리아에 이어 월지족이 이룩한 위대한 쿠샨왕조가 이 땅의 주인이었던 적이 있다. 칭기즈칸의 후손임을 자부한 티무르가 왔고, 또 그의 후손임을 내세운 ‘호랑이’ 바부르(Babur)가 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몽골족의 후예가 지배하는 무굴제국이 세워졌다. 건축술의 백미, 세계 8대 불가사의 타지마할의 조성은 애처가인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있어 가능했다. 그는 이름 그대로 ‘세상(자한)의 왕(샤)’으로서 원 없는 호사를 누렸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금으로부터 2천년도 넘는 과거 시기. 기원전 1세기 말의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교통은 불편했고, 여행은 어느 모로나 힘들고 위험했다. 지리적 정보 또한 불완전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필요한 물건을 찾아, 원하는 물자가 있는 곳이라면 험준한 산길도, 열사의 사막도, 드넓은 강도 건넜다.

당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로마 제국, 파르티아 제국, 쿠샨 제국, 흉노 연맹, 한 제국이라는 상호 인접한 강대 세력이었다. 이들의 지배 아래 국제 교역이 이뤄졌다. 제국은 필요할 때 전쟁을 하고, 또 다른 필요에 의해 교역을 했다. 당시의 불편한 운송 사정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물류의 저장과 교환과 분배가 이뤄졌다. 육로 수송의 일등공신은 박트리아의  낙타였다.

이런 과정 속에 이민족의 사상, 신앙, 관습이 서로에게 전파 확산됐다. 엠포리움(emporium: ‘큰 상점’ 혹은 ‘중앙시장’ 또는 ‘상업중심지’)이라 불리는 교역소에 모인 상인, 여행자, 순례객들은 서로가 정보원이 됐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경의 그레코-로만 지리학자로 알려진 카락스의 이소도루스(Isodorus of Charax)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파르티아의 역사(Parthian Stations)』라는 제목의 책에는 당시의 교역소와 교역 루트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안티오크(Antioch)에서 시작된 교역루트는 팔미라(Palmyra)를 경유해 시리아 사막을 건너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과 티그리스 강을 낀 도시 셀레우키아(Seleucia)에 당도한다. 그곳에서 길은 동쪽으로 향해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엑바타나(Ecbatana)와 메르브(Merv)에 이른다. 거기서 길이 갈라져 북쪽으로 부하라(Bukhara)와 페르가나(Ferghana)를 지나 몽골초원을 향하고, 또 다른 길은 박트리아(Bactria)로 뻗어 있다.

파르티아 제국(the Parthia Empire) 혹은 아르사크 제국(the Arsacid Empire) 또는 아쉬카니아 제국(Ashkanian Empire)은 기원전 3세기 중반 파르니(Parni) 부족의 족장 아르사케스(Arsaces) 형제가 헬레니즘 국가 셀레우코스 제국(the Seleucid Empire or Seleucia, B.C. 312-63)에 반기를 들고 당시 속주(strapy)이던 이란 동북부의 파르티아 지방을 정복한 뒤, 희랍인 싸트랍(satrap, 총독)을 몰아내고 수립한 왕조다. 파르니(Parni or Aparni: 고대 희랍어로는 Parnoi or Aparnoi)는 한티(Xanthi), 피쑤리(Pissuri)와 함께 중앙아시아의 3개 부족 연맹체인 다해(Dahae, Daae, Dahas or Dahaeans)를 구성하던 부족이었다. 다해(Dahae)는 라틴어 명칭이고, 고대 그리스어로는 다싸이(Dasai), 범어로는 다싸(Dasa)라고 했다. 『리그베다』와 같은 힌두교 경전에는 다싸(the Dasa)가 아리아(the  ̄Arya)의 적으로 묘사돼 있다.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대략 B.C. 171~138) 1세의 치세 때는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메디아와 메소포타미아를 탈취, 제국의 영역을 확장했다. 전성기의 파르티아 제국은 현재의 터키 중동부 지역인 유프라테스 강 북안에서 이란 동부까지 뻗어 있었다. 이 제국은 로마 제국과 중국 한 제국 사이의 실크로드 무역로 한복판에 위치해 있던 탓에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됐다.

▲ 150년 경 쿠샨제국의 최대 영역 출처: http://www.metmuseum.org/toah/hd/kush/hd_kush.htm

파르티아(Parthia)라는 나라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어 Parthava에서 왔다. 이 말은 ‘파르티아인들의(of the Parthians)’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미 말했듯 파르티아 제국의 창건자는 파르니(Parni) 부족의 족장 아르사케스(Arsaces)와 동생 티리다테스(Tiridates)다. Arsaces의 고대 페르시아어는 Arshak다. 이 말이 조금씩 변모해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쉬가바트(Ashgabat: ‘the city of Ashk/Arsaces’)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는 투르크메니스탄인들이 자신들이 아르사케스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한다는 징표일 수 있다. Ashgabat는 투르크멘어로As¸gabat, 페르시아어로는 Eˇsq- ̄ab ̄ad라고 한다. ‘사랑의 도시(the city of love)’, 혹은 ‘헌신의 도시(the city of devotion)’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파르티아 제국의 건립자 아르사케스의 말뜻이 ‘사랑’이나 ‘헌신’인 셈이다. 한편 파르티아를 중국에서는 安息國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도 제국의 창건자 아르사케스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세월이 흘렀다. 기원전 130년 이후 어느 때. 파르티아 제국은 다양한 유목민 연합세력의 공격을 받는다. 중국 사서에 索種 또는 塞種으로 알려진 사카족(the Sakas), 마싸게타에(the Massagetae), 그리고 月支 등이 제국을 위협한 것이다. 그래도 파르티아는 무사했다. 또 세월이 흘러 기원후 224년 4월. 과거 이란 남부의 작은 속주에 불과했던 페르시아계 사산왕조(the Sassanids)에 의해 파르티아 제국은 몰락했다.

이란 땅에서 파르티아 제국이 강성함을 뽐낼 때 중앙아시아에는 외세의 물결이 밀어닥친다. 흉노에 패해 서천을 선택한 월지족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大夏 즉 그리스인이 세운 박트리아왕국을 침탈한 것이다. 월지의  한 갈래인 귀상(貴霜) 흡후(翎侯)가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주변국들을 병탄해 귀상왕조 즉 쿠샨제국을 세우는 역사 드라마의 서막이 시작된 셈이다. 『史記』 「大宛列傳」 第63 大夏條는 저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大夏는 大宛(페르가나)의 서남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규수(아무다리야 강)의 남쪽에 있다. 그들은 정착생활을 하며 성곽과 가옥이 있고, 대완과 풍속이 동일하다. 大君長은 없지만 때때로 성읍에 작은 우두머리[小長]가 있다. 그 군대는 약하고 싸우기를 두려워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장사에 능하다. 대월지가 서쪽으로 도망쳐 와서 그들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대하를 모두 신속케 했다. 대하의 백성은 많아서 대략 100여 만 명이 되고, 그 도읍은 藍市城인데, 시장이 있어 각종 물건들을 판매한다. 그 동남쪽에는 身毒國이 있다.”

大夏 정복에 성공한 月支는 대하의 도읍 남시성을 점거하고 그곳을 자신들의 수도로 삼는다. 『後漢書』 「西域傳」 第78 大月氏國條에는 藍氏城으로 기록돼 있는 이곳에 각종 물자가 교환되는 거대한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미뤄 대하의 도읍지는 교역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동서문물이 교류되는 문명의 교차로였음에 틀림없다.

“大月氏國의 거처는 藍氏城이다. 서쪽으로 安息(파르티아)과 접해 있으며 49일 거리이다. 동쪽으로 장사의 거처와는 6천537리 떨어져 있고, 낙양과는 1만6천370리 떨어져 있다. 호구는 10만, 인구는 40만, 병사는 10여 만 명이다. 처음에 월지가 흉노에 멸망당하자 마침내 대하로 이주하고, 나라를 휴밀(休密)·쌍미(雙靡)·귀상(貴霜)·힐돈(肹頓)·도밀(都密)로 나눠 모두 五部의 흡후가 됐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서 귀상흡후인 丘就卻이 4흡후를 멸하고 스스로 왕이 돼 국호를 귀상이라고 했다. 안식을 침공하고 高附의 땅을 취했다. 또한 복달(濮達)과 계빈을 멸하고 그 나라를 모두 차지했다. 구취각은 80여 세에 사망했고, 그 아들 염고진(閻膏珍)이 뒤를 이어 왕이 됐다. 다시 천축을 멸하고 장군 1인을 두어 그곳을 감령케 했다. 월지는 그 뒤로 극도로 부강해졌다.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를 칭해 ‘貴霜王’이라 하지만, 한나라는 옛날의 칭호를 그대로 써서 ‘대월지’라고 부른다.”

부득이한 서천에 따른 오랜 유랑이 마침내 쿠샨제국의 건설로 마무리된 것이다. 제국의 수도는 바그람(Bagram, 과거의 Kapi´si), 페샤와르(Peshawar, 과거에는 Purus·apura), 탁실라(Taxila, 과거에는 Tak´sas·il ̄a), 마투라(Mathura) 네 곳이었다. 간다라 왕국의 영역에 속하는 곳들이다. 쿠샨인들이 간다라(페샤와르)를 정복했다. 그리고 127년부터 제국의 통치자가 된 카니시카(Kanishka) 대왕은 수도를 푸시깔라왓디(Pushkalavati: 오늘날의 차르삿다 구역)에서 간다라(페샤와르)로 옮겼다. 그리고 1~5세기에 걸쳐 간다라는 쿠샨왕들의 비호 아래 최정점에 이른다. 1001년 마흐무드 오브 가즈니(Mahmud of Ghazni)가 간다라를 정복한 뒤 더 이상 간다라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았다. 사람과 국가가 소멸하듯, 지명과 국명 같은 명칭도 사라지거나 대체된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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