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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의 3차 원정이 성공했더라면 동아시아 바닷길은 잠잠했을까?
고선지의 3차 원정이 성공했더라면 동아시아 바닷길은 잠잠했을까?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9.2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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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17. 사막길이 막히자 바닷길이 번성하다
▲ 쿠차 키질 석굴을 멀리서 바라본 장면. 하서회랑과 실크로드 연변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고대에도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리는 풍부한 물을 이용한 관개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곡물 생산지였다.

태종의 시대 곧 정관연간은 서역 경영의 시대였다. 여러 번 얘기했던 것처럼 당 태종은 서역 경영에 특별히 공을 들였고, 그의 서북방 이민족 정책은 대부분 이 서역 경영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동북방에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관심이 지대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지만 서북방 이민족에 대한 정벌과 공략이 성공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동북방에 대한 정벌전쟁은 적어도 태종의 시대에는 모조리 실패로 끝난 전쟁이었다. 스스로 사방을 평정한 황제라고 떠벌렸던 태종이지만, 그 떠벌림의 유일한 걸림돌이 동북방의 이민족 국가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대고구려 전쟁에 패해 죽은 황제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 태종 이후의 서역 경영이 성공일변도이기만 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당의 첫 번째 화번공주인 문성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이룩했던 토번과 당 사이의 평화마저도 10여년을 넘기지 못했다. 한참 강성해져 가던 토번이 세력 확장을 포기할 리 없었다. 이들의 세력 확장의 주된 목표가 됐던 곳이 바로 서역이었다. 오늘날의 청해성 상당 부분까지 영역으로 삼았던 토번의 입장에서는 진출하기 쉬운 지역이었고, 더군다나 河西 지역만 장악하면 서역 전체를 자연스럽게 복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서역은 富를 축적한 지역이었고, 토번의 황량한 땅들과는 달리 적지 않은 곡물을 생산하는 곳이기도 했다. 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한 공을 기울이는 곳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이민족에 둘러싸인 지역의 특성상 지켜내기 쉽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당의 서역 정책이 사막북도(천산남로)에 치중돼 있어서 상대적으로 사막남도에 대한 전략적 고려와 방비가 허술했다는 점도 인접한 토번이 공략해오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지난 16회 글에서는 당번회맹비의 내용을 잠깐 소개한 바 있다. 이 당번회맹비는 당과 토번의 지루한 서역쟁탈전이 토번의 승리로 결정됐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사이 670년과 687년의 두 차례에 걸쳐 토번이 안서사진을 함락했고, 727년에는 다시 瓜州가 토번에 점령당했다. 무엇보다 절정은 75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Shi Rebellion)이었다. 안사의 난은 당 제국의 생명줄을 끊어내는 치명타로 작용했다.

안사의 난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종의 시대는 태종의 ‘貞觀之治’에 비견해 ‘開元之治’라 불릴 정도로 성세를 구가했다. 신흥강자인 토번의 맹공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역공을 가할 정도로 강력하기도 했다. 그 역공의 선봉장이 바로 고구려 유민 출신의 안서절도사 高仙芝(?~755년)였다.

고선지는 747년의 제1차 서역 원정에서 토번에 복속했던 小勃律國(오늘날의 파키스탄 기르기트 지역)을 포함해 서역제국 72개국의 항복을 받으면서 당 제국 초기의 강역과 영향력을 재확인한다. 이 1차 원정의 성공은 토번을 서역에서 배제했다는 점에서 당의 서역 경영에 호재였다.

하지만 750년 출정에서 石國(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지역)과 사라센제국의 동맹을 막기 위해 포로로 잡아 장안으로 압송한 석국의 왕을 장안 조정에서 참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순식간에 사태는 급반전됐다. 서역제국과 사라센제국이 결속하는 계기가 됐고, 자신감에 찬 장안의 조정은 병사마저 충분히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탈라스 전투는 패배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사라센의 동방진출도 거기까지였고, 토번 역시 쉽게 준동할 수 없는 경각지세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역경영이 완전히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이 어수선한 시절 당의 목줄을 죄는 사건이 일어난다. 앞서 언급한 안사의 난이 그것이다. 초기에 반란세력을 경시했던 장안의 조정은 전투에 연거푸 패했고, 연패를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토번과 대치하고 있던 河西(난주와 돈황 주변 지역)와 隴右(장안과 하서 사이의 감숙성 동부 지역)의 强軍을 빼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겨우 왕조의 명맥을 유지했지만, 토번의 하서지역 점령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로써 당의 서쪽 변경, 아니 당시의 세계로 이어지는 길이자 대당제국의 경제적 젖줄이었던 서쪽의 교역경제는 붕괴로 내몰리고 만다.

당이 서역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게 없다. 중개무역의 이득이 줄어드는 정도야 군사적으로 약화된 시기에는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핵심 교역로였던 하서와 서역 일대를 장악했던 세력이 토번이라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토번이 하서와 서역을 장악했던 시기는 780년 무렵부터 848년까지의 약 70년 정도인데, 이때 토번의 지역 지배 정책에 대해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사 연구의 권위자인 나가사와 카즈토시 와세다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 시대의 돈황은 과주 만호부에 소속됐고, 조세는 모두 조(粟) 또는 보리에 의한 현물세였으며, 티베트 되로 계산돼 과주로 보내지고 있었다. 동전은 전혀 사용하지 않게 돼 『丙戌年寺院普請出納拱』[S.6829V(2)]에서 볼 수 있듯이, 재목 값이나 임금 등도 모두 보리, 조, 白麵(흰 밀가루), 옷감, 기름 등의 현물로 지불되고 있다. 이것은 정복자인 티베트인이 그 전성기에도 동전을 사용하는 경제단계에 있지 않았다는 것과 당시 토번이 기획하고 있던 大食(사라센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하서 지방의 동전이 무기로 유용됐던 점 등의 다양한 이유가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돈황의 역사와 문화』, 민병훈 옮김, 사계절, 2010년, 211쪽)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전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현물세가 부과되고, 물물거래가 경제에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가사와 교수는 토번이 전성기에조차 동전을 사용하는 경제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필자가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토번의 경제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토번의 ‘교역의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漢代에 서역로가 개척된 이후 唐代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 곧 실크로드를 포함해 그 서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의 화폐 단위는 교역에 거의 지장이 없을 만큼 공용의 기준을 마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화폐가치의 균일화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세계 공용화폐 곧 오늘날의 달러화와 같은 것이 등장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동일한 화폐를 사용한 것은 아니고, 다른 화폐라고 할지라도 국경을 넘어서 서로 통용될 수 있을 정도로 화페가치를 비슷하게 맞춘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하더라도 국가 간 교역에는 크게 도움이 됐다.
 
그런데 그 정도 수준의 경제교역망을 이루고 있던 중심부에 갑자기 화폐경제의 개념조차 불투명한 지배자가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 새로운 지배자는 경제문제 혹은 교역에서 얻어지는 이익보다는 군사적 패권에 더 관심을 보였다. 물론 여기에는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8세기 초를 기점으로 중앙아시아의 동쪽과 서쪽 모두 정치적인 안정이 흔들리면서 8세기 중엽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국가 범위를 넘어서는 교역이라는 것은 국가 간의 평화 혹은 안정을 기반으로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중앙아시를 장악한 새로운 패자 토번은 충만한 세력 확장 욕구 때문에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화폐경제와 교역경제에도 무지했다. 이 때문인지 토번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던 70여 년간 중앙아시아를 핵으로 하는 동서교역은 자연스럽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탈라스 전투를 기점으로 석국을 비롯한 서역제국의 서쪽은 사라센제국 곧 이슬람세계에 빠르게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중앙아시아 교역경제의 주역이었던 소그드인들이 더 이상 당 제국의 영향력에 의존하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중앙아시아 소그드인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중앙아시아의 반은 교역에 밝지 못한 토번의 땅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물론 한참 강성하던 토번이 하서 지역을 완전히 복속하는데 2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이 지역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이 지역의 한족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까지도 토번의 등장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 토번이 하서지역을 점령했던 8세기 후반 돈황 인근의 유림석굴에 그려진 토번왕의 공양도.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토번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신당서』「토번전」에는 沙州가 함락된 후에 “사주 사람들이 모두 오랑캐의 옷을 입고 오랑캐의 신하가 됐으나, 매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중국의 옷을 입고 대성통곡한 후에 이를 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번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漢人 역시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일부 한인들에 국한되는 사례일 것이지만, 적어도 이 지역 사람들이 토번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당나라도 토번도 중앙아시아의 교역경제에서 이득을 취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결과였다. 이렇게 토번의 하서와 서역 진출은 사막길을 막아 당의 경제적 숨통을 막아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토번이 하서와 서역을 완전히 점령하기 이전에도 토번의 잦은 침략이 通商에 심각한 장애가 됐기 때문에, 당 조정의 눈길은 이전부터 점차 교역규모가 급성장하고 있던 동쪽 해상로로 돌려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토번이 서역 진출을 가속화하던 시기 당의 동방은 어떠했을까. 7세기 중반, 곧 태종이 문성공주를 티베트로 시집보내면서 서쪽의 새로운 강대국 토번과 당 사이에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오자마자, 태종은 동북정벌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물론 태종의 동북정벌 곧 고구려 원정은 실패로 끝나지만, 동북의 안정이 제국의 앞날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태종의 국제정세 인식은 적확한 것이었다. 당의 입장에서 하나 더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러한 태종의 동북정벌 실패가 후대의 실패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쪽에서는 성공했으나 동쪽에서는 실패했던 당 태종을 이어 황권을 쥔 인물은 바로 고종 李治(628~683년, 재위 649~683년)다. 고종은 30여 년간 재위했는데, 재위 기간에 사용한 연호만 14가지에 이른다.

연호를 많이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가 많았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의 통치 30여 년 중의 절반은 武則天(628~705년)이 정치에 깊이 관여했던 시기였다. 무측천(측천무후)은 655년에 고종의 황후가 됐는데, 天后로 봉해지면서 고종과 나란히 二聖으로 불려졌다. 잘 알려진 대로 조정의 실권을 크게 휘둘렀으니, 곧 655년부터 705년 실각하기까지 약 반 세기 동안 당 제국을 통치했던 주역이다.

바로 이 시대에 동아시아 사회에 확연한 변화를 초래한 국제적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나·당 연합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이다. 다만 백제 원정과 고구려 원정은 태종 시대의 서역원정과는 사뭇 다른 바가 있었다. 서북의 이민족국가들이 내부의 분열 혹은 민족 간 대립 등의 상황 때문에 공략할 만한 요소가 적지 않았던 것과 달리, 동쪽의 경우는 동북의 여러 이민족을 배제하면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백제가 鼎立해 끊임없이 경쟁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공략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건이 달랐기 때문에 서역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지역에서 당은 전형적인 이이제이의 정책을 구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에 적극적 부응하면서 활용하려고 했던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하지만 신라를 동맹으로 얻었다고 해서 곧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군사력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다. 당은 기마군단이 아니라 해상 군사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수륙양방면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던 고구려, 강력한 해상세력을 일구어냈던 백제, 그 틈바구니를 뚫고 한강 하류의 경기만에 대한 지배력을 지켜냈던 신라는 모두 만만찮은 해상세력을 겸비하고 있는 국가였다. 그에 맞설만한 채비를 갖추지 않고는 쉽게 도모할 수 없는 국가들이기도 했다. 신라는 그런 당나라의 약점을 메우는 동맹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양자가 서로를 신뢰한 상태에서 맺어진 동맹은 아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곧장 나당 간의 전쟁이 개시됐다는 사실이 이들 국가 간 신뢰의 한계성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어느 일방의 갑작스러운 배신이 아니라 준비된 충돌이었기 때문에 나당 간의 신뢰관계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와 당의 관계가 나당전쟁 이후 안정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도 좀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신라로서도 대제국인 당과 오랜 기간 맞서는 것은 국력의 저하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고, 전쟁 후의 손실을 복구하기 위해서라도 당과의 공적인 그리고 사적인 교역에서 얻을 수 있는 부가 필요했다. 반면 당으로서는 장안 코앞까지 짓쳐들어올 수 있는 토번과의 잦은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배후의 안정이 필요했고, 새롭게 동북의 강자로 떠오른 발해를 견제할 세력도 필요했다. 양자의 필요성이 동아시아의 균형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만들어낸 균형은 이후 신라와 당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단 한 차례의 무력충돌도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그것이 또 동아시아 해상교역이 성장하는 또 다른 기폭제가 됐다.

토번에 의한 서역 경영권의 상실, 이것은 장안을 제국의 중심으로 삼아 안정적인 서역경영을 꾀함으로써 패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해왔던 당 왕조로서는 간과하기 힘든 패착이었다. 그 패착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새로운 길, 해상교역로였다. 사실 위진 시대 이후 해상로를 통한 교역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고, 7세기 말이 되면 서역로에 비견될 정도로 비중이 증가했던 만큼 당 조정의 ‘대안으로서의 해상로’ 발견은 오히려 때늦은 감마저 준다.
 
일례로 7세기 말에 인도로 구법여행을 다녀온 義淨(635~713년)이 집필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도 당시 증가하는 해상로 교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의정은 이 책에 인도구법을 했던 승려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서역길 곧 육상 실크로드를 통한 인도 구법승의 숫자와 해상로를 이용한 인도 구법승의 숫자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해상로를 통한 교역의 비중 역시 서역로에 비견할 만한 규모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선지의 3차 원정이 성공했더라면, 아니 토번의 서역 경영이 조금만 더 유화적이고 상업적이었더라면, 사막길의 쇠퇴는 좀 더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번이 사막길을 가로막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바닷길을 통한 교역의 증가는 더 이상 지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닷길은 육로와는 달리 대규모 운송 등 육로와는 다른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육로와의 차별성이 바닷길의 번성에 기폭제가 됐기 때문이다.

거기에 당은 公貿易만이 아닌 私貿易까지 적극 장려하면서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고를 보충하려 서두르고 있었다. 私的 이익은 자유롭게 놓아두면 언제나 성장속도에 있어서 公的 이익이 성취해내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기 마련이다. 안사의 난 이후 장안 조정은 지방의 절도사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公貿易도 私貿易도 경쟁적인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이것 역시 바닷길의 번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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