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8:40 (금)
‘신경숙 표절 사건’의 심층에 놓인 것은 무엇일까?
‘신경숙 표절 사건’의 심층에 놓인 것은 무엇일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9.07 15:4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계간지 가을호 리뷰_ 논쟁의 출발점에 선 표정들

표면적으로는 ‘표절사건’처럼 보이지만, 심층에는 ‘한국문학의 환골탈태’를 향한 길고 뜨거운 문학논쟁의 전선이 그려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가을 계간지들은 이제 막 그 초입에 들어선 한국문학의 일부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뜨거웠던 자리는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지난 6월 한국문단을 발칵 뒤흔든 ‘신경숙 표절 사건’은 가을 계간지 곳곳에 흔적을 드리웠다. 이 흔적이 치유의 상흔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이번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창비와 문학동네는 각각 ‘긴급 기획: 표절 문제와 문학권력’(<창비> 169호), ‘특집: 비평 표절 권력’(<문학동네> 84호)을 내세웠다. 다른 계간지도 피해가지 않았다. ‘쟁점: 좌담 표절 사태 이후의 한국 문학’(<문학과사회> 111호),  ‘기획: 한국 문학장과 신경숙 표절논란’(<문화/과학>83호), ‘특집좌담: 신경숙이 한국문학에 던진 물음들’(<오늘의문예비평> 98호) 등을 내놓았다. 일종의 진단과 대안을 동시에 제시한 접근이다. 비문예지인 <역사비평> 112호도 우회적으로 ‘창비와 신경숙이 만났을 때’라는 단일 글로 문제점을 건드렸다. 다만 <황해문화> 88호만이 문학장의 이 추문에서 비켜서 있었다.

<황해문화> 88호는 김명인 편집주간의 권두언 「극단과 과잉의 시대에 대한 성찰」은 <황해문화>가 어째서 ‘특집: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서’를 기획했는지를 알려주는 글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보-보수, 좌파-우파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내적으로 해체되는 중인 데 반해 우리 사회 내부가 이러한 철 지난 대립적 구분법이 상투화, 경직화돼가는 상황은 우려스러운 수준을 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왜 중도를 두려워하는가」(김진석), 「무엇이 이념 갈등을 증폭시키는가」(윤성이), 「중도수렴의 확대 경향성과 그 과제」(채진원), 「해방기 중간파 노선의 재인식」(김기협) 등이 ‘특집’으로 묶였다.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들의 논의가 ‘중도 수렴’을 향해 포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문화/과학> 83호의 무게는 ‘특집: 페미니즘 2.0’에서 찾는 게 적절할 것 같다. 비록 ‘기획: 한국 문학장과 신경숙 표절논란’을 안고 있지만, 수록한 글들은 이미 ‘긴급토론회’ 방식으로 문단 안팎에 공개된 글들이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표절 의혹을 둘러싸고: 사실, 진실, 맥락의 문제」(이명원), 「베껴쓰기, 혹은 필사의 파국: 신경숙 표절사건과 한국문학의 폐쇄성 비판」(오창은), 「생태계로서의 문학 VS. 시스템으로서의 문학」(심보선)을 수정·보완해 수록했다. 이동연 편집인은 “우리는 ‘페미니즘 2.0’이 기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유지·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흐름을 일으킬 수 있는 ‘확장과 전환, 참여와 가능성’의 이름이기를 바란다”라고 ‘페미니즘 2.0’ 특집 구성 배경을 밝혔다.

 

‘표절’ 주어를 밝히지 않은 메이저 계간지들

이제 시선을 ‘표절’과 그 이후를 진단하는 논의들로 옮길 차례다. 앞의 특집·기획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표절’의 정확한 주어를 제시한 곳은 <문화/과학>과 <오늘의 문예비평> 뿐이다.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창비>는 뭉뚱그려서 ‘표절(문제, 사태)’로 접근했다. 이러한 접근이 메이저 계간지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문학동네> 84호에서 편집위원 권희철은 「눈동자 속의 불안―2015년 가을호를 펴내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국」의 일부 문장들을 별다른 표시 없이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 그리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제대로 검토해보지도 않고 즉각 반발한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차용’이다. 바로 이 ‘차용’이란 용어 때문에 <문학동네>의 ‘특집: 비평 표절 권력’은 김병익, 도정일, 최원식과 같은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이 모이고, 장은수가 홀로 “신경숙 소설은 미시마 유키오 소설의 분명한 표절이다”라고 지적하고, 신경숙의 「전설」을 적극 옹호한 윤지관의 글에 대해 “읽는 사람을 현혹하려는 수사학적인 태도가 지나치다”라고 비판했더라도, 나아가 김도언, 손아람, 이기호, 장강명, 신형철 등의 좌담을 통해 한국문단의 구조를 다시 생각한다고 성찰점을 제시하고자 했더라도, 좀 더 과감한 자기비판과 갱신을 향한 치열성이 부족한 것으로 읽히게 된다. 이런 결여는 <창비>에서도 발견된다.

<문학과사회> 111호의 ‘쟁점’으로 다뤄진 ‘좌담: 표절 사태 이후의 한국 문학’에는 황호덕, 김영찬, 소영현, 김형중, 강동호가 참여했다. 어쩌면 <문학과사회>의 이 좌담은 한국문학 갱신을 위한 제삼자적 기록의 일례로 남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문학과사회>의 경우, 표절 문제를 넘어 한국 문단을 향한 근본적 문제 제기로 확대된 이번 사태와 관련해 우리의 과실이 정확히 무엇인지 냉정히 성찰할 시간이 필요했다. 신속한 반성의 포즈가 오히려 책임을 방기하고 사태를 종료사키는 전략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여러모로 미숙한 대응들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양한 반성적 사유들을 촉발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문학과사회>의 이 좌담은 <오늘의 문예비평>98호의 ‘특집좌담’과 같이 읽을 필요가 있다. 중심(서울)이 아닌 주변(부산)의 목소리가 날것 그대로 담겨 있는, 촘촘한 비평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분명하게 “‘지역’의 관점에서 이 사태를 점검해 보기로 했다”라고 말하면서 “대담 참석자들은 지금까지 ‘중앙’에서는 생산되지 못한 유익하고 설득력 있는 진단과 대안을 쏟아”냈다고 평가한다. 구모룡, 김곰치, 조갑상, 최영철, 전성욱 등이 참여한 이 대담은 한국문학 생산 시스템에 대한 발본적인 재점검(구모룡), 대안으로서의 건실한 지역문학의 필요성(최영철)을 제안했지만, 구체적으로 언급된 논의들도 하나하나가 흥미롭게 읽힐 수 있다.

<오늘의 문예비평> 특집좌담이 창비와 백낙청 문제를 지적했고, 또 먼저 출간된 <실천문학> 가을호에서 평론가 김명인이 창비와 백낙청 편집인에 대해 비판한 이상(<교수신문> 794호, 2015.8.24.), <창비> 169호가 어떤 태도로 나올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백영서 편집주간의 글 「책머리에」 자체가 좀 묘한 데가 있다. “문제가 된 두 작품 간의 문자적 유사성이 표절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라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그것이 의도적 베껴쓰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이는 문학에서 ‘표절’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깊이있게 논의할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른바 논점 이탈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긴급기획: 표절 문제와 문학권력’으로 묶인 세편의 평문은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토론회(6.23)의 정은경 토론문, ‘신경숙 표절 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 토론회(7.15)의 김대성 토론문, 그리고 한국작가회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연재된(7.23~8.3) 윤지관의 글이다. 특히 윤지관은 「전설」과 「우국」의 비교분석을 통해 문제가 된 대목의 ‘유사성’은 분명하나 그 문장들이 사용된 맥락과 내적인 기능은 다르며 전체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세계관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윤지관 역시 문학에서는 학술논문과 달리 ‘차용’을 통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비평문학의 황폐화와 ‘창비’의 과제

이들의 논의 수위를 떠나 <창비>가 ‘표절 문제’로 ‘조심스럽게’ 접근한 기획에서 이미 공개된 논의를 비록 수정·보완의 형태라고는 하지만 ‘재활용’하고 나아가 표절을 ‘차용’, ‘유사성’ 등의 애매모호한 용어로 둔갑시킨 것은 그간 <창비>가 쌓아온 ‘적공’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와 관련 <오늘의 문예비평> 특집좌담에서 구모룡이 한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창비는 훼손된 것이 아닙니다. 창비는 두 가지 기능을 했습니다. 먼저 여러 가지 담론을 이끌었는데, 그중 ‘분단체제론’이나 ‘87년 체제론’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후 담론들과 문학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동아시아론’과 ‘장편소설론’이라는 양축에서였습니다. ‘동아시아론’은 흐지부지 끝났고, ‘장편소설론’은 증거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시의 정치성’ 논의 역시 담론 차원에서 끝나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창비의 자본을 뒷받침하는 것이 신경숙이라는 점에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 신경숙이 중요한 게 아닐, 87년 체제를 극복하는 소설을 발굴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창비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모룡의 이 진단은 천정환의 글 「창비와 ‘신경숙’이 만났을 때―1990년대 한국 문학장의 재편과 여성문학의 발흥」(<역사비평> 112호)과 겹쳐진다. 평론가 천정환은 백낙청이 신경숙의 『외딴 방』을 상찬한 바로 그 의식(무의식)의 기저를 찔러간다. 잘 알려진대로 백낙청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외딴 방』과 견줄 수 없다는 견해를 폈으며, 나아가 이 작품 『외딴 방』이 『삼대』, 『임꺽정』을 능가하는 성취를 이룩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천정환은 이를 두고 “『외딴 방』이 대단한 실험적 작품이나 ‘진정한’ 노동문학으로 받아들여진 1990년대 주류 비평 정신의 한계나 궁지, 그리고 백낙청 비평의 모순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런 비평의 태도가 2000년대 이후 한국 비평문학의 황폐화와 관계가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라고 비판했다.

표면적으로는 ‘표절 사건’처럼 보이지만, 심층에는 ‘한국문학의 환골탈태’를 향한 길고 뜨거운 문학논쟁의 전선이 그려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가을 계간지들은 이제 막 그 초입에 들어선 한국문학의 일부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돌멩이 2015-09-07 18:04:32
박민규의 사과에 박수를 보낸다.
이제 신경숙의 진정한 고백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