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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면 누가 쓰레기를 치울까?
태풍이 지나가면 누가 쓰레기를 치울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9.02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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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 가을호, ‘표절’ ‘문학권력’ ‘대안’을 논하다

문단의 뜨거운 이슈가 됐던 ‘신경숙 표절’ 논란 이후 가장 먼저 얼굴을 내민 가을 계간지는 <실천문학>이다. 2015 가을호는 ‘표절’ ‘문학권력’ ‘대안’을 선명하게 그려넣었다. 세 가지 방식을 취했다.

첫째 젊은 작가 좌담. ‘한국문학의 폐쇄성을 넘어서’로 박민정, 서효인, 손아람, 이만영, 최정화, 황인찬 등이 참여해 조목조목 폐쇄성 넘기를 논했다. 둘째 문학 기자 좌담. ‘문단 외부에서 본 신경숙 표절 논란과 문화 권력 논쟁’이란 제목으로 권영미(뉴스1), 김슬기(매일경제신문), 김여란(경향신문), 전신식(한겨레21) 등이 머리를 맞댔다. 흥미롭게도 이른바 ‘조중동문’ 문화부 기자는 참여하지 않았다. 셋째 두 가지 특집이다. ‘한국문학, 위기와 활로’라는 특집1에 서영인, 이동연, 장성규, 임태훈 등 문학(화)평론가들이 뛰어들었다. ‘문화 생산의 구조 변동과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이란 특집2가 아무래도 ‘대안’ 모색 쪽에 섰는데, 김현, 위근우, 단편선, 조지은, 이기원 등 다양한 문화 부문 종사자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돌직구는 ‘특별기고’ 쪽에서 나왔다. 「유체이탈의 현상학: 표절 사건과 세월호 참사는 무엇이 다른가」(김명인)와 「환멸에서 몰락까지, 나는 시대의 증언자가 돼야 하나」(정문순) 두 글이다.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인 김명인은 문학권력의 중심축인 창비(창작과비평사)를 곧바로 겨냥했다. 신경숙 표절에 대해 애매모한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한편 문학평론가 정문순은 신경숙 표절 사태의 ‘눈’으로 떠오른 자신의 처지를 빗대 표절 이후의 문제를 더 큰 사안으로 짚어냈다. 이들 문학평론가의 문제적 대목을 발췌했다.

「유체이탈의 현상학: 표절 사건과 세월호 참사는 무엇이 다른가」(김명인 인하대 교수)

‘문학 권력’과 관련해서라면 창비, 문학과지성, 문학동네 등 적건 많건 메이저 3사 모두 깊이 연루돼 있을 수밖에 없다. 3사 모두 잡지, 출판사 그리고 양자 모두에 관여하는 비평가들로 구성된 편집 및 기획위원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바로 이 삼각 구조가 상품 미학을 탄생시키는 원천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3사 각각의 특수성과 차이를 무시하고 이들을 무조건 ‘한통속’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그리 온당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문화연대 주최 두 번째 토론회에서 발제로 나선 천정환에 의하면, 2014년 기준으로 문학동네의 연매출은 255억 원, 창비가 222억 원, 문지는 40억 원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일단 문지는 지난 20년 전체를 따지자면 이런저런 혐의가 없지 않지만, 현존하는 문학 권력으로는 ‘자격 미달’로 보인다.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따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들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나로서는 그들에 대해서 얼마간의 응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문학동네는 첫 출발부터 어떤 문학적 이념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내놓고 장사를 하겠다고 시작한 것이니 문학 권력임에는 분명해도 도덕적 비난을 할 여지는 별로 없다. 게다가 문제의 신경숙·남진우 부부가 그 ‘회사’의 대주주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는 차라리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그 두 사람을 제외하고 거기 관여한 비평가와 작가들의 처지가 조금 딱하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먹고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하면 일관성은 있으니 비난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창비다.

(……) 이번 신경숙 일이 터지고 창비가 할 수 있는 최악의 대응을 지켜보면서 이제 완전히 한 시대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올 것이 온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직접 목도하는 것은 차라리 잔인한 일이다. 창비가 이렇게까지 돼도 좋은가, 게다가 ‘문제는 창비’라는 말은 곧 ‘문제는 백낙청’이라는 말이다. (……) 창비가, 그리고 백낙청 선생이 진정 반성에 값하는 어떤 자세가 돼 있다면 지금과 같이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는 듯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게다가, 설마 기획된 것은 아니겠지만, 지난 7월 14일 온라인으로 발표된, 신경숙의 표절 행위를 변호하는 윤지관의 글은 어쩌면 창비 측의 집단 멘털리티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창비에 대한 마지막 남은 얼마간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충분히 해줬다.

 

「환멸에서 몰락까지, 나는 시대의 증언자가 돼야 하나」(정문순 문학평론가)

표절을 주장한 글이 손톱만큼도 현실을 바꿀 수 없었고, 그 이후 ‘표절 작가’가 주춤하기는커녕 더욱 기세를 올리고 문학 권력의 손으로 키워져 문학 권력의 반석에 등극하는 모습을 보며 정의가 힘이 아니라 힘이 곧 정의라는 전도된 가치관의 위력을 절감한 나로서는, 작금의 일이 사필귀정이나 정의의 회복 쯤으로 받아들여질 법도 했다. 그러내 내게는 오히려 비현실적이거나 기이하게 느껴졌다.
(……) 혹자는 문인의 표절이 정치인보다 부각되는 이유는 문인에 대한 높은 기대치 때문이라고 하지만, 언론의 눈에 작가는 이 나라 정치인에게 별로 요구되지 않는 도덕성까지 덤으로 떠넘길 만한 만만한 존재일 뿐이었다. 언론은 출판사 보도 자료를 받아쓰며 신경숙을 한껏 띄워줬던 전력은 잊어버렸다. 정부 눈치만 보다가 메르스 사태 정보를 SNS에 선점당한 언론에게 인기 작가의 스캔들은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신경숙 표절 사건에서 언론만큼 재미를 보고 한몫 챙긴 곳이 있을까 생각하니 허탈해진다. 신경숙 표절 사건의 실상이 얼마나 비틀어졌는지는 문학 권력의 핵심 축인 언론이 한국문학의 타락을 개탄하고 문학 권력을 비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신경숙 표절을 유명 소설가의 스캔들로 해독한 언론의 관심은 신 씨의 인터뷰를 기점으로 폭발하더니 이내 식었다. 「전설」의 표절이 20년이 넘은 일이라는 점도 잊혔다. 강산이 두 번 변하기 전의 일을 다루겠다면 흥분보다는 차분한 접근이 필요했지만, 언론은 과거지사인 표절에만 눈에 불을 밝혔을 뿐 미래의 일인 표절 이후의 대책은 관심 밖이었다. 언론이 집중한 표절도 문학계 전반이 아닌 신경숙 한 사람에게만 쏠렸고, 신 씨의 허다한 표절도 아닌 「우국」과 「전설」의 관계에만 집중됐다. 언론이 이슈 집중화의 전략으로서 「우국」 표절을 프레임으로 설정하는 바람에 신 씨가 「우국」 표절을 시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아리송한 인터뷰를 한 것으로 사태는 사실상 마무리됐다. 아마 신 씨가 기사회생에 성공한다면 언론에 큰 절을 해야 할 것이다.

신경숙 표절 사건을 돈으로 보고 한몫 잡겠다고 덤벼들던 장사치들이 빠져나간 현재, 뒷감당할 일만 고스란히 남았다. 언론이야 휘발성 강한 이슈를 터뜨리고 빠져나가면 그만이지만,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무수히 널려 있는 잔해들은 누가 치워야 하나. 태풍도 이제는 지나난 과거이고 쓰레기 치우고 삽 뜨는 일은 현실의 과제가 됐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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