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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통일 이면에 ‘비단길’ 둘러싼 唐·티벳 국제전 있었다
신라 통일 이면에 ‘비단길’ 둘러싼 唐·티벳 국제전 있었다
  • 서영교 중원대·한국학과
  • 승인 2015.09.0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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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612-676): 유라시아의 지정학을 결정지은 위대한 전쟁』 서영교 지음|글항아리|813쪽|38,000원

당제국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쪽에 전력을 투입했고, 서쪽 토번(티벳)이 강국이 되는 여건을 마련해줬다. 토번은 당이 백제멸망전쟁에 참전하자 670년 천산남로를   석권했다. 그러자 신라가 당에 도전했고, 결과적으로 당은 서쪽에 발목이 잡혀 이를 방치했으며, 679년 2차 대비천 전투에서 토번에게 참패했다.

 

676년 신라가 세계최강국 당나라와 싸워 이겼다고 하는데 이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천하의 당태종을 패배시킨 고구려도 만만치 않은 백제도 당나라에게 결국 멸망당했는데 왜 신라만 살아남아 한반도를 통합했지?

의문의 실마리는 세월이 흐른 후 풀렸다. 나당전쟁이 시작된 670년 당나라 최정예 주력 11만이 청해성 방면 티벳고원 大非川에서 발생한 결전에서 토번(티벳)군에게 전멸당한 것을 알았다. 대비천 전투에서 참패한 당의 장군은 고구려총독이었던 薛仁貴였다. 668년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지배기구인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그 도호에 설인귀를 임명했다. 669년 新城으로 치소를 옮겼고. 그해 말 설인귀는 고구려를 떠나 토번군과 싸우기 위해 청해호 부근 대비천으로 향했다. 당의 주력의 축이 만주에서 서역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670년 이를 알아차린 신라가 당과 전쟁을 결정했다. 실크로드 경영권을 둘러싼 당과 토번의 전쟁은 이것으로 끝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교역의 이권을 둘러싼 전쟁은 이후 150년 간 지속됐다. 실크로드 전쟁은 현재 우리 한국민족의 모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환경이 됐다. 675년 당은 한반도에 투입했던 말갈군대마저 티벳고원으로 이동시켰고, 나당전쟁은 종결됐다.

인도북부와 멀지 않은 라싸(Lahsa)에 둥지를 트고 있던 토번의 국왕 승쩬칸포도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전쟁 결과여부가 자국의 생존·번영과 직결된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25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645년 9월 18일 당태종은 안시성 앞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이동 중 수레 안에서 당태종은 심하게 앓았다. 첫 패배의 살인적인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10월 21일 하북 임유관 길가에서 태자가 맞이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병든 노인이었다.

646년 5월 경 토번의 사자가 장안의 궁정에 나타났다. 그는 3곡(斛)의 술을 담을 수 있는 7척 높이의 황금 거위 주전자를 바쳤다. 『구당서』토번전은 사신이 읽어 내려간 토번국왕 씅쩬칸포의 서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스러운 천자께서 사방을 평정하니 해와 달이 비치는 나라는 모두 신하가 됐지만, 고구려가 멀리 있음을 믿고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천자께서 스스로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토벌해 城을 무너뜨리고 陣을 함몰시켜 ‘빠른’시간에 개선하셨습니다. 폐하가 출행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니지 않았는데, 귀국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러기가 빨리 난다고 하나 폐하의 빠름에 미치지 못합니다. 거위는 기러기이니 금으로 만든 거위를 바칩니다.”

당태종이 고구려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하지만 토번은 당 내부에 방대한 첩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전쟁의 전말에 대해 토번의 국왕 승쩬깐포는 당태종의 패배를 훤히 알고 있었고, 비아냥대고 있다.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면 그렇게 빨리 귀국했을 수가 없지 않은가.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에 대한 집착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은 세계를 변모시킬 수 있었고, 토번의 운명도 바꿀 수 있었다. 6년 전인 641년 당태종은 딸 문성공주를 토번왕에게 시집보냈다. 고구려와 전쟁을 위해 서방에서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 당태종과 그 아들 고종은 거듭 문화사절을 티벳고원으로 보냈다. 당의 발달된 문물과 과학기술이 토번에 유입되고 있었고, 그것은 토번의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자양분이 됐다. 고구려가 빨리 굴복하면 토번의 장래도 어두워질 것이다. 전쟁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고구려가 당에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도 중요했다. 그럴수록 당의 전력은 동북방 요동에 묶일 것이고, 당은 서방 토번에게 더 많은 혜택을 베풀 것이다. 토번의 국왕과 군부 수뇌부들은 이렇게 외쳤을 수도 있다.“고구려여 영원하라!”사실 당이 고구려와의 전쟁에 매달려 있는 기간에 토번은 티벳고원을 통일하고 중국과 접경한 청해지역을 점령했으며,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사막 남로의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고도에 적응된 티벳계 민족들을 모두 포획했다. 당이 그들을 이용해 토번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유라시아 지정학을 결정지은 7세기 만주·한반도 전쟁의 시말은 이러하다. 당제국은 隋를 멸망으로 이끈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쪽에 전력을 투입했고, 그 결과 서쪽 토번(티벳)이 강국이 되는 여건을 마련해줬다. 토번은 660년 당이 백제멸망전쟁에 참전하자 실크로드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670년 천산남로를 석권했다. 그러자 신라가 당에 도전했고, 결과적으로 당은 서쪽에 발목이 잡혀 이를 방치했으며, 679년 2차 대비천 전투에서 토번에게 재차 참패했다. 이 여파로 681년에 돌궐 제2제국이 일어섰고, 698년 만주에 발해가 건국됐다.

이 책은 2011년 1월에 시작해 2014년 7월 말에 끝난 <국방일보> 장기 연재의 산물이다. 과정에서 구상된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논문으로 작성하는 기회도 됐다. 2014년 작성한 「연개소문의 對설연타 공작과 당태종의 안시성 철군」이 그 가운데 중 하나이다. 司馬光은 『자치통감』을 찬술하면서 후세를 위해 자신의 견해에 상충되는 자료들을 모아 『考異』란 책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당나라 시대 實錄의 편린들이 남아있다. 필자는 여기서 연개소문이 몽골리아의 설연타제국 매수에 성공한 증거자료를 찾았다. 645년 당태종이 안시성 앞에 있는 기간(6월~9월)에 연개소문에게 매수된 설연타 유목기병 10만이 당의 수도권 북부인 夏州(오르도스)를 공격했다(7월경). 설연타의 개입은 당태종을 고구려에서 철수하게 만들었다.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안시성주가 아니라 연개소문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새 글을 작성하고도 넣지 못한 것도 있다(「『文館詞林』에 보이는 蔣元昌과 蔣氏家門 醫官」, <역사학보> 222, 2014[박준형과 공저]). 백제 의자왕의 질병이 가져온 백제말의 정치혼란과 멸망에 관한 내용이다. 『문관사림』에는 645년 당태종이 의자왕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여기서 의자왕이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당 황실 의사 장원창의 백제왕진을 요청한 내용이 보인다. 필자의 부탁으로 연세대 의학박물관 박준형 선생이 장원창의 존재를 659년 편찬된 종합 藥局方인 『新修本草』에서 찾아냈다. 『新修本草』의 공동저자인 장원창은 당시 불치병이었던 反胃(위장병) 치료법 개발자였다. 이로써 의자왕의 病名 상정이 가능해졌다. 의자왕이 바로 죽었다면 새로운 후계자가 백제를 다스렸을 것이고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골골대면서 죽지 않아 문제가 됐다. 반위는 위염에서 시작해 위암에 이르는 오랜 진행과정을 가진다. 655년 경 의자왕의 병환이 심해지자 大夫人인 恩古가 권력을 장악하게 됐고, 부여융이 폐태자가 되고 부여효가 태자에 책봉됐다. 부여융에게 줄을 섰던 백제군부의 수장들인 흥수와 성충 등이 제거되고 백제정국은 파행을 거듭했다. 660년 7월 김유신이 5만 대군을 이끌고 황산벌에 나타났을 때 의자왕은 계백에게 병력 5천 밖에 줄 수 없었다.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포위됐을 때도 결사 항전코자 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의자왕이 웅진(공주)으로 가장 먼저 도주를 했고 부하에게 체포돼 당군에게 인도됐다. 당군이 금강에 상륙한지 딱 10일 만이었다.

 

 

서영교 중원대·한국학과

동국대에서 『나당전쟁사-약자가 선택한 전쟁-』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연구교수와 목원대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고대 전쟁에 관한 다수의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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