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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 대한 서구의 편견 비판…"분열보다는 통합의 내러티브 추구"
'동양'에 대한 서구의 편견 비판…"분열보다는 통합의 내러티브 추구"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9.01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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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29강. 김성곤 서울대 명예교수의 ‘사이드 『오리엔탈리즘』·『문화와 제국주의』’

‘문화의 안과 밖’시즌2 고전읽기의 4섹션 ‘근대 정신과 비판’이 4섹션 여덟 번째 강연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 22일(토) 진행된 강연이 그 마침표다. ‘근대 정신과 비판’의 마지막 텍스트는 에드워드 사이트의 『오리엔탈리즘』·『문화와 제국주의』였다. 이후 섹션5는 ‘근대 사상과 과학’ 편으로 이어진다.
김성곤 명예교수는 뉴욕주립대에서 레슬리 피들러 교수의 지도하에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대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를 지도교수로 ‘영문학 및 비교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런 인연을 내세우지 않더라고 그가 ‘사이드’의 탁월한 두 저작을 읽어내는 데 안목 있는 연구자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서울대 초대 언어교육원장, 서울대 출판문화원 원장, 국제비교한국학회 회장, 한국현대영미소설학회 회장, 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문화부 산하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미국문학과 작가들의 초상』, 『탈 모더니즘 시대의 미국문학』, 『문화연구와 인문학의 미래』,  『하이브리드 시대의 문학』,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 등이 있다. 이어령 교수와 공저로 『한국의 문화와 예절』을 영국에서 출간했고, 황동규 시인의 『미시령 큰 바람』, 문정희 시인의 『양귀비 꽃 머리에 꽂고』, 최인훈 작가의 『광장』 등을 영역해 미국에서 출간했다.
다음은 이날 김 교수의 강연 주요 내용이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에드워드 사이드의 중요성과 의의

▲ 에드워드 사이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의 ‘오리엔탈리즘 이론(Orientalism Theory)’은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탈식민주의 이론(Postcolonialism Theory)’의 근간이 됐으며, 데리다의 해체이론(Deconstruction Theory) 및 푸코의 담론이론(Discourse Theory)과 더불어 현대문학이론을 받치는 3대 축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사이드의 이론은 데리다나 푸코의 이론과는 달리, 사변적이지 않고 실천적이며, 서구의 편견과 문화적 헤게모니에 도전했고,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주변부를 조명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를 논하려면, 우선 그가 왜 중요하며 그의 비평이론들은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나 『문화와 제국주의』 같은 자신의 중요한 저서들을 통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오독과 편견을 비판했고, 서구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슬람과 동양에 대한 재조명을 주장했으며, 영토제국주의가 종식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문화제국주의의 실체를 파헤쳐 보여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결과, 사이드는 탈식민주의 및 다문화주의 이론의 시작과 전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론’
사이드가 43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출간해 세계를 놀라게 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1978)은 이후 전개되는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의 단초가 되고 세계 학계와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념비적 저서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그동안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동양은 단지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장소이자 하나의 환상적인 아이디어로만 존재해왔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문제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그러한 부정확한 시각과 잘못된 편견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학작품과 학술연구와 각종 저술을 통해 하나의 견고한 지식체계와 절대적 진리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그러한 명제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그것을 밝히기 위해 사이드는 방대한 자료들을 분석한다. 서구의 문헌에서 동양은 흔히 실체가 아닌 허구의 구축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유럽이 산출한 문학작품들을 예로 들어 분석하면서, 사이드는 그 속에서 동양이 얼마나 부정확하게 제시돼 있는가를 지적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가 지적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동양에 대한 그러한 지식과 진리가 서양에게 동양에 대한 권력과 헤게모니를 부여해줬으며, 그 결과 서양으로 하여금 우월감을 갖고 동양을 지배하고 교화는 것을 당여하게 생각하도록 해줬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오리엔탈리즘은 서구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동양은 서양의 바로 옆에 있을 뿐 아니라, 서양의 가장 크고 오래된 풍요한 식민지였고, 서구문명과 서구어의 근원이었으며, 문화적 경쟁자였고, 가장 중요한 타자의 이미지였다. 더욱이 동양은 서양을 정의하는 거울의 역할을 했다.”라고 말한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식은 그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동양에 대한 우월감과 권력을 서양에 부여했고, 식민지배 담론을 만들어내었으며, 제국주의를 합법화하게 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그러한 오리엔탈리즘 형성과정을 추적하고 탐색하며 성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문화와 제국주의』에 나타난 사이드의 사상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의 논의가 주로 중동에 한정돼 있다면, 『문화와 제국주의(Culture and Imperialism)』(1993)에서는 아프리카와 인도, 그리고 아시아와 호주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예전 식민지 국가들로 확대되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를 『오리엔탈리즘』의 속편이라고 불렀다.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사이드는 ‘문화’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하나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독립된 ‘심미적 영역’을 지칭하며, 또 하나는 매슈 아놀드가 1860년대에 말한 세련되고 고양된, 그래서 현대인의 황폐한 삶을 완화시켜주는 ‘각 나라의 최상의 지식과 사고의 보물창고’라는 개념이다.

사이드는 얼핏 정치이념으로부터 고립돼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19세기 리얼리즘 소설들이나 심미적인 문학작품들이 사실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제국주의적 태도와 언급과 경험을 기본으로 깔고 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 이념 형성의 일익을 담당해왔고 지적한다. 예컨대 제인 오스틴이 『맨스필드 파크』에서 해외 식민지를 제국인의 당연한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시각, 또는 대니얼 드 포의 『로빈슨 크루소』가 “머나먼 비유럽 지역에 자신을 위한 영지를 건설하는 한 유럽인의 이야기라는 것도 결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이드는 16세기 영국의 위대한 문인 에드먼드 스펜서가 영국군대에 의한 아일랜드 토착민의 말살을 상상했으며, 카알라일과 러스킨이 자메이카 폭동 때, 영국군에 의한 원주민 학살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그들의 문학작품을 읽을 때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것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들 문학의 심미성이나 순수성만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심지어 조셉 콘래드조차도 『암흑의 핵심』이나 『노스트로모』나 『로드 짐』에서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했을 뿐, 식민지에도 제국의 문화에 버금가는 토착민들의 훌륭한 대안문화가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제국주의 시대에 산출된 문학작품들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제국주의 이념과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그동안 문학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러한 면을 간과해왔다.

사이드는 예전 제국들의 문화제국주의뿐만 아니라, 국수의적 지국문화 지상주의에 빠져 문화를 전쟁무기로 악용하는 예전 식민지들의 극단적 민족주의 또한 똑같이 위험한 것으로 본다. 그는 일부 급진적인 국가들에서 아직 덜 성숙한 아이들에게 배타적인 정치이데올로기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사이드는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모든 문화를 동등하게 포용하고 인정하는 다문화주의를 제안한다. 그는 이러한 다문화주의를 통해 분리와 분열이 아닌, 포용과 통합의 내러티브를 제안한다. 『오리엔탈리즘』에서 다소간 비판적이고 전투적이었던 사이드의 전략은 『문화와 제국주의』에 오면 이해와 화해, 그리고 통합과 공존의 추구로 유연하게 바뀐다.?

■ 망명객의 귀환
사이드는 돌아갈 조국이 없는 실향민이자 영원한 망명객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서양을 원망하거나, 恨에 맺혀 복수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언제나 중도의 길을 택했고,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단세포적인 시각이 아니라 “대위법적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했으며, 분열보다는 통합의 내러티브를 추구”했다. 그래서 사이드는 제국주의 시대의 유럽과 현재 미국의 중동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무슬림 테러리즘도 똑 같이 비난했다. 사이드는 이름조차도 영어이름(Edward)과 아랍이름(Said)를 동시에 갖고 있었으며, 자서전에서 사이드는 카이로에서 빅토리아 칼리지(영국식 고등학교)에 다닐 때, 영어이름과 아랍이름이 섞인 것 때문에 급우들로부터 놀림도 많이 받았고, 동서양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방황했다고 쓰고 있다. 사이드는 이 세상 모든 문화, 모든 인종은 본질적으로 혼혈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혼종성(hybridity)’의 장점과 필요성을 주장했던 ‘두 세계 사이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인해 모든 문화는 서로 연결돼 있다. 그 어느 문화도 단일하거나 순수할 수는 없다. 모든 문화는 혼혈이며, 다양하고, 놀랄 만큼 변별적이며, 다층적이다.”라고 말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가 둘 다 자신의 개인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문학비평과 현실과 우리의 삶은 별개가 아니라, 같은 여정을 가는 것이라는 평소 사이드의 주장과 상통한다.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사이드는 자신의 의도가 분열과 원한과 복수가 아니라, 이해와 화해와 통합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단순히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가 결과적으로 끼친 긍정적인 점도 인정하며, 우리 모두가 ‘통합의 내러티브’를 창출할 것을 주문한다.

평생을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이해와 화해와 공존에 바친 사이드가 타계한지도 12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세계는 여전히 양극화된 영토분쟁과 종교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동에서는 IS까지 생겨나서 더욱 종교적, 정치 이념적 원리주의와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아시아에서도 미국과 손을 잡은 일본과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중국이라는 두 제국이 부딪치면서 새로운 영토분쟁과 신 냉전이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과 충돌의 시대에 평생을 동서의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바친 사이드의 삶과 저술을 돌이켜보는 것은 분명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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