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07:15 (수)
“데리다의 유령은 순수 실천의 이념을 개방하는 이념이다”
“데리다의 유령은 순수 실천의 이념을 개방하는 이념이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8.24 11: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 28강.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데리다『그라마톨로지』,『 법의 힘』: 해체론적 윤리학을 위하여’

‘문화의 안과 밖’시즌2 고전읽기 4섹션 ‘근대 정신과 비판’의 일곱 번째 강연이자 전체 28강은 프랑스 사상가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법의 힘』을 텍스트로 삼았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과)가 지난 15일(토) 강연을 진행했다. 사실 ‘근대 정신과 비판’목록에 데리다를 올린 것은 분명 예상 밖이었다. 데리다의 사상 저변과 그 영향력 등을 놓고 분명 이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날 강연은 데리다를 ‘문화의 안과 밖’시즌2팀이 목록에 올린 것을 설명하는 동시에, 데리다 사상의 유효성을 설득하는 작업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읽힌다.
김상환 교수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제4대학(소르본)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고등과학원 초학제독립연구단 연구책임자, 계간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문화, 정체성, 차이』(공저),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 『해체론 시대의 철학』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차이와 반복』등이 있다.
데리다의 해체론을 ‘철학사 방법론’으로 이해하면서 그의 문제작 두 권을‘해체론적 윤리학’이란 척도에서 접근한 김상환 교수의 강연 주요 부분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해체론과 철학사

해체론이란 무엇인가. 최대한 먼 거리에서 볼 때 데리다의 해체론은 철학사 방법론이고, 그것의 중심 물음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있다. 해체론은 서양의 비판적 분석의 전통이 편집증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할 때의 양상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사례라 할 수 있다.

■ 철학(사)의 안과 바깥: 울타리 그리기로서의 해체론
 

▲ 자크 데리다

그러나 데리다는 분명 데카르트-칸트주의자이되 헤겔 이후의 철학자, 헤겔을 계승하는 데카르트-칸트주의자다. 해체론은 분명 이성적 언어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극치를 달리는 철학사 방법론이되, 그것이 철학사에 접근하는 방식은 헤겔의 회상적 내면화의 길을 따른다. 해체론은 서양의 비판적 분석의 전통과 해석학적 회상의 전통이 하나가 되는 지점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해체론이 새롭게 산출하는 것은 과거에는 전혀 없던 어떤 것이 아니다. 해체론이 가리키는 기존 철학(사)의 바깥은 기존 철학(사)의 안쪽에서, 그것의 원천과 기원으로 소급할 때 발견되는 바깥이다. 해체론이 처음 등장할 무렵의 유럽은 구조주의에 의해 장악됐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해체론은 구조주의적 어법을 차용하면서 당대의 논쟁 상황에 들어서야 했고, 구조주의에 대한 독창적인 개입에 힘입어 폭넓은 주목을 끌었다. 이것이 해체론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우연이다. 그러나 해체론은 본성상 탈-구조주의적이다. 따라서 해체론의 철학사 인식과 그 접근 방식, 뿐만 아니라 해체론의 역사적 계보와 혈통 관계도 흔적의 의미에서부터 설명돼야 할 것이다.

■ 흔적과 텍스트: 초월론으로서의 해체론

일반적 의미에서 흔적이란 지금 부재하는 어떤 것이 남긴 자국이다. 그것은 현재 없는 것의 있(었)음을, 부재자의 현전을 나타내는 징표다. 해체론은 좀처럼 규정하기 힘든 어떤 흔적 앞에 있고, 그런 흔적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리는 어떤 또 다른 흔적(원-흔적)에 대한 회상의 의무 앞에 있다. “흔적은 타자와의 관계가 표시되는 곳이다.”(G, 69) 그 관계는 해체 가능한 어떤 것과 거기에 개입하는 어떤 외면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다. 니체와 하이데거를 이어 데리다가 일관적으로 추구하는 것, 해체론이 그 모든 비난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과제는 이론적 문화의 극복에 있다. 이것은 이론화(개념화 및 체계화)가 특정한 종류의 편견과 이데올로기 생산 기제라는 확신에서부터, 혹은 로고스가 존재론적 원-사태를 왜곡한다는 직관으로부터 출발한다.

해체론은 데카르트-후설의 이념인 ‘사태 자체로!’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텍스트는 역사가—그 밖에 철학이 규정하고 정의해 온 모든 개념적 내용들이—이론적 사유의 체계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드러나는 사태에 대한 명칭이다.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이런 의미의 체계는 어떤 이상적인 책으로 표상돼 왔다. 책은 진리의 총체성, 중심화되고 위계화된 총체성, 자족적이고 완결된 총체성, 나아가 총체성의 생생하고 충만한 현전성을 상징한다.

해체론과 윤리학

데리다의 초기 저작은 전통 형이상학과 관련된 언어, 의미, 실재 등의 문제와 씨름했다. 반면 후기 저작은 주로 윤리, 정치, 종교 등과 관련된 실천의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해체론적 윤리학의 중심에는 정의와 책임(응답)의 개념이 있지만, 최후의 문제는 서양의 실천적 세계 전체를 구조화하는 어떤 역사적 선험성이다. 데리다는 이론적 사유를 철저하게 해체해 실천의 고유한 지평을 여는 어떤 해체 불가능자, 다시 말해서 어떤 결정 불가능자를 논증코자 한다. 해체론적 문자학에서 그 결정 불가능자가 흔적이나 글-쓰기 혹은 차연 등으로 불린다면, 해체론적 윤리학에서 그것은 유령이라 불린다. 해체론적 윤리학은 해체 불가능하고 결정 불가능한 유령이 역설적으로 책임 있는 결정을 요구하는 正義의 위치에 오를 때 시작된다. 데리다는 윤리적 상황을 초래하는 결정 불가능자를 유령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해체론의 기초 용어인 흔적과 차연, 그리고 글-쓰기를 실천의 문맥으로 옮기는 이름이다.

■ 차연의 철학

데리다의 해체론은—만일 그것을 여전히 철학이라 부를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미래의 철학으로 부를 수 있다면—무엇보다 차이의 철학, 더 정확히는 차연의 철학으로 명명할 수 있다. 차연의 철학이 등장하는 사상사적 배경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현상학이고 다른 하나는 구조주의다. 해체론은 1960년대에는 문자학(grammatologie)의 형태를, 1990년 대 이후에는 유령학(hantologie)의 형태를 띠는데, 문자학과 유령학은 모두 현상학이 변형되는 마지막 지점들을 표시한다. 그렇다면 차연이란 또 무엇인가. 단순한 차이가 정태적 구별에 불과하다면, 차연은 사물들 사이에서 어떤 구별(규정)이 성립하는 역동적 과정을 가리킨다. 차연은 종합과 형성 혹은 분화의 원리, 모든 구조화된 나타남의 원리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학에 나타나는 음성중심주의를 강조한다. 음성언어를 참되고 본래적인 언어로, 반면 문자를 일탈적이고 불완전한 언어로 간주하는 것이 음성중심주의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차이뿐만 아니라 헤겔의 변증법적 차이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도 역시 음성중심주의에 휘말리고 있음을 밝힌다.

■ 해체론적 문자학과 글-쓰기의 역설

데리다의 초기 저작에서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반대는 문자의 환원 불가능한 위상에 대한 강조와 병행한다. 초기의 해체론이 문자학의 형태를 띠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해체론적 문자학에서 차연을 대신하는 용어는 글-쓰기(´ecriture)다. 여기서 글-쓰기는 경험적 차원의 단위, 구별(차이)을 선물하되 박탈해 가는 배후의 형식적 유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글-쓰기에 이런 특권적 의미가 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양 철학자들은 보통 음성언어를 자연적이고 살아 있는 언어로, 반면 문자언어를 인위적이고 죽어 있는 언어로 간주해 왔다. 음성언어는 의미의 생생한 자기현전을 실현할 수 있는 특권적인 매체라는 것이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저작에서 데리다는 플라톤에서 구조주의 시대에 이르는 수많은 문헌들을 분석하면서 이런 음성 위주의 언어관이 드러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곤 했다. 그러나 데리다의 의도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음성중심주의로 재구성하는 데 있다기보다 그런 재구성 과정에서 음성보다 더 오래된 문자의 흔적을 드러내는 데 있다. 목소리보다 더 오래된 문자.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어떤 원초적인 글-쓰기다.

해체론은 용서의 윤리학이자 타협의 윤리학 혹은 창조의 윤리학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용어는 어떤 숨 막히는 결단의 사건을 대체, 설명하는 위치에 있다.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해체론적 윤리학은 도덕적 판단의 기원과 조건을 묻는 결단의 윤리학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어떤 교차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아포리아를 초래하는 어떤 결정 불가능자가 출현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도덕적 책임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의 결정 불가능자를 유령이라 부른다. 유령은 이론적 인식의 저편에서 순수실천의 차원을 개방하는 이념, 다시 말해서 정의에 대한 이름이다.

■ 해체론적 유령학과 윤리적 개방성의 기원

해체론은 1990년대 초부터 문자학의 형태를 버리고 유령학의 형태를 취한다. 이 무렵 데리다는 법과 정의의 관계를 천착하는 『법의 힘』(최초 강연 1992)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실천의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에서 가장 상세히 개진되는 해체론적 유령학은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듯한 마르크스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탄생했다. 유령학은 문자학과 유사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 문자학은 형이상학이 적대시했던 문자를 역설적으로 (탈)형이상학의 기원에 해당하는 사태로 전도시켰다. 유령도 문자 못지않게 형이상학이 혐오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유령이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탈)형이상학의 기원에 출몰하는 어떤 해체 불가능한 사태, 다시 말해서 차연을 번역할 수 있는 용어임을 입증코자 한다.

■ 윤리와 종교의 관계?

종교의 문제를 천착하는 『신앙과 지식』(1996)에서 데리다는 무책임화의 역설과 유사한 모순을 신앙과 지식, 종교와 이성 사이에서 다시 발견한다. 그리고 종교의 비종교화를 초래하는 그 모순을 근본악이라 부른다. 그것은 종교와 이성, 신앙과 지식을 하나로 묶는 자기면역의 논리다. 데리다가 말하는 자기 면역의 논리는 자기를 스스로 훼손해 자신을 보존하는 논리, 스스로 더럽혀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는 논리, 스스로 탈내어 무탈한 삶의 길을 가는 논리다. 가령 정신적 생명도 자기 면역의 논리에 의해 태어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 시대에 종교는 이성에 의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성에 의해, 이성 안에서 다른 형태로 부활하게 됐다.

종교와 이성의 공통 원천. 그것은 서양의 실천적 역사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어떤 유사 선험적 조건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종교성(종교적인 것)이라 부른다. 역사 속에 등장했던 모든 종교보다 더 오래된 종교성. 모든 실정 종교에 선행할 뿐만 아니라 믿음과 지식의 공통 원천인 그런 종교성. 그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메시아주의없는 메시아성(메시아적인 것)’이다.

해체론적 의미의 메시아성은 계산 가능성을 초과하는, 그러나 정의로서 도래하는 타자에 대한 열림과 응답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성의 진면목은 성경이나 종교적인 의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 안에 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을 결정하는 전율과 도약의 순간은 종교보다 더 종교적일 수 있는 계기다. 그런 숭고한 계기를 통과할 때만 도덕적 판단이 유효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데리다는 칸트와 레비나스를 이어 다시 한 번 종교를 윤리적으로 환원, 추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