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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입가에 담긴 미소의 매력 … 철불 宗主國은 어디인가?
눈과 입가에 담긴 미소의 매력 … 철불 宗主國은 어디인가?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5.08.1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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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12)鐵製佛頭
▲ ① 철불두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佛像彫刻이라 할 수 있다. 불상은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돼 들어온 이래로 현재까지 끊임없이 제작돼 오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양식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 바탕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상은 직접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핵심이며 각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한 조각예술의 최상위 범주에 속한다. 불상조각의 재료도 다양해 石佛, 金銅佛, 鐵佛, 塑造佛, 乾漆佛, 磨崖佛, 金銀佛, 木彫佛 등으로 시대와 용도에 따라 알맞게 제작됐다.

그 중에서 鐵佛은 가장 강도가 높고 내구성도 강하지만 용융점이 높고 鑄物이 어렵기 때문에 세부적인 조각의 표현이 靑銅佛에 비해 섬세하지 못하다. 단지 蜜蠟鑄造의 청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산비가 저렴한데, 鐵로 불상을 제작할 경우 비싼 밀랍대신 진흙으로 거푸집을 만들어 제작하기 때문에 거푸집 제작비가 절감되고 청동보다 저렴한 금속인 철로 鑄造해 원부재료의 절감효과가 크고 제작시일도 짧게 걸린다. 섬세하지 않은 조각 부분을 용인한다면 단단하고 저렴하며 빨리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재료다.  

우리나라 철불은 남북국시대 신라후기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제작된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나라 鐵佛製作의 최초 제작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유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불은 충남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대형의 鐵造如來坐像으로 불국사 석굴암의 본존불과 닮았으며 8세기~9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比定할 수 있다. 이는 12세기 중국 송나라의 철불과 13세기 瘡時代의 일본의 철불보다 200년 이상 앞서 제작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이미 동양최고의 철불 제작기술과 철주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최근 우리나라 철불의 기원을 중국에서 찾았다는 발표가 있었으나 좀 더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 문헌에는 6세기 북제시대에 철불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기록만 있을 뿐이다. 실물이 없는 문헌자료와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唐代의 철불을 사례로 들어서 우리나라 철불의 근원을 중국으로 설정하는 것은 오류일 확률이 높다. 특히 신라말부터 제작된 철불은 禪宗의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것으로 唐나라의 철불기원설은  時代狀況을 간과한 이해다.

현재까지 알려진 철불은 경기도 광주 춘궁리 출토 철조여래좌상, 858년 제작된 장흥 보림사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한천사 철조여래좌상, 전 보령 성주사지 출토 鐵造佛頭, 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 일본의 고려미술관 철불, 柏原市立歷史資料館 鐵佛등 한국과 일본에 현존하는 철불은 대략 신라철불 17점과 고려철불 55점에 이른다. 철불이 집중적으로 造成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국시대 신라말로, 왕권의 약화로 중앙집권 세력이 약해지고 지방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現世求福을 기원하는 현실적인 조형의 철불이 만들어졌다. 지방 호족들의 세력과시용으로도  만들어졌는데, 철불의 얼굴(相互)에 지역적 특색이 강하게 반영되기도 했다. 또한 사회적인 혼란기에 지역민의 결속과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어느 정도 지역의 불교와 호족세력의 결합된 힘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고려의 통일이후에는 왕국의 정신적 이념을 불교에 뒀기 때문에 철불의 제작은 지속적으로 이어졌지만 고려의 멸망과 함께 철불의 제작도 사라지게 된다.

신라말~고려초에 제작된 철불은 이전 시대의 金銅佛에 비해 세부표현 기법이 섬세하지 못해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를 하지 못했다. 불상 크기의 거대화에 따라 옷주름이 단순해지고 세부표현력이 낮아져 결과적으로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지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조형미를 발전시켜서 어느 시대보다도 친근하고 인간미가 돋보이는 가장 토속적인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동안 근엄하기만 했던 정형화된 부처님의 얼굴이 이제는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며 누구나 해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친근한 이웃의 얼굴로 바뀐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鐵佛頭 역시 신라말~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그동안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유물이다(사진①·②). 높이 43cm, 가로 33cm, 둘레 97cm의 대형 佛頭로 머리는 螺髮이고 낮은 육계와 계주가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水晶으로 된 백호는 다시 붙인 흔적이 있으며 三道는 없고 여유 있는 턱에 볼 살이 통통하다. 귀는 약간 휘어지고 길게 늘어져서 어깨까지 내려오고 귓불은 뚫려있다. 오뚝한 코끝은 약간 뭉개졌으며 왼쪽 귓볼은 결실됐다. 전체적으로 둥근 얼굴에 지그시 감은 듯한 눈과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현실적인 조형미를 가장 잘 표현했고 한국불상만이 지닌 인간미를 포함한 아름다움이 있다(사진③).

얼굴 표면 여러 곳에 쇠 찌꺼기(slag)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古代의 제철방식으로 철을 생산해 주조한 것을 나타낸다(사진④). 佛頭의 속 면은 제작당시 쇳물과 엉겨진 주조 틀의 흙이 남아있다(사진⑤). 충남 보령 성주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철불두(사진⑥)와 육계의 높이만 약간 차이가 있을 뿐, 전체적인 조형미와 크기가 비슷하다. 10세기 신라말~고려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코끝이 약간 뭉개진 것은 이 불상이 인위적으로 훼손될 당시 머리가 떨어져 나오면서 코끝이 단단한 바닥에 충격을 입어서 생긴 자국으로 보이고 목 부분의 잘라진 단면이 불규칙하게 예리한 것 또한 파괴자의 훼손의지가 머리 부분에 집중된 것을 알 수 있다(사진⑦).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상이 많이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 불상훼손의 가장 큰 요인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과 조선시대 丙子胡亂, 壬辰倭亂 같은 이민족의 침입 때문이다. 침략군이 점령지의 神聖을 훼손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저항하지 못하도록 고통과 두려움을 주고 王朝의 근본을 없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철불의 최초 造成時期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사진⑧). (사진⑧)에서 鍍金을 입힌 高句麗鐵佛이라는 설명과 출토지가 平壤 淸岩里에 주목 해야 한다. 1950년대에 평양 청암리에서 고구려 절터가 발견됐고 高句麗火焰文金銅冠(木造菩薩像의 머리에 씌운 寶冠)이 출토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진의 불상이 출토됐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처럼 文獻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남겨진 유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문헌 속의 기록보다 우선 하는 것이 實存遺物이다.

▲ ⑧ 고구려 철불

그동안 철불의 宗主國은 우리라고 생각해오던 연구자들의 理論이 중국 철불의 기원론에 휘말리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몇 번의 답사와 눈에 보이는 몇몇 사례로 전체를 포장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중국 철불의 기원론을 주장하려면 중국 철불 뿐만 아니라 아직도 한참 미진한 우리나라의 鐵佛硏究도 완벽하게 병행한 이후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 수많은 문화재의 파괴와 약탈을 당한 민족으로 그러한 슬픈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얼마 남아있지 않은 문화유산을 신중히 연구하고 바르게 재조명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일본 오사카 朝鮮工藝硏究會에서 출판한 책속의 고구려철불(高句麗鐵造金錯立佛, 平壤 淸岩里出土)은 무엇을 의미할까. 광복 후인 1950년대 고구려 절터가 발견되고 많은 고구려유물이 출토된 곳이 平壤의 淸岩里절터인데 책속의 유물출토지가 청암리로 銘記돼 있는 것은 이 유물의 신뢰성이 높고, 鍍金을 한 고구려시대 철불의 존재를 확인하는 근거자료로도 충분하다. 현재로선 실물을 확인할 수 없지만, 일본의 어느 곳에선가 모셔져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꼭 확인할 것으로 기대한다.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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