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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스, 그리고 비결정성의 가치
아르스, 그리고 비결정성의 가치
  • 이재준 강사·미학
  • 승인 2015.08.07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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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이재준 강사·미학

기술의 혁신을 위해 새로운 통로를 찾으려는 이들은 서슴없이 기술을 예술에 연결시킨다. 그들에게 창의성은 그 통로의 저기 먼 끝처럼 이해된다. 거기서는 다빈치라는 이름이 마치 엠블럼처럼 사용된다. 이제 이러한 일은 이미 상식이 됐다.

다빈치가 천재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다빈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빈치 시대 100여년 사이에는 잠바티스타 델라 포르타(Giambattista della Porta)가 있었고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도 있었다. 특히 북구의 다빈치라 불렸던 키르허는 자동작곡기계(Arca Musarithmica)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사기계는 영화기술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그런 키르허의 여러 저술들 속에는 유독 ‘아르스(ars)’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예술’을 뜻하는 영어 ‘art’의 라틴어 어원이다. ‘아르스’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e)’ ‘포이에시스(poiesis)’와 함께 ‘기술 혹은 예술’을 뜻하며 근대 이전까지 의미 미분화된 상태로 사용됐다.

세속의 시대로 알려진 르네상스의 정치-경제학적 영향력은 분명히 예술과 기술을 미결정된 상태에 머무르도록 용인했을 것이다.

반면 산업자본이 기술의 잠재력과 동일시되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예술은 이성주의의 비호 아래 ‘자유로운 기술(artes liberales)’ 혹은 ‘순수예술(fine art)’라는 이름으로 기술을 자신과 분리시켰다. 미학의 탄생과 발전은 그 분절작용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미 분리된 예술과 기술을 다시 연결하려는 요즘의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스트리아에는 인구 30만도 채 안 되는 작은 마을 린츠가 있다. 그곳에서는 1970년대부터 매년 세계인이 주목하는 축제가 열린다.

‘아르스 엘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가 그것이다. 예술, 기술, 미디어 등을 뒤섞어 놓은 이 축제에 힘입어 린츠는 유네스코가 정한 창의적 도시 네트워크(UCCN)의 일원이 됐다.

이런 행사가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 것은 새로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린츠의 축제가 독특한 것은 ‘아르스(ars)’라는 말을 사용한 점이다. 기술도 아니고 예술도 아닌 그것이 우리시대 문화의 미결정성을 말해주고 있다. 현대 예술은 20세기 아방가르드 이후 지금까지 자기 해체의 과정을 지속하고 있다. 쉽게 독해되진 않지만 아방가르드에게 기술은 현대 예술을 예술로만 남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우리에겐 ‘아르스’라는 말이 애초에 없었다. 물론 우리에게 그 말이 없다고 한들 안타까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대신 ‘術’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있다고 한들 현실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이제 그런 말들을 사용해야할 만큼 우리의 현실이 미결정적인 상태로 유동하고 있다는 것은 감지된다.

필요성만을 역설하는 서툰 주장들 대신,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술의 운동과 예술의 운동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찾아내거나 만일 그것을 찾을 수 없다면 심지어 새로이 발명해내는 일이다. 19세기의 산물인 ‘발명’은 기술의 생산도 아니며 예술의 창작도 아닌 그것들 사이 어딘가에 있다. 이런 상황은 이미 문 앞에 와있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

1~2년 전부터 낯선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화가 장욱진의 그림과 로봇과학자 로드니 브룩스의 로봇을 연결하려는 연구가 그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한 명은 이미지에서 다른 한 명은 기계에서 ‘살아있음’을 생각했다. ‘생명’은 모든 미결정적인 것 속에서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반복적으로 각기 나름의 삶들로 분화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비결정적이다.

 

이재준 강사·미학
고려대와 홍익대에서 심리학·미학·예술이론 등을 전공했다. 미학·인지과학·컴퓨터공학·로봇과학 분야에서 ‘사이주제’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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