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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나르는 제자의 넋두리 들으러 왕복 5시간을 달려갔다
박스 나르는 제자의 넋두리 들으러 왕복 5시간을 달려갔다
  • 임은기 금오공대 교수·컴퓨터소프트웨어공학과
  • 승인 2015.07.20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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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교수의 방학 ④ 이공계 교수의 여름나기

학생들 성적을 입력하고 교과목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렇게 1학기를 마무리한 것이 지난달 29일이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여름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아내가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한 때가 2년 6개월 전이었다. 간병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지난해에는 안식년을 신청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아내의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으면서 간병도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때 1학기가 시작됐다. 일과가 끝나는 오후 6시면 간병을 시작해 자정 무렵에야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반복됐기 때문에 예년과 달리 무척 힘들었다. 그만큼 이번 방학을 기다렸던 것 같다.

여느 교수들처럼 나도 방학 동안엔 학기 중에 못했던 일을 처리한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강의자료를 보완하는 작업이다. 학기 중에는 강의가 끝나면 미진하다고 느낀 부분을 간단하게 메모해 뒀다. 이 메모를 취합해 강의자료의 어떤 부분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고민한다. ‘보수 작업’을 마치려고 노력 하지만 보통 1~2주 정도는 계획보다 늦어진다. 아마도 방학이라 덩달아 마음도 느슨해졌기 때문이리라.

강의자료 보완이 끝나면 논문을 잡는다. ‘연구 최소 의무제’에 따라 매년 한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해야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1년에 논문 한 편 쓰기도 힘들어져서 연간 계획을 세우고 논문을 작성한다. 겨울방학에 논문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1학기에 쉬엄쉬엄 관련 자료를 모으면서 기본적인 구상을 마친다. 여름방학엔 발표할 논문을 작성한다.

2학기가 시작되면 발표할 논문지를 찾아서 10~11월 경 투고한다. 운이 좋으면 12월에 실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이듬해 2~3월 정도에 실린다. 편집방향이 내 논문과 잘 맞는 학술지를 선택해서 투고하더라도 최악의 경우에는 거부되는 때도 있다. 그러면 미련없이 덮어버린다. 이 나이에 애타게 매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 해 정도 불이익 받으면 되고, 나의 업적평가가 좋지 않으면 그만큼 후배교수들에게 득이 되니까 그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도 방학 중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지도학생을 데리고 ‘산업체 현장실습’ 방문지도를 하는 것이다. 공학인증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학생들은 산업체 현장실습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지도교수는 꼼짝없이 방문지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현장실습이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의 산업체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것이므로, 당초의 취지에 맞는 현장실습이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다.

창고 정리, 커피 타기, 사무실 청소 및 정리 정돈 등 실습생이 해서는 안 되는 일로 하루를 때우는 학생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방문지도를 통해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 지도비나 많이 준다면 눈 찔끔 감고 다녀오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 정말 싫다. 그래도 지도학생의 졸업이 걸린 문제라 이 더운 날씨에도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올해처럼 실습기관이 한 도시 안에 있는 경우에는 정말 다행이다. 몇 해 전에는 수원까지 다녀온 적도 있다. 왕복 5시간을 운전해서 박스 나르는 제자를 만나 1시간 하소연 들어주고, 돌아오면 하루가 다 지나간다. 현장실습 방문지도 보고서를 멋있게(!) 작성해서 제출한다. 통장에 입금된 방문지도비는 5만원. 정말 허탈하다. 필자처럼 경차를 타고 다니는 교수들이야 기름 값이라도 되지만, 큰 차를 타고 다니는 교수들에게는 교통비도 안 되는 돈이다. 사랑하는 제자의 졸업을 위한다는 숭고한 마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은 방학의 불청객 ‘보충수업’이다. 필자가 담당하는 과목 중에 ‘C++ 프로그래밍’이란 것이 있다. 대학 초년생 1학년에 객체지향 언어인 C++를 사용해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과목이다. 재수강을 포함해 수강생은 약 80~90명 정도이고, 2개 반으로 분반해 운영된다. 학기 중에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쳤지만, 시험 성적은 평균이 20점 정도다.

모른 척 넘어가려니 자꾸만 뒤가 당겨서 방학 중에 4주간(주당 12시간) 보충수업을 실시하고 있다. 보충수업이 매우 중요하니 꼭 참석해야 한다는 말을 수차례 하지만, 참석인원은 20명을 조금 넘을 뿐이다. 안타깝고, 화도 나고, 걱정도 된다. 도대체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하나.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이 이론만 가지고는 도저히 익힐 수가 없기 때문에, 이른바 ‘도제식 교육’이 필수적이다. 프로그래밍 과제를 부여하고 각자 자신이 작성한 프로그램을 발표하게 한다. 1명 당 약 30분에서 1시간 정도의 시간을 투입해서 프로그램을 한 줄씩 읽어 가면서 설명하고 고쳐준다. 교육효과는 매우 높지만 투입해야 하는 시간이 문제이다. 이제 3주차 보충수업을 진행 중이다. 다음 주에는 끝난다.

방학이 시작될 때에는 항상 다음 학기 강의 준비를 미리 해야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지만, 계획대로 된 경우는 거의 없다. 아내와 함께 par3 골프장 몇 번 다녀오고, 좋아하는 등산 몇 번 하고 나면 어김없이 방학은 끝난다. 다시 바쁜 일정 속으로 빠져들어 허덕이다 보면 또 방학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교수라는 직업이 정말 좋았던 호시절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다음 방학부터는 차분히 정년 준비나 하고 싶다.

임은기 금오공대 교수·컴퓨터소프트웨어공학과
카이스트에서 전산학 전공 박사를 수료했다. SERI연구원을 지내다 1989년부터 금오공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컴퓨터교육론』 등 프로그래밍 관련 저역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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