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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 참변으로 쑥대밭된 곳 … 시인의 무덤은 왜 밤에 더 빛날까?
유혈 참변으로 쑥대밭된 곳 … 시인의 무덤은 왜 밤에 더 빛날까?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7.1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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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43.중앙아시아 초원에서 페르시아로(3): 수도 시라즈와 詩聖 하페즈, 그리고 호라산의 중심 도시 메르브의 멸망

 

시라즈 시내에 있는 하페즈 靈廟는 밤에 더 빛난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그곳은 시라즈 시내를 가로지르는 乾川 호슈크 강북동쪽에 공원처럼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거기서 나는 애인을 품에 안듯 하페즈의 대리석관에 몸을 밀착시킨 채 지긋 눈을 감고 마치 아름다운 꿈을 꾸듯 행복한 표정에 젖어있는 이란 남자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영묘 입구에 들어서면 정자처럼 지은 묘소가 보인다. 이는 이슬람 탁발승의 모자를 형상화한 모습이라고 한다. 하페즈는 죽은 뒤 곧바로 이곳에 묻혔는데 8개의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묘지 건물은 팔라비 왕조 때인 1935년에 처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랑의 기쁨과 술을 찬미했고, 한편으론 종교적 위선을 꼬집었다

▲ 폐허로 남은 메르브 성채사진= KBS 장영주 PD

“우정이라는 나무를 심어라. 그대에게 한없는 기쁨을 줄 것이다. 증오라는 나무를 뽑아버려라. 그대에게 한없는 슬픔을 불러올 것이다.” ―하페즈(1324~1389, 이란의 국민시인)

“오, 나의 신이시여/당신과 함께 하겠나이다./나의 삶 내던지고 당신과 함께 하겠나이다./오, 나의 신이시여/당신이 나를 받아주신다면/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 당신과 함께 하겠나이다.”
연인에 대한 뜨거운 구애가 아니라 자신을 있게 한 신에 대한 헌신과 진지한 신앙고백이 한 편의 시가 됐다. 바로 이란의 詩聖 하페즈를 통해서다. 이란(Iran)은 과거 페르시아로 불렸던 곳. Iran이라는 이름은 ‘아리안의 땅(Land of the Aryans)’이라는 의미의 원 이란어 Aryānā에서 파생된 현대 페르시아어다. 3세기 사산왕조 시대의 비문에 이미 Ērān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나라 이름이 Persia에서 Iran으로 바뀌게 된 건 1925년부터 1941년 영-소 연합군의 이란 침공으로 강제 퇴위될 때까지 팔라비(Pahlavi, 실제 발음은 패흘래비에 가까움) 왕조 이란의 초대 황제(Shah)였던 레자 샤헤 패흘래비(Reza Shah Pahlavi, 1878~1944년)에 의해서다. 이 사람의 아들 모함마드(Mohammad Reza Shah Pahlavi, 1919~1980년)가 우리들이 기억하는 이란의 마지막 황제다. 1979년 2월 테헤란 주재 미국문화원 습격과 함께 시작된 이슬람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는 막을 내린다.


참고로 이슬람 문화권에서 샤는 황제(emperor)의 지위를 나타내는 타이틀로 왕을 뜻하는 술탄(sultan)이나 파디샤(padishah)보다 상위의 존재를 지칭한다. 그리고 皇太子는 샤자다(Shahzada)나 미르자(Mirza), 왕자는 사히브자다(Sahibzada), 귀족은 나왑(Nawab), 벡(Beg; Baig) 등으로 불린다. 나왑이 남성귀족에게 부여된 타이틀이라면 여성귀족에 해당하는 타이틀은 베굼(begum)이나 나왑 베굽(nawab begum)이다.
1941년 영-소 두 열강이 연합해 이란에 쳐들어온 것은 그들이 내세운 명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만 카스피해에 바탕을 둔 이란의 유전을 확보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추축국(Axis: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소련에게 원활한 원유공급선을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이라크 전쟁 등도 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레자 샤 팔라비는 1935년 외교사절들에게 희랍인들이 Greece보다 그리스어 명칭 Hellas를 선호하는 것처럼 Persia 대신 역사적으로 오래되고 자국민이 자신들의 나라를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 Iran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우리나라는 大韓民國이다. 韓族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여전히 朝鮮과 朝鮮人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우리와는 다른 漢族의 나라 중국인들도 朝鮮族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며, 러시아인들은 우리 민족을 카레이스키(高麗人)라 부른다.


Aryan이라는 영어 단어는 ‘noble (one)’이라는 뜻을 지닌 고대 인도어인 梵語 ārya의 차용어다. 처음 이 용어 ārya는 베다의 신들(Vedic deities), 그 중에서도 인드라(Indra)를 섬기고 犧牲祭儀 야즈나(Yajna, ‘sacrifice’이라는 뜻)와 같은 베다 문화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민족 명칭으로 사용됐다. ārya는 넓게는 고대에 인도-이란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의 자칭으로 쓰였다. 혹자는 Aryan의 어원을 아카디아인들이 인도유럽인을 ‘벌거숭이(naked)’라는 뜻의 말 Ary라 불렀다는 데서 찾기도 한다. 힌두교에서 야즈나는 노동이나 재물을 바치는 의례 행위였다. 예를 들어, 아그니 야즈나(Agni Yajna, 불의 신 아그니에 대한 희생제)는 기(ghee 물소 젖으로 만든 버터기름), 곡식, 하바나 사마그리(havana sámagri)라는 약초 혼합제(herbal preparations) 따위를 성스런 불 속에 던져 바치는 공양의례다.


잘 알다시피 나치나 백인 지상주의자들은 아리안을 코카서스 인종이나 백인으로 봤다. 유대인은 예외였다. 見神論(theosophy: 接神論이나 神知學이라고도 함)이나 게르만 신비주의에서는 특히 북유럽 게르만 인종으로 대표되는 비유대계 코카서스 인종을 아리안의 전형으로 본다.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것은 자신과 독일인으로 대표되는 아리안의 우월성을 유지하려는 망상에서 기인한다. 아리안의 나라 이란은 우리와도 관계가 깊다.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가 양국 간의 관계를 반영한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있다. 장미의 원산지가 이란이다. 우리나라의 국화 무궁화의 원산지도 이란이다. 시라즈(Shiraz)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를까. 와인 애호가라면 신대륙 호주의 대표적인 레드와인 시라즈를 연상할지 모르겠다. 원래 시라즈는 프랑스 론 북부 지방에서 생산되는 씨라(Syrah or Shiraz) 품종이 호주로 전파된 것이다. 호주로 넘어온 씨라는 그곳 토양과 기후와 궁합이 맞는지 전 세계인들로 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오씨 시라즈(Aussie Shiraz, 호주의 시라즈)라고 불리며 여타 와인과 차별화되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시라즈(Shiraz) 하면 와인보다는 이란 남서부의 고대 도시가 먼저 떠오른다. 내가 이란에 처음 간 것은 월드컵 열기가 아직 채 식지 않은 2002년 12월 21일이었다. 그날 이란 항공이 인천-테헤란 항로 첫 운항을 개시했다. 페르시아 문명을 접한다는 기대감으로 사뭇 가슴이 뛰었다. 도착지는 물론 수도 테헤란이었다. ‘세상의 절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스파한을 위시한 고대 페르시아로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시라즈도 그 때 방문했다.
파르스(Fars) 주의 주도이자 이란에서 6번째로 주민수가 많은 곳인 시라즈는 시인들의 도시요 문학, 와인, 꽃들의 본향이다. 정원의 도시이기도 하다. 과거 잔드 왕조(the Zand dynasty) 시절에는 1750~1781년에 걸쳐 페르시아의 수도였다. 이란에 갔다면 꼭 들릴 곳이다. 이슬람이 주 종교인 여기에 유대인과 기독교인 공동체가 있다. 유대인의 離散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테헤란 남방으로 919km 떨어진 시라즈는 이란 시문학의 두 거목을 배출한 도시다. 13세기 음유시인 사디(Saadi)와 14세기 명상시인이자 서정시인 하페즈(Hafez, 1325/26~1389/90년)가 태어난 곳이다. 사디는 십자군전쟁 때 포로로 잡혀간 뒤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30년 넘게 세상 곳곳을 유랑하며 구구절절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반면 하페즈는 시라즈에서 나서 시라즈에서 죽었다. 이란 사람들은 이란을 대표하는 詩聖으로 망설이지 않고 하페즈를 꼽는다. Ḥāfiẓ는『코란』을 암송하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칭호다.
이름만으로 시인 하페즈, 즉 콰자 샴스 웃딘 무함마드 하페즈 이 시라지(Khwāja Shams-ud-Dīn Muhammad Hāfez-e Shīrāzī)와 20세기 이란의 정치인 하페즈 알 아사드(Ḥāfiẓ al-Asad, 1930~2000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시인 하페즈 이름 끝부분의 시라지는 출신지를 나타낸다. 후자의 이름 중 아사드는 아랍어로 ‘사자’란 뜻으로 가문을 드러내는 말이다. 여기서 퀴즈! 투르크어로 ‘사자’를 뜻하는 말은? 힌트. 안록산도 안국 출신의 사자(처럼 용맹한 사람)였다. 최근 현대자동차가 사자를 광고에 등장시켜 출시한 자동차.


시라즈 시내에 있는 하페즈 靈廟는 밤에 더 빛난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그곳은 시라즈 시내를 가로지르는 乾川 호슈크 강(the Roodkhaneye Khoshk) 북동쪽에 공원처럼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거기서 나는 애인을 품에 안듯 하페즈의 대리석관에 몸을 밀착시킨 채 지긋 눈을 감고 마치 아름다운 꿈을 꾸듯 행복한 표정에 젖어있는 이란 남자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영묘 입구에 들어서면 정자처럼 지은 묘소가 보인다. 이는 이슬람 탁발승의 모자를 형상화한 모습이라고 한다. 하페즈는 죽은 뒤 곧바로 이곳에 묻혔는데 8개의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묘지 건물은 팔라비 왕조 때인 1935년에 처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사랑의 기쁨과 술을 찬미했고, 한편으론 종교적 위선을 꼬집었다


. “불 밝힌 궁정처럼 연인의 사랑이 스민 집, 신이여, 시대의 재난으로 그 집을 폐허로 만들지 마소서.”
그는 이렇듯 연모의 감정을 노래했고,
“장미는 내 가슴에, 술은 내 손에, 연인은 내 곁에…… 군주도 노예일 뿐”이라며 술을 찬미했다. 하페즈는 술(포도주)을 ‘신의 이슬’, ‘빛’, ‘불타는 루비’, ‘이성의 집’으로 표현한 이란의 이태백이었다.
하페즈가 애용한 시의 형식은 가잘(ghazal)이었는데, 라임(rhyme, 韻)을 맞춘 對句(couplet)와 후렴 혹은 疊句(첩구, refrain)로 이뤄진 것이다. 이 형식은 사상의 논리적 흐름보다는 주제와 상징의 일치에 의해 연결되는 6~15행의 대구로 구성된 서정시의 형식으로서, 그는 이 형식을 전무후무하게 완벽히 구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잘은 상실이나 이별에 따른 고통, 고뇌를 수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가잘은 술을 통한 탈아의 체험 및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와 연관된 주제들, 곧 수피(Sufi)들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 하페즈의 업적은 번거로운 형식주의를 지양하면서도 이러한 전통적 주제들을 신선하고 섬세하게 다뤘다는 데 있다.
그는 궁정시인으로서 시라즈의 여러 통치자들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368~69년경 하페즈는 궁정에서 축출됐다가 20년 뒤 죽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옛 지위를 회복했다. 그의 삶을 이끈 지도적 원리 가운데 하나로 수피즘(Sufism)이 있는데, 수피즘은 신자들로 하여금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헌신할 것을 요구하는 이슬람 신비주의다.


▲ 하페즈의 시집을 손에 든 이란 여성.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nbmoh&logNo=70145647000
인문학기행의 노정이 완전히 페르시아로 넘어가기 전에 메르브(Merv)의 명운을 통해 인간의 비정함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랍의 점령기와 투르크인들, 정확히는 투르크멘 내지 오구즈 투르크의 한 지파인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를 경험하고 마침내 팍스 몽골리아의 시대를 맞이해 이곳에는 어떤 변고가 있었는가가 이번 글 말미의 주안점이다. 이는 다음 글에서 살펴볼 반달리즘(Vandalism)과도 관계가 있다. 기실 문명 파괴는 어제 오늘, 또는 한 지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고금동서에 만연한 인간의 어리석음, 악의는 오랜 문화 예술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든다. 21세기 벽두에 벌어진 탈레반의 바미안 석불 파괴, 최근 자행된 이슬람국가(IS)라는 테러집단의 시리아, 리비아 등지에서의 소중한 인류 문명 파괴는 반달리즘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증거다.


메르브(Merv, Turkmen: Merw, Persian:مرو  Marw or Mary, 漢語: 木鹿(Mulu))는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의 영토다.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남쪽길과 북쪽길이 천산산맥 서쪽에서 만나던 오아시스 도시였다. 한 때 메르브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마르기아나 속주(Achaemenid Satrapy of Margiana)였다. 고대 메르브의 도시 유적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역으로 등재돼 있다.

 
『新唐書』 「西域傳」은 末祿 즉 메르브의 토산물과 습속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동쪽에 末祿이 있는데 소국이다. 성곽을 세우고 木姓을 가진 사람이 많다. 五月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고, 畵缸(채색 항아리)을 서로 주고받으며, 때로는 支瓜가 나오기도 하는데 큰 것은 열 사람이 먹어야 다 먹는다. 야채로는 과총·갈람·군달·발해 등이 있다.”


메르브는 이란 동북부 호라산(呼羅珊, Khurasan) 지방에 위치해 있다. 한자로는 末祿 혹은 木鹿으로 표기됐다. 전략상의 가치는 물론 문화와 정치의 상호 교류라는 측면에서 이곳은 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新唐書』 「西域傳」은 메르브를 소국이라고 했지만, 12세기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는 주장도 있다.
1221년 메르브는 칭기즈칸의 넷째 아들 톨루이(Tolui)를 맞이하기 위해 육중한 성문을 연다. 그리고 주민 대부분이 도살당한다.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바이니(Ata-Malik Juvayni, 1226~1283년)는 메르브가 파괴되고 나서 한 세대가 지난 뒤 쓴 몽골 제국을 다룬 『세계 정복자의 역사(Tarīkh-i Jahān-gushā(History of the World Conqueror))』라는 저술을 통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몽골인들은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400명의 장인들을 제외하고, 남녀노소를 불문 모든 주민을 죽이라. 몽골 병사 개개인에게는 자신이 죽일 300~400명의 페르시아인이 할당됐다. 해질녘이면 어찌나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는지 산이 작은 둔덕으로 보일 정도고 평지는 피범벅이 돼 있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메르브가 함락되고 타지에서 몽골군을 피해 도망 온 수십만의 난민을 포함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학살됐다고 한다. 이런 끔찍한 잔혹사는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유혈 참변이다. 몽골군이 쑥대밭을 만들고 간 메르브 지역은 곧 이어 일한국(Il Khanate)의 일부가 됐으나 차가타이한국(Chagatai Khanate)에 의해 끊임없이 유린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다 1380년 티무르 제국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게 된다. 그로부터 125년이 지난 1505년에는 이번에는 초원의 전사 우즈벡인들이 메르브를 접수한다. 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주인이 바뀌는 메르브의 운명은 이렇듯 변화무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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