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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潤文에 15년 … “역사적 사유 담은 문장 전달 노력”
수정·潤文에 15년 … “역사적 사유 담은 문장 전달 노력”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7.14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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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 (민음사, 413쪽, 25,000원)번역한 이경덕·서강목 교수

 
책 제목이면서 하나의 비평 용어로 정착한 ‘정치적 무의식’. 이를 제안한 이는 듀크대 교수로 있는 프레드릭 제임슨이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다. 그의 ‘정치적 무의식’은 그가 1981년 출판한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에서 유래한다.
물론 이 책은 1980년대 한국 학계에 ‘해적판’으로도 흘러들어왔다. 80년대 학번들이라면, 적어도 문학예술을 마르크스주의의 창을 통해 ‘역사화’하는 데 관심 있었던 이들이었다면, 누구나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또 누군가가 책의 번역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도 더러 들려왔던 바로 그 책이다. 그러나 번역 시도는 있었지만, 완역 소식은 쉽사리 전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원문 텍스트로 학계를 전전하던 『정치적 무의식』이 마침내 우리말로 번역됐다.


번역의 주역은 이경덕 연세대 교수와 서강목 한신대 교수. 이경덕은 이글턴의 『문학비평: 반영 이론과 생산 이론』을 일찍이 번역했고 제임슨론으로 박사논문을 썼으며, 서강목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비평 이론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말은, 두 사람이 『정치적 무의식』을 번역해내는 데 일정한 내공을 확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 비판과 문학·문화이론 연구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뤘더라도, 발표시점이 1981년인 책을 2015년 한국 사회에 내놓는 데는, 타당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이경덕·서강목 교수는 이 책의 번역을 민음사와 1996년 이른 봄에 계약을 맺었다. 물론 초고는 2002년 무렵 완성했지만, 제임슨 특유의 변증법적 사유를 담은 문장을 우리말로 유려하게 번역해내기 위해 두 역자는 오랜 윤문과 교정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해서 거의 20년이 걸려서야 이 번역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정치적 무의식』을 번역한 두 사람을 이메일로 만났다.


△ 두 분은 언제 이 책을 번역할 결심을 했나.

“‘언제’라는 의문사에 간단히 답하면 아주 짧은 답이 되겠다.(웃음) 그러나 종종 우리말의 ‘언제’는 ‘왜’나 ‘어떻게’를 포괄하는 의문사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 경우가 그런 경우이겠다. 1995년 이전부터 역자 두 사람은 영문학을 연구하는 한 모임에서 문학이론을 같이 공부했다. 학부, 대학원 시절부터 배워왔던 제임슨의 책들은 그 모임에서도 독서의 주요 대상이 됐고, 『정치적 무의식』은 서로 발제를 해 가며 정독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책이었다. 당시 같이 공부하던 선후배들의 공통된 관심이 영미문학을 한국사회의 현실과 연관해 구체적으로 사고하고 연구하는 방법론의 궁구였던 만큼 제임슨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해석학 새로 세우기’는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 도중 1996년 이른 봄 출판사와 정식으로 번역 계약을 맺었다.”

△ 두 분도 아시다시피 여러 연구자가 이 책 번역에 나섰지만, 마무리 짓지 못했다. 제임슨의 난해한 문장, 등장하는 사상가들의 스펙트럼 문제 등 다양한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 두 분도 이 책 완역에 ‘십수 년’이 걸렸다고 했다. 번역을 지체하게 한 어려움은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도 답하는 길이 두 갈래 이상 있을 듯하다. 이 책을 번역하고자 시도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부닥치게 되는 어려움에 대해 답하는 길과 우리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애로사항을 말하는 길이 바로 그 두 가지다. 변증법적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론가이면서도 스스로 글쓰기를 통해 종합적 사유의 실천을 제시하고자 하는 저자가 제임슨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장이 난해하거나 난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고금의 서사 해석학과 문학 이론 전반을 염두에 두며, 또 서양 고전 문학의 주요한 성취와 중대한 변화를 역사적으로 고려하며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문학 해석학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러니 정확히 이해해야 할 사상가들과 작가, 작품들이 수없이 등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이런 어려움들, 즉 질문이 이미 예상했던 ‘문장의 난해함’이나 ‘등장하는 사상가들의 스펙트럼’은 사전의 공부와 후속적인 확인 작업에 의해 상대적으로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들이다.

정작 우리 두 사람이 겪었던 애로사항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제임슨의 변증법적이고 역사적인 사유를 표현한 문장을 최대한 정확하게, 그리고 잘 읽히도록 만드는 데 한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대강 2002년까지는 초고를 완성하게 됐는데, 그 후의 기나긴 윤문과 교정 기간이 이런 사연을 알려주기도 한다. 역자들이 점점 바빠지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적어진 것도 출간이 늦어진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러나 바쁨은 대부분 게으름의 다른 표현일 가능성이 높으니(웃음), 항상 동학 선후배님들과 관심 있는 연구자들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을 느끼며 지내왔던 것도 사실이다.”

△ 최근 고쿠분 고이치로 일본 다카사키대학 교수가 들뢰즈 철학으로 들어가는 책을 냈다. 『들뢰즈 제대로 읽기』인데, 흥미로운 것은, 그에 의하면, 철학의 의미는 개념의 강조에 있지 않고, 그러한 개념을 창조해내는 근원적 질문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데 있다. 이를 『정치적 무의식』에 대입한다면, 이 책은 어떤 근원적 질문을 환기하고 있는 책인가? 라고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치적 무의식』은 과연 어떤 근원적 질문을 환기하고 있는가?

“앞서 언급한 공부 모임에서 역자들이 같이 읽은 책들인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에서도 들뢰즈는 비슷한 문제 의식을 제기한다. 근원적 질문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일, 그것이 바로 지식과 지혜를 사랑하는 자(애지자, 철학자)들의 소명이겠다. 그것은 바로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거듭거듭 되묻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러나 대상과 현상에 대해 사유하고 답을 찾는 방식은 제임슨과 들뢰즈가 결코 유사하지 않다!) 『정치적 무의식』이 환기하고 있는 근원적 질문이 있다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겠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학이 포함돼 있는 서사의 역사적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수도 있겠다. ‘모든 것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는 과정인’ 서사는 역사적 하부 구조인 생산양식이 지닌 모순의 상상적이자 상징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런 서사의 한 형태인 문학도 마찬가지다. 그 해결책은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처럼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과 역사에 대한 필사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반응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고, 계급적·집단적 차원의 반응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것은 알튀세르와 라캉의 이론에서처럼 이데올로기적이고 상상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개인과 사회의 존속을 보장하며, 역사의 진전을 기약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고 해방적이다. 그러므로 개인과 집단, 시와 역사, 예술과 현실을 종합적으로 사유하는 마르크스주의 문예학에서의 문학(해석) 하기는 바로 이 ‘정치적 무의식’을 제대로 사유하는 행위가 된다.”

△ 사실 제임슨의 다른 주저인 『맑스주의와 형식: 20세기 변증법적 문학이론』(1984, 1997. 2014 개정판)은 비교적 일찍 번역, 소개됐다. 『정치적 무의식』은 초판이 나온 지 34년이 지났다. 그 사이 저자 제임슨의 사유에도 변화가 있었을텐데, 1981년의 『정치적 무의식』의 ‘현재적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

“번역된 ‘주저들’ 가운데 지금은 절판된 『언어의 감옥』(1985)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영미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자인 제임슨과 이글턴의 번역서가 4권이 나왔는데, 이 번역서들은 80년대 후반 여러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과 이론들을 섭렵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통로의 역할을 해줬다. 사실 그런 측면에서만 본다면 제임슨은 이글턴과 더불어 ‘정리의 귀재’이기도 한데, 새로운 현상과 이론을 정확한 식견과 통찰력을 가지고 구도짓고 정리해 보여주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무의식』은 그러한 정리와 구도짓기보다는 제임슨 자신의 색깔이 강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즉 자신의 방법론과 연구의 범위와 대상을 처음부터 적시하면서 마치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문학의 긴 역사를 정치적 무의식의 전개로서 그려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헤겔적인 사후적 투영은 바로 전 과거 즉 모더니즘 시대에서 끝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책에서 암시로 그치고 있다. 이후 본격적인 논의로 들어가서는 현재 진행적 현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제임슨은 사실 더 이상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게다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무의식마저도 대중매체에 의해 식민화되고 있다라는 말도 하고 있으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는 그렇다면 정치적 무의식이 작용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거기에 대하여 지젝 같으면 아마도 ‘무의식이 무의식으로서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도 일종의 정치적 무의식의 작용이다’라고 주장할 법도 하지만 제임슨은 그런 식의 주장을 내놓기보다는 정치적 무의식의 내용을 다른 ‘말’들을 통해 전개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모순을 살아내기 위한 정치적 무의식은 그러므로 ‘알레고리’, ‘유토피아’, ‘인식적 지도그리기’ 같은 새로운 개념어들을 통해 약호전환되는 가운데, 그 핵심적인 변증법적 방법론은 계속 견지된다. 다시 말하면 ‘항상 역사화하라’라는 슬로건을 자신의 이론에도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헤겔의 미학을 읽거나 법철학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정신현상학』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임슨을 읽다보면 끊임없이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곳이 바로 『정치적 무의식』이다. ‘고전’의 의미 중의 하나가 바로 이처럼 반복해서 돌아가는 터전이라는 것이 아니던가.”

△ 앞의 질문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제임슨은 서문에서 “진정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 행위는 오늘날 지식 시장의 ‘다원주의’ 속에서 이런 방법론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나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체계의 우선성이 그 의미론적 풍요에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책의 3분의 1도 ‘해석’에 관해 할애했을 정도다. 번역자들이 번역에 몰두했던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체계’의 우위성은 어떤 의미에서 해석방법론들과의 경쟁 속에서 흔들리지 않았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체계의 우선성’이 ‘의미론적 풍요’에 있다고 제임슨이 주장했을 때,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두 분은 제임슨이 말한 이 해석체계의 ‘의미론적 풍요’가 지금 어떤 변화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두 질문은 한꺼번에 답해도 될 것 같다. 앞서 이글턴과 제임슨이 ‘정리의 귀재’라고 했는데, 사실 방대하고 서로 모순적이기까지 한 체계들을 정리해낼 수 있는 능력은 개인적 능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이 서있는 마르크스주의적 지평 때문이기도 하다. 즉 마르크스주의적 해석 지평에 설 때, 다른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전모와 한계들이 잘 보인다는 뜻이다. 칸트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물자체가 있었으나 헤겔이 이것을 인식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은 물자체까지도 역사화할 수 있었던 강력한 역사주의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강력한 역사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고정된 것들, 구획화된 것들을 역사 속에 풀어놓음으로써 그 부문별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역사적 한계를 노정하게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만 해도, 그 역사적이고 국지적인 타당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현상 안으로 들어가 그 내적 언어를 사용하여 내파하는 작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영화와 바그너를 다루더니, 제임슨도 영화와 SF에서 더 나아가 최근에는 바그너와 루벤스에 대해서 썼다. 마치 마르크스주의 해석작업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시험하는 것 같다. 아마도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한계가 아니라면 그 끝은 없을 것이며, 마침내 괴테처럼 영혼불멸을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웃음)”

△ 번역은 노력과 품은 많이 들지만 그게 좀처럼 빛나지 않는 영역이다. 업적평가에서도 홀대받다가 최근에 와서야 ‘저술’을 좀 챙기는 분위기다. 부제를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라고 했다. 영어 원문으로 본다면 원문에 근접한 번역이지만, 우리말 구조로 읽는다면 매우 불편하다. ‘사회적 상징행위로서의 서사’가 아닌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서사’라고 번역한 데는 어떤 사정이 있나?

“번역 작업에 대한 학계나 사회의 통념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할 말이 너무 많겠다. 특정 사회의 학문과 문화가 발전하려면 중요한 저작의 정확한 번역이 갖는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기왕의 국내 번역 현황이 매몰돼 있는 상업주의의 문제점, 전문 번역가의 상대적인 부족 현상, 개인 번역가들의 상대적 무책임성 등은 반성과 개선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최근 좋은 번역물들이 속속 출판되며, 학계에서도 번역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배려하는 현상 등은 밝은 쪽으로의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듯하다. 물론 무엇보다 눈 밝은 독자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하겠다.

정작 본 질문에 해당하는 책 부제의 번역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전문적으로 답해야 한다. 모든 번역가가 지향하는 바이겠지만 우리는 원저자의 사유를 최대한 정확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잘 전달하려 했다. 원문 ‘socially symbolic act’라는 표현에는 ‘사회’라는 말과 ‘상징’이라는 말이 갖는 통상적인, 혹은 상투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제임슨의 ‘사회’는 알튀세르적인 ‘생산양식’과 등치되며 ‘상징적인’은 라캉의 상징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므로 이 책 전체의 내용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명사 내지 형용사가 아닌 부사로, 통상적인 용법과 어긋나도록 생경하게 사용함으로써 뭔가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이 번역에 대해서 독자들이 생경하게 느낀다면 원문과 번역의 의도가 아주 잘 전달된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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