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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자와 옹호자를 넘어선 학제간 사유를 담다
비판자와 옹호자를 넘어선 학제간 사유를 담다
  • 이기숙 전문번역가·언어학
  • 승인 2015.07.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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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공간적 전회』 외르크 되링·트리스탄 틸만 엮음|이기숙 옮김|심산|630쪽|30,000원

달라진 공간 환경에서 지리적 데이터의 가공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고 공간을 재현한 전자 지도를 이용해 귀속 지점을 확인하려는 욕구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더욱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일상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새로운 공간 인식은 학계에서 공간적 전회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갈수록 빨라지는 정보통신과 미디어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삶에서 공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바꿔놓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나라도 이제는 더 이상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속의 지도 하나만 있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언제 어디서나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고, 자동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 시스템만 작동시키면 어디를 가든지 초행길도 두렵지 않다. 미디어와 통신 기술의 확대가 공간을 ‘압축’하고 공간의 ‘소멸’까지 초래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와 상대방이 처해 있는 공간 속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한다. 공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술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달라진 공간 환경에서 지리적 데이터의 가공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고 공간을 재현한 전자 지도를 이용해 귀속 지점을 확인하려는 욕구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더욱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일상에서 관찰되는 이러한 새로운 공간 인식은 학계에서 공간적 전회(Spatial Turn)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공간적 전회’는 이른바 공간 문제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물론이고 예술 분야에서까지 새로운 학제적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았음을 천명하는 용어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의 지형도가 반영된 것이 바로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의인문학’ 연구단에서 번역총서로 발간한 『공간적 전회』다. 부산대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에서는 공간과 장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련한 동서양 고전들을 ‘로컬리티 번역총서’라는 이름으로 발간해오고 있다.


2006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독일 지겐대에서 ‘매체의 지오코드. 공간적 전회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를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책은 여기에서 발표된 논문들 가운데 열여섯 편을 정리해 엮은 것이다. 공간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지만, 정작 학자들 사이에서는 공간의 존재론적 위상을 놓고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공간’이 다의어로 사용되면서 모두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공간을 말하는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간 담론이 융성하면서 ‘공간적 전회’라는 말로 지칭되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각 분과학문에서 다루는 대상에 공간의 외피를 입혀놓고 그것을 획기적인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왜 모두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수많은 학자들이 말하는 공간은 모두 같은 공간일까 다른 공간일까? 다르다면 어떻게 다를까? 그리고 학문마다 공간을 끌어들여 이야기하면 그것이 바로 전회가 되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의문점에서 출발한다.


공간 개념의 불투명함을 벗기고 공간적 전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또한 공간적 전회라는 말을 범학문적으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여러 학문에 공통된 인식의 기반이 마련돼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은 분과학문을 넘어서는 토론장을 마련해 각 분야마다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책을 편찬한 편집자 외르크 되링과 트리스탄 틸만은 「우리는 공간에서 무엇을 읽는가」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공간 개념의 탄생 맥락을 짚어보고 이 개념이 각 학문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상세하게 설명해 전체적인 개관을 제공한다. 이어지는 1부에서는 문화학, 영화학, 역사학, 사회학, 문학이론, 매체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공간적 전회에 대해 각 학문 고유의 관점을 피력해 놓았다. 외르크 뒤네는 근대 초기의 지도를 통한 공간 재현 문제를 추적하면서 문화적 지형학의 매체사적 가능성을 탐구한다. 역사학자 에릭 필츠는 공간의 관성이란 은유를 출발점으로 삼아 역사학에서의 ‘공간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특히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사회학자이며 루만의 제자인 루돌프 슈티히베는 체계이론에서 지리적 유물론의 조심스런 회복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사회 환경애서 나타나는 공간적 차이에 사회체계에 대한 인과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루만에게는 불가침이었던 환경과 사회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편 문예학자 닐스 베르버는 사회의 자기기술 용어로 사용되는 매체의 지오코드를 논의하는 가운데 이 용어의 의미론적 역사를 추적한다.


2부에서는 그간 공간 담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인문지리학자들이 처음으로 공간적 전회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전통적으로 공간을 다루는 ‘공간 전문가들’인 지리학자들이 공간적 전회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에드워드 소자를 대표로 하는 열정적인 입장이고, 둘째는 나이절 스리프트와 마이크 크랭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적이면서 중립을 취하는 입장이며, 셋째는 공간적 전회에 대해 크게 반발하며 비판을 가하는 입장이다. 게르하르트 하르트, 마르크 레데페닝, 베노 베를렌이 여기에 속한다.


공간적 전회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에드워드 소자는 이 개념이 광범위하게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범학문적인 거대 패러다임이 됐다고 진단한다. 그는 사회과학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공간 인식을 포스트모던의 역사관과 사회상에서 일어난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간 자본과 공간적 정의를 개념화하여 공간의 지속적인 정치화가 이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인플레이션처럼 봇물을 이루는 각종 공간 개념들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공간적 전회가 새삼스럽다고 여기며 비판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게르하르트 하르트다. 그는 지리학 바깥에서 벌어지는 각종 ‘공간 끌어들이기’에 직면해 “지적인 현기증을 느꼈다”라고 고백한다. 이런 외부 학문들이 공간적 전회를 내세우며 보여주는 공간적 전회의 실천들은 사실상 전통지리학의 이론에 무지한 상태에서 그것을 부활시키는 행위이며, 지리학 바깥에서 지리학을 새로 ‘발명’하는 행위라며 신랄한 비판을 쏟아낸다. 지리학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을 외부의 공간 전도사들이 모르는 이유는 인문지리학이 오랫동안 문화학과 사회과학이 주목하는 핵심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공간적 전회의 비판자와 옹호자를 포함해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공간 개념에 대한 정립부터 공간적 전회의 득과 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를 발표하고 상호 교환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각 분야의 대표적 저자의 글은 각 학문의 입장에서 공간 패러다임에 대한 동의 혹은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 중요한 메타 토론이 그저 공간을 둘러싼 학문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돼 실질적인 현실 공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이기숙 전문번역가·언어학
독일 뒤셀도르프대에서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한 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소비사회 탈출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인간과 공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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