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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의 외부를 상상해야 하는 이유
‘문학권력’의 외부를 상상해야 하는 이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6.30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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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의 표절을 보는 어떤 시선


문학비평이 표절에 대한 검증을 하고, 문학권력에 대한 적극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비평은 문학의 역할에 대한 온당한 담론도 적극적으로 제기해 힘 있는 물리력으로 변화하게 할 수 있는 역량을 못 갖추고 있어 위기와 무능 상태에 처해있다.

▲ 오창은 중앙대 교수

작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오랜 침묵 끝에 작가는 표절을 인정하면서 독자들에게 사과했지만, 느닷없이 ‘문학동네’가 표절을 제기한 평론가들에게 공개 토론의 장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문제의 진폭이 더욱 확장되기 시작했다. ‘신경숙 표절’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던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와 오길영 충남대 교수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문학동네’의 토론회 제안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거듭 분명히 하면서 “어떤 사전 동의도 구하지 않고, 문학동네에 대해 문제를 지적한 비평가들과 토론회를 일방적으로 개최하겠다고 한 발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개 초대’라 하더라도 사전에 상대방의 동의를 먼저 구하고 대외적으로 공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전 협의 없이 토론회 참석을 요청하는 문학동네의 몰상식에 대해 항의합니다.”라고 문학동네측에 사과를 요구했다. 지난 23일 문화연대와 한국작가회의가 긴급토론회를 개최한 이후의 일이다.
문화연대·한국작가회의는 23일 오후 4시 서교실험센터에서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를 주제로 문학평론가인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오창은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가 발제하고, 심보선(시인,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정원옥(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정은경(문학평론가,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조영선(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등이 지정토론자로 참여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명원 교수는 「신경숙 표절 의혹을 둘러싸고―사실, 진실, 맥락의 문제」를, 오창은 교수는 「신경숙 표절 국면에서 문학권력의 문제」를 발표했다. 오 교수의 발표문 일부를 발췌했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 문학의 작동 메커니즘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위해 무엇을 다시 점검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이 이렇듯 폐쇄적이고 자기 아집적인 문학권력의 작동을 제어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한국문학의 場에서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가.
자기 합리화는 자기 바깥은 상상하지 못했을 때 그 굴절 현상이 더욱 극심하다. 문학권력의 작동이 내부의 시선을 중시하고, 시민적 합리성을 도외시하는 사태까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식이 갖고 있는 지성적 열림마저도, 작가적 전문 직업주의에 갇혀 ‘문학의 역할’을 왜곡시키고 있다.
지금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제기되는 시민사회의 문제제기는 한국 문학의 질서가 특정 출판사를 중심으로 고착화돼 있고, 출판 상업주의가 만들어내는 신화에 대해 보편적 상식에 입각해 이뤄지는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특별한 자본권력을 형성하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문학은 중요한 상징이다. 상징적 의미가 문학권력의 자기 질서화나, 시민사회와 소통하지 않는 문학상품 생산으로 고착화될 때 대중의 분노는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시점에서 다음 몇 가지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문학상업주에 대한 준엄한 자기성찰과 극복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문학출판에서 문학적 권위를 점유하고 있는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는 실제로 출판상업주의의 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각 출판사들이 자신만의 문학적 색채를 가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면, 지금은 출판자본의 이익이 우선하는 양상이다. 신경숙 작가는 이 세 출판사를 번갈아가며 소설을 간행했다. 처음 신경숙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소설을 출간했다. 초기작인 『풍금이 있던 자리』 가 그렇고 이후 『딸기밭』,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이후 신경숙은 『외딴방』, 『리진』, 『깊은 슬픔』, 『바이올렛』, 『종소리』 등 대부분의 작품을 문학동네에서 출판했다. 이번에 표절문제가 된 『감자먹는 사람들』과 『엄마를 부탁해』는 창비에서 간행했다. 한 작가가 문학적 경향이나 지향과 상관없이 출판사를 번갈아가며 출간하는 관행은 한국 출판상업주의의 현재를 가늠하게 하는 슬픈 풍경이다.


출판상업주의가 문제인 이유는 현재의 대중성만을 중시하는 시장중심의 질서 때문이다. 앨런 S. 케이헌은 출판상업주의와 관련해 “사람들에게 ‘훌륭한’ 욕망을 배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욕망을 만족시킴으로써 이익을 남”기는 것이라는 언급을 한 바 있다. 즉, “이미 표현된 욕구를 만족시킬 뿐, 필요한 욕구가 어떤 것인지, 또는 어떤 욕구가 더 값어치 있는 것인지를 결정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판상업주의에 경도된 문학은 오로지 현재의 욕망만 요동치는 문학이다. 신경숙 문학이 『외딴방』 이후 『엄마를 부탁해』에 이르러 더 문학적 성취를 이뤘다는 주장에는 결단코 반대한다.
『엄마를 부탁해』는 ‘더 가치있는 문학’으로 진전된 성취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훨씬 유려한 형태로 ‘현재의 욕구’를 충족시켜줬을 뿐이다. 이러한 관행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문학권력의 폭력이다. 이러한 문학권력의 작동 아래에서 도전적이고, 전복적인 젊은 문학정신의 탄생은 점점 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둘째, 문학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자기 성찰이 작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심각하게 제기될 필요가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에 스스로를 놓는 것과 같다.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인해 한국문학의 문단 질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는 신경숙이라는 ‘한국문학의 대표적 권위’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의 표출일 것이다. 한국의 대형출판사들이 연합해 ‘한국 대표작가’를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신경숙 신화’의 실체다. 그 근본에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있으며, 문학작품을 국가의 대표상품으로 간주하려는 굴절된 관념이 자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는 항상 동시대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해야 할 의제다. 서효인 시인은 최고의 작가를 만들어 한국문학의 대표적 상징을 만드는 것보다는 ‘1만명의 독자를 가진 50명’의 작가 있는 사회가 훨씬 건강하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문학은 대표적 상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학적 상징이 향유되는 감성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온당하다고 본다.


셋째, 신경숙 표절 사건의 이면에는 비평의 무기력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비평의 위기와 무능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위기가 바로 비평의 위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학비평이 특정 출판사와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상황에서 한국문학의 자율적 검증작업은 공백지대로 방치돼 있다시피 하고 있다. 문학비평이 표절에 대한 검증을 하고, 문학권력에 대한 적극적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비평은 문학의 역할에 대한 온당한 담론도 적극적으로 제기해 힘 있는 물리력으로 변화하게 할 수 있는 역량을 못 갖추고 있어 위기와 무능 상태에 처해있다. 이는 나를 포함한 비평가들의 책임이 크다. 한국문학에서 상징권력은 담론과 자본, 그리고 공고화된 문학적 권위가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담론을 담당하는 비평가들의 진지한 성찰이 더 크게 요구된다.


넷째, 한국문학에는 표절과 같은 문학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한 사건에 대한 징계 시스템이 부재하다. 표절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문학 내부의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방치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적 합의에 입각한 표절 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 징계를 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어떻게 가능할 지에 대해 문인단체를 종심으로 한 논의도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경숙 표절 사건은 한국문학의 존재조건을 바꿔 놓은 문학사적 사건이 될 수 있어야 한다. 한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학에 작동하는 문학권력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의 촉발점이 돼야 한다. 문학권력의 지배질서는 항상 외부의 문제제기를 포섭하거나 자기화함으로써 자기권력을 지속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문제는 기존 문학권력의 갱신이 아니다. 기존문학권력을 낙후시킬 수 있는 외부의 전복이 가능하냐다. 신경숙 작가 표절에 대한 이응준 작가의 문제제기도 특정 작가 개인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 문학권력의 작동 방식과 한국문학의 갱신을 위해 온 몸을 부딪쳐 종을 울린 것이다. 경직된 질서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창조성은 좀처럼 활력을 획득하기 힘들다. 등단시스템, 문학매체 발간 시스템, 문학상 수여 시스템, 문학출판 관행 등과 같은 일련의 문학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문학권력의 외부가 형성돼야 한다. 그 가능성을 문학권력의 외부에 있는 아웃사이더들, 젊은 작가들, 문학의 존재 근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건강한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해 가능할 수 있기를 열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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