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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철학의 씨앗
한국현대철학의 씨앗
  •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승인 2015.06.2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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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이연도 서평위원
전공이 중국근현대철학이다 보니 대학에서 ‘동양현대철학’을 강의한 지 십여 년이 돼 간다. 매년 강의계획서를 작성하면서 명색이 ‘동양현대철학’인데, 온통 중국철학자들로 짜여진 수업이 내심 쑥스러웠다. 학기말이면 내년엔 한국과 일본의 현대철학에 대해서도 다뤄야지 다짐을 하다가도, 막상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보면 작년과 비슷한 내용으로 강의를 하게 된다.

한국의 현대철학 혹은 현대철학자를 강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시대 구분부터 어디를 기점으로 잡아야 할지가 문제이다. 실학부터 다뤄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동학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강의하는 선생님들마다 그 생각이 제각각이다. 마땅히 수업교재로 삼거나 참고할 만한 책도 없다. 『한국현대실천철학』(김석수, 돌베개, 2008)이나 『한국현대철학사론』(이규성, 이화여대출판부, 2012) 등의 책들이 있긴 하지만, 이 방면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학생들에게 권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많다. 결국 자료도 부족하고 시간도 없으니 한국현대철학에 대한 소개는 차일피일 미뤄왔었는데, 이제 그런 변명을 하기 어렵게 됐다.

지난 달 출간된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녘)은 비슷한 고민을 해왔던 연구자들이 공동 작업을 통해 내놓은 것으로, 한국현대철학의 논의를 싹틔우는 씨앗과 같은 책이다. 우리에게 철학 혹은 철학자가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는 저자들의 말은 한국현대철학이 처한 현실을 잘 말해준다. 퇴계나 율곡, 원효나 지눌은 쉽게 떠오르지만 한국의 현대철학자가 누구인가를 말해보라 하면 막상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이 책에서 꼽은 한국의 현대철학자들, 최제우, 나철, 박은식, 신채호, 박치우, 박종홍, 함석헌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이들을 선정한 기준이 무엇인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책을 기획한 이들은 ‘우리 철학자’의 기준을 근현대의 격변 속에서 스스로 달리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독자적인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자 애쓴 인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동학의 교주 최제우부터 씨알철학을 제창한 함석헌에 이르기까지, 또한 경성제국대학 출신으로 광복 이후 한국 강단철학의 뿌리가 된 박치우, 박종홍을 포함한 목차는 이 책의 출간까지 적지 않은 고뇌가 있었을 것이란 짐작을 하게 만든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각자 전공에 따라 다른 영역의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전공별 학제구조에서 이는 당연한 일인데, 묘한 것은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선생님들 중 상당수가 중국철학이나 한국철학에 대한 무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현상학이나 분석철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동양철학자들에 대해선 백안시하는 태도다.

학생들의 질문이 다양하고, 철학이 보편학을 지향하는 만큼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서양철학의 주된 흐름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중국이나 한국철학에 대해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은 교수의 본분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이 땅에서 철학하면서 우리의 지적전통에 대해 무지한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책의 저자들이 제기한 대로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의 像이 주로 근대 서양에서 형성된 것이고, 그마저도 일제 강점기에 그 기틀이 마련됐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은 대학의 전공학과에서 전수되는 학문 체계이고, 엄밀하고 실증적이며 논리적인 학문이어야 한다는 생각, 이러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이런 태도를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최제우, 나철, 신채호 등 ‘우리 철학자’들에게 엄밀한 철학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들은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이며 논리적 이론 틀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다만 이들은 스스로 기존의 전통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렇다고 새로운 전통의 지배하에 들어가지도 않았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시도는 충분한 학술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보는 전통적 사유의 깊이에 이질적 사유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학적 방법론은 한국철학에서 분명 ‘새로운’것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새로움’이 일단 학적 영역으로 나온 이상 학문의 틀 안에서 체계화돼야 하겠지만, 그 이론체계의 부족은 보완의 대상이지 폄하의 이유가 돼선 곤란할 것이다.

한국현대철학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만큼 한국철학 특히 현대철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그 약점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 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한국철학엔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이 부족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어렵다는 지적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이 뼈아프게 성찰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철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어떻게 사유의 즐거움을 전달할 것인가. 이 책의 출간이 우리 철학의 체질을 개선하고 현대철학의 새로운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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