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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움과 넉넉함 , 그리고 숭고함
‘溫雅美’가 감동의 전율을 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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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雅美’가 감동의 전율을 낳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6.17 16: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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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옥 전 부여국립박물관장, ‘백제미’를 말하다

 

▲ 백제금동대향로, 부여 능산리 사지 출토. 7세기 전반. 높이 61.8cm. 국립부여박물관

34년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진주·청주·부여·대구·춘천의 국립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 및 아시아부장을 지냈던 이내옥 박사가 최근 『百濟美의 발견: 백제의 미술과 사상, 그 여덟 가지 사유』(열화당 刊)를 펴냈다. 그는 한국미술사 연구와 박물관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아시아파운데이션 아시아미술 펠로십을 수상한 바 있다. 대표 저서랄 수 있는 『공재 윤두서』 등으로 그 예리한 눈썰미를 빛냈던 그가 오랜 시간을 돌아서 결국 ‘백제미’로 돌아온 셈이다.
‘결국’이라고 쓴 것은 그의 생물학적 고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그가 처음 국립부여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전시실의 유물을 둘러보며 가슴속에 깊은 감동의 전율을 느꼈던, 바로 그 ‘감동의 전율’의 기원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내옥은 이 감동의 전율 때문에 긴 시간을 이 책 전체에 담긴 문제의식의 규명에 쏟아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백제에서 어떻게 이런 수준높은 물건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백제문화의 진정한 본질과 역량은 무엇일까, 이런 의문에서 이 책은 비롯됐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그가 ‘사상과 미술’을 인간 정신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서 탄생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 둘은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풍부하게 한다. 그 순간 새로운 사회의 방향이 열린다. 인류 역사가 그렇다. 이런 전제에서 그는 ‘고대 동아시아 예술사의 빛나는 금자탑’인 백제의 미술품을 향해 정면승부를 선택한다. 그의 말대로 “칠지도, 무령왕릉, 백제금동대향로, 미륵사 석탑, 산경문전 등은 각기 그 장르에서 최고 수준의 걸작들로, 백제의 미술과 그 사상을 다루는 데 결코 피할 수 없는 높은 봉우리들이다.”
사실 그가 언급한 백제의 미술품들에 관해서는 이미 선행 연구가 상당 부분 축적돼 있다. ‘칠지도’의 경우 백 년이 넘는 연구 역사 있다. 무령왕릉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유물에 나타난 불교적·도교적 배경에 집중해왔다. 그러나 「미륵사와 서동설화」, 「미륵사 사리봉안기」, 백제의 서예 부분은 기존 연구가 미진한 영역이었다. 책 제목 ‘백제미의 발견’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기존 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거나, 미진했던 영역에서 일보를 내딛은 사정을 반영한다.

평생 박물관을 오가면서 유물 연구에 매진했던 그의 눈에 백제미는 어떤 형태로 비쳐질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백제 유물에는 너그러움과 넉넉함에서 비롯된 평화로움이 있는데, 이는 명랑성과 율동성으로 확장, 표현되기도 했다. 인상 비평에 머물러 있는 백제미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면서, 백제 미술품의 아름다움을 溫雅美 로 규정해 봤다. 여기에는 중도와 중용의 의미와 함께, 부드러움, 도타움, 관대함, 넉넉함 등의 뜻도 포함돼 있다. 나아가 백제 불교의 초월적 신성의 숭고함이 우아함과 결합하면서 한국미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음도 부연 설명했다.” 이 순간, 이내옥의 이 발언은 기존 한국미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또 하나, 그가 백제미를 동아시아의 거시적 관점에서 파악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이내옥은 백제미술이 중국 六朝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봤다. 즉, 사상적으로 유연했고, 생동하는 사회였던 육조시대에 와서야 중국의 미술사는 그 틀을 갖추게 됐는데, 백제는 이러한 육조 문화를 수용해, 수·당이 자기 고육 문화를 아직 갖추지 못했을 때에 육조문화를 극점까지 끌어올렸다는 평이다. “백제간음을 비롯한 일본 최고의 미술품도 이러한 백제문화의 영향권 아래에서 제작됐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모두가 동아시아 고대문화가 이룩한 찬란한 금자탑이었다.”『백제미의 발견』에 수록된 글은 2005년부터 <진단학보>, <역사학보> 등에 발표한 논문들이 모태가 됐지만, 여덟 편의 글 가운데 「무령왕릉 조영의 사상적 배경」과 「미륵사 사리봉안기를 통해 본 백제 불교」, 「백제 서예의 변천과 성격」은 책을 기획하면서 첨가된 新稿들이다.
다음은 이내옥이 읽어낸 ‘백제의 미술과 사상, 그 여덟 가지 사유’의 주요 장면이다.

▲ 인물산경문전, 부여 외리 출토, 7세기 전반. 높이 29cm. 국립중앙박물관

칠지도: 서체로 본 칠지도의 제작 시기는 한성기로 편년할 수 있으며, 역사 기록에 비춰 근초고왕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칠지도 명문의 중심어는 聖音이다. 聖이란 한자의 어원은 원래 태양과 연관이 있어서 천하를 밝헤 비추는 기능뿐만 아니라 빛의 생명력이 만물을 화육하는 것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 칠지도 명문의 구조는 선세, 현세, 후세의 삼세의식을 바탕으로, 현세 백제의 강한 문화적 자존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칠지도를 가지가 일곱 개 달린 독특하 형태로 만든 데에는 북두칠성의 강한 상징이 내재돼 있다. 그런 점에서 칠지도는 陽의 精을 상징하는 북두칠성의 추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령왕릉: 무령왕 상장의례로 유고의 삼년상을 채택했다는 점은 왕릉 조영의 사상적 배경이 유교였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성왕대 당시 백제 유교는 天人感應論에 근거한 漢代의 유교였다. 성왕의 국가 재조 수준의 혁신을 보면 무령왕릉 조영도 보인다. 성왕이 즉위 후에 추진한 첫 번째 과업이 무령왕릉 조영이었기 때문이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도상에 불교적 성격은 오히려 미미하다. 그에 비해 음양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의 배치, 유교적인 五音이나 五行을 염두에 둔 五樂士의 존재는 다분히 유교적 표현이다. 또 오악사를 인간계 최상의 위치에 배치한 것도 유교에서 음악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해 그 중요성을 극도로 강조한 것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런 점들은 백제금동대향로의 유교적 성격을 나타낸다.
「서동설화」로 본 미륵사: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善花公主는 彌勒仙花와 연관을 가지며, 미륵인 불교신앙과 선화인 토착신앙을 아울러 갖춘 巫佛 융합신앙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백제가 미륵신앙의 상징적 국가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이런 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선화공주가 진평왕 부부의 딸로 설정된 것도, 그들이 석가의 부모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을 정도의 열렬한 불교신앙을 서동설화에 반영한 것이다. 서동설화의 본질은 불교적 상징이기 때문에 당시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수관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현실적 차원은 더 높은 차우너의 불교적 상징으로 대체, 승화돼 표현되고 있다.

미륵사 사리봉안기: 미륵사 사리봉안기는 백제의 다른 사리봉안기에 비해 여러 면에서 풍부함과 세련됨을 보인다. 이런 사실은 백제사회에서 불교가 점차 발전해 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전 봉안기가 모두 죽은 자의 추모 목적으로 조성됐다는 점에서 과거 지향적인 데 비해, 미륵사 봉안기는 국가적 종교 이념을 과시한다는 점에서 미래 지향적인 성격을 띤다. 미륵사 봉안기 전체의 일관된 주제와 관념은 感應이다. 미륵사 봉안기의 첫 단락 세 문장의 밑바탕을 관통하는 사상은 方便이다. 감응과 방편을 핵심 사상이자 근본 이념으로 삼고 있는 경전은 『法華經』이다. 따라서 미륵사 봉안기의 밑바탕에는 법화신앙이 깔려 있다.

백제 문양전: 외리 출토 문양전 가운데 산경문전은 한국 고대 산수화의 발생 문제와 관련해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산수화의 탄생 문제는 결국 산수가 화면 전체에서 주제로 등장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런 점에서 외리 출토 산경문전은 후대 산수화가 갖춰야 할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 산수를 완전히 독립된 주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한국 회화사에서 본격적인 산수화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백제 산경문전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탄생한 고대 산수화가 백제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웠음을 증거하고 있다. 백젱서 산경문전을 통해 산수화가 탄생한 것은 그와 함께 진정한 예술도 함께 탄생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백제의 많은 명품들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심오한 정신을 기반으로 한 예술로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 서예: 미륵사 사리봉안기는 당시의 당해와 달랐다. 위덕왕대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백제 서예문화가 미륵사 사리봉안기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왕의 시대는 백제문화의 황금기였으며, 그 문화를 총결산한 것이 미륵사였고, 그 기록과 서예가 미륵사 사리봉안기였다. 사택지적비는 단정한 해서체이고, 문체는 변려체다. 미륵사 사리봉안기의 변려문은 사택지적비에 이르러 보다 정교하고 노골적인 표현으로 발전하면서 형식의 극단을 추구하고, 그 발달의 정점을 이뤘다.

▲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 7세기. 높이 90.9cm. 국립중앙박물관

백제인의 미의식: 백제미의 특성에 합당하면서 보다 중심이 되는 한자로 溫과 雅를 선택할 수 있다. 온은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중도와 중용의 의미도 담겨 있으며, 부드럽거나 도탑다는 뜻과 과대하고 넉넉하다는 뜻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모순과 대립, 갈등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아에는 고상하고 아름답다는 뜻이 있고, 옳고 바르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아에는 대척점에 있는 가치를 부정하고 높거나 이상적인 가치 개념을 지향하는 심미적 속성을 지닌다. 그래서 사회나 국가나 종교에서 체제를 공고히 하거나 높은 정신적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회적 가치관이 개입돼 있다. 백제미는 이러한 온과 아의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그것을 결합한 溫雅美로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백제 불교의 성격도 미적 범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불교라는 종교가 표방하는 초월적 神聖의 숭고함이 우아함과 결합하면서 백제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창조했다. 그 대표적인 예인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범접하기 어려운 초월적 존재이자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친근한 인간적 존재로서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은 숭고함을 보유하면서도 인간적인 우아함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그 상승 작용에 의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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