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35 (목)
“학문의 서구 종속성 극복하려면 글로벌 지식장 안에서 대결해야 한다”
“학문의 서구 종속성 극복하려면 글로벌 지식장 안에서 대결해야 한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6.01 14:5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자 인터뷰_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문학동네 刊 )출간한 김경만 서강대 교수

한국 사회과학계가 ‘위기’를 말한 지는 꽤 되지만, 이 위기의 구체적 원인을 짚어낸 지적 작업은 사회학학술대회같은 자리를 벗어나면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근래 잇따라 사회과학의 구조적 위기를 진단한 작업들이 등장했다. 김종영 경희대 교수의 『지배받는 지배자』에 이어, 최근 김경만 서강대 교수(사회학과)가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부제로 한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문학동네 刊)을 내놨다.
그런데 김경만 교수의 이 책은 ‘폭탄’이다. 한국 사회과학의 지평을 확장해온 선배 학자들-강신표, 김경동, 한완상, 조한혜정, 강정인 교수 등을 실명으로 비판하면서, 이들이 그토록 외쳤던 ‘학문의 서구 종속성 극복론’이 사실은 내용 없는 수사에 그칠 뿐만 아니라, “우리 것을 만들어내자는 ‘공허’한 주장만 되풀이한다면, 이는 결국 우리 학문의 서구 종속성을 영원히 재생산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거침없이 직격탄을 날렸기 때문이다.

 


△ 2002년에 교수신문에서 ‘우리 이론을 찾아서’라는 기획을 만든 사람이어서, 이번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이론을 찾아서’는 이후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생각의나무, 2003)로 출간됐다. 이 책 맨 앞에 ‘탈식민주의 글쓰기’를 탐색한 조한혜정 교수가 놓여 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번 신간에서 조한혜정 교수를 비롯한 사회과학 선배들의 이론 작업이 번지수가 틀렸다고 지적했다. ‘토착적 한국 사회과학’을 통해 한국 사회과학의 서구 종속성을 극복하자는 이들의 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물론 이 비판은 2001년 <한국사회학>지에 ‘세계수준의 한국사회학’을 제안한 이래, 선생님의 계속된 공부 내공에서 제기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비판은 ‘한국 사회과학의 서구 종속성 극복’ 방안을 내포한 것으로 읽히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한국 사회과학의 서구 종속성이라고 했지만, 실은 한국 학문의 서구 종속성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선생님의 학계 선배 비판은 중요하다. 실명 비판한 학자들의 접근의 문제점, 그리고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종속성 극복 방안을 간단하게 듣고 싶다.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먼저 실명비판 부분에 답하겠다. 그들은 모두 어떤 지적 전통에도 속하지 않은 지적 미아다. 지적 미아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뒤르켐이 말한 지적 아노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서구, 탈식민을 외치지만 그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외국학자들과 대조시켜 보면 금방 지적 미아의 의미가 나타날 것이다. 사회학에서 랜들 콜린즈는 뒤르켐으로부터 유래한 지적 전통에서 발전시킨 고프만, 가핑클 등을 넘어서고자 ‘상호작용의례 사슬’이란 이론을 창출해냈다. 이 이론은 미시적 상호작용과 거시적 구조의 ‘매개’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잘 알다시피 사회과학에서 미시와 거시의 문제 혹은 행위자와 구조의 문제는 부르디외, 기든스, 하버마스 등의 거장들이 천착해 온 문제다. 이들 모두 자신의 특정한 지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지식 ‘장(field)’에서 생성된 문제, 즉, 어떻게 행위자들의 미시적 행위가 거시적 구조를 형성, 변형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에 천착하고 그 전통 안에서 논쟁해오고 있다. 조한혜정, 강정인 등은 우리 것을 만들자는 구실로 이런 전통을 외면해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회학이건, 정치학이건, 인류학이건 각 분야의 지적 전통 안에서 중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누가 이 문제를 더 잘 풀어냈는가에 주목하고 있는 글로벌 지식장의 참여자들은 어느 누구도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부르디외(발생적 구조이론)가 유명해지고 기든스(구조화 이론)가 글로벌 지식 장에서 지배적 이론이 된 것은 이들 둘 다 글로벌 지식 장의 중심 문제에 대한 독창적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글로벌 지식 장에서 중요한 문제로 간주돼 온 문제에 눈감아 버리면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학문의 서구 종속성 극복 방안이 두 번째 질문인 것 같다. 나는 지금처럼 시사적인 문제, 사회, 정치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현실에 적합한 사회과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대신 글로벌 지식 장의 지적 전통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치열하게 논쟁하고 장의 지배자들을 비판해야 한다고 이 책에서 주장했다. 이렇게 하려면 물론 대가를 치러야한다. 즉, 칩거와 고독이 필요하다. 슬픈 것은 한국의 인문·사회과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대중강연에 몰입하고 대중적인 책을 출판하는데 심혈(?)을 쏟고 있다. 내 생각엔 모두가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누구라고 말하기 그렇지만, 심지어 성형수술까지 하고 텔레비전 출연하는 교수들도 있다. 지식인들도 아도르노가 말한 자본주의의 ‘치명적 공생관계’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고 하면 너무 많이 나간건가? 한국 사회과학, 인문학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사람들은 한국에선 대가행세를 하지만 글로벌 지식 장에서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캘리포니아대 시스템 전체에 40여명도 안 되는 대학 최고 권위를 가진 교수(University Professor) 중 한 사람인 이론 사회학자 조나단 터너(Jonathan Turner)와 얘기하던 중 한국 인문 사회과학자들은 텔레비전과 대중매체에 거의 매일 얼굴을 내민다고 했더니 제발 나도 텔레비전에 얼굴한 번 나왔으면 정말 좋겠다고 하면서 웃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미디어와 정치권력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칩거하고 연구하고 글로벌 지식 장의 지배자들을 비판하고 그런 비판을 통해서 그들과의 대화를 유도하는 길이 유일한 서구 종속성 극복방안이라고 생각한다.”

△ 1부 4장은 부르디외의 ‘장 이론(field theory)’을 빌려와 한국 사회과학의 낙후에 관한 이론적 설명을 전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최근 사회학자인 김종영 경희대 교수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으로서의 미국 유학파 엘리트 그룹의 한계를 지적한 책을 냈다.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다. 대략 15년에 걸친 ‘절충적 질적 종단 연구’ 결과물인데, 유학파 엘리트 교수들이 ‘독창적 논문’을 생산하기 어려운 태생적 조건을 지적했다. 선생님이 부르디외의 ‘장 이론’으로써 한국 사회과학의 낙후성을 분석하고 비판했다면, 김 교수는 질적 종단 연구로 한국 사회과학의 불임성을 분석해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한국 사회과학, 나아가 한국 학문의 상당 부분이 종속, 낙후돼 있다는 것은 ‘부르디외’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설명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그 책을 안 읽어서 내용은 모른다. 그렇지만 ‘지배받는 지배자’란 제목을 들었을 때 이 책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글로벌 지식 장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만 미국의 지배를 받는 국가가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들이 지배받고 있다. 예를 들어 프린스턴이나 예일, 하버드 같은 대학원에는 세계 각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학생들이 선발돼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심지어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등 세계적인 대학의 졸업생들이 대학원 공부는 위에 말한 미국 명문대학에서 하고 싶어 한다. 왜? 미국이 장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왜 유학 가는가는 부르디외까지 등장하지 않아도 설명된다. 역사적으로 학문의 중심 국가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위대한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도 한 때는 지배받는 지배자였다. 왜냐면 그도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 그리고 독일의 분트에서 출발했고 매년 유럽으로 학술여행을 갔다.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과학의 불임성은 유학 그 자체 때문도 아니고 태생적 조건 때문도 아니다. 유학 갔다 와서 거기서 배운 대로 하지 않고, 한국의 학술문화―실명비판 부재, 서로의 학문적 작업에 대한 관심부재,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기 등―에 즉각 휩쓸려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유학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한국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이 유학 가서 ‘잘 하고 와도’ 여기 돌아오면 학문적 생산성을 잃는 것이다. 나는 유학시절 그곳에서도 높은 인정을 받고도 한국에 돌아와서는 학문적 생산성이 크게 떨어진 사람들을 무수히 봤다. 전부 이 사람들의 책임인가? 아니다. 온갖 유혹, 자율적 학문 공동체의 부재, 학자적 커리어의 부재와 언론과 지식인, 출판업계의 강고한 연줄망 아래에서 진지한 연구는 그 대가를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태생적 조건이 나쁘다는데 나는 이게 뭘 얘기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국 교수들이 강의를 많이 해서 부담이 많은가? 혹은 영어가 문제라서? 나는 이것도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들의 사회과학 교수들은 대부분 한 학기에 강의 2개, 많아야 3개다. 미국에 있는 작은 대학의 교수들은 더 많이 강의해야 한다. 영어를 못해서인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창의적인 생각만 있으면 영어는 문제가 안 된다. 영어 잘하는 사람들과 협력해서 세계적인 학술지에 내고, 또 책 내면 된다. 문제는 우리의 학술문화다. 이것은 태생적인 요소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낸 문화다.”

△ 특별히 부르디외 이론이 한국적 사회과학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더 유용한 것이어서 빌려온 것인지? 아니면 ‘(사회과학) 이론’의 어떤 단면을 환기하기 위한 부르디외 이론 호명인지 궁금하다. 129쪽에서 지적한 것처럼, 부르디외의 ‘장 이론’이 한국 사회과학에 포괄적으로 유용한 이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부르디외의 이론은, 서구의 이론은 한국의 현실을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이른바 적실성 혹은 적합성주장을 깨기 위해서 동원한 이론이다. 내가 「세계수준의 사회학을 향하여」란 논문에서 주장했듯이 머튼과 영미 과학사회학자들의 이론적 자원도 한국 사회과학의 낙후를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마치 내가 이 책에서 부르디외가 다 옳다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출간된 부르디외에 대한 나의 책과 논문은 거의 예외 없이 모두 부르디외에 대한 비판이다. 토마스 쿤이 말했듯이 아무리 훌륭한 이론도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경험적 현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끊임없는 비판과 수정을 통해서 이론은 진화하는 것이다. 바캉과의 논쟁도 결국 나의 부르디외 비판에 대한 바캉의 옹호, 그리고 나의 재비판일 뿐이다. 이론이 포괄적으로 유용하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한국의 지적 낙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르디외의 이론이 유용하지만 것이다. 또 다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선 부르디외의 이론이 힘을 잃을 수도 있다.”

△ 선생님의 전공은 ‘과학사회학’ 및 ‘과학철학’이다. 1991년부터 서강대 사회학과에서 ‘이론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론사회학’을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이론’의 창출과 체계화에 고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의 후퇴에 위축에 대한 반성도 최근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이론 사회학’의 공부가 제대로 돼 있지 않다는 지적도 한다. 막스 베버를 비롯, 짐멜, 루만, 하버마스 등 대가들을 자주 말하지만, 그들의 원전을 깊이 탐색하는 논의들은 대학원에서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론사회학, 혹은 고전사회학 이론에 대한 깊은 천착이 없는 한국 사회학계가 이론적 불모성을 겪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이대론 계속 이론의 불모지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수학을 예로 들면 얘기가 쉬워질 것이다. 선형대수학을 공부하지 않고 추상대수, 위상수학을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얘기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수들, 학생들은―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푸코, 데리다, 하버마스, 기든스 등을 그냥 읽으면 읽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읽어질 수가 없다. 하버마스를 예를 들면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은 기본이고 비트겐슈타인, 미드, 고프만, 가핑클, 슈츠, 윈치 등 철학과 사회과학의 기초적인 지식을 알고 있어야 그의 저작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과학, 인문학은 내가 계속 강조하듯이 급변하는 사회, 정치, 경제문제에 천착한다는 미명아래 이런 이론들을 고도로 추상적인 지적 유희라고 일축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론이 왜 필요한가? 이론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유학을 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우리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슬픈 것은 사회과학분야의 한국 유학생들의 대부분이 한국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대한 논문을 쓰는데 굳이 왜 유럽과 미국에까지 가서 써야할까? 우리 사회, 정치, 경제를 연구하려해도 이를 설명한 이론적 자원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론의 중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계 지식 장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론가들이다. 하버마스, 부르디외, 기든스, 고프만, 벡, 랜들 콜린스 등이 그 예다. 이론이 없으면 사회세계는 구획정리가 안 된 혼돈일 뿐이다.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틀이 이론이다. 한국의 사회과학, 인문학 대학원 교육의 문제는 학생들에게 많은 양의 논문과 책을 읽으라고 하지만, 어떤 특정한 이론, 학자에 깊이 있게 천착해서 분석적으로 그의 주장을 따지고, 해석하고, 논쟁하는 그런 세미나 보다 여러 이론들을 ‘대강 훑고’ 나가는 세미나가 대부분이라는 데 있다. 나의 대학원 강의에서는 논문 하나를 읽더라도 한줄한줄 따지고, 의미를 해석하고 논쟁하고 대안을 얘기해보는, 내가 좋아하는 표현을 빌리면 ‘곡괭이질’을 한다.”

△ 그렇다면 앞서도 물었지만, 사회과학에서 이론이란 어떤 것인가? 선생님이 생각하는 이론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론은 무엇인가? 앞에서도 말했고, 또 뒤에서도 언급할 것 같아 간략하게 말하겠다. 내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개념들의 유기적 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세계 지식 장을 지배하는 학자들, 예를 들면 하버마스, 부르디외, 기든스 등이 해 온 작업을 이론이라 하면 더 쉬울 것이다. 즉, 이론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기보다 최고의 이론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해 온 작업을 보면 이론이 무엇인가가 명확해질 것이다. 이들의 작업을 흉내 내고 모방해서 궁극적으론 넘어가려는 시도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론적 작업이다. 이론이 무엇인가에 대한 복잡한 과학철학자들의 논의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글로벌 지적 전통에 참여해서 그들이 이론적 작업이라 부르는 것을 모방하고 배우고 궁극적으론 비판해야 한다.”

△ 118쪽에 제시된 것처럼, 만일 이론이 “실재나 현실을 잡아내거나 담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기적으로 연결된 개념들의 망”이라고 한다면, 이것을 과연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론은 실천과 늘 연결되는 것 아닌가? 실재와 현실을 적시하는 것, 이것이 이론의 역할인가?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실재와 이론이 유리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론은 실재를 설명하는 개념의 망이란 말도 틀린 주장이 되고 만다. 이론이 현실을 설명하도록 고안된 장치이지만 이론이 과연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잡아내고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매우 복잡한 인식론적 문제를 야기한다. 이론과 실천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서구 과학철학에서 이론이 무엇인가에 대한 천착부터 시작해야 한다. 논리 실증주의의 이론관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를 비판하고 등장한 후기경험주의 과학철학―쿤, 셀라즈, 콰인, 로티―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론과 실재, 혹은 실천의 관계를 추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이론은 언어이므로 언어와 실재와의 관계를 또한 추적해야한다. 책에서 길게 얘기했듯이 하버마스의 지난 50년간 작업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론을 통해서 어떻게 실천을 비판할 수 있는가에 집중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책 『지식과 이해관심』의 주제는 바로 이론과 실천의 관계이고, 이에 대한 무수한 비판을 다루고 새로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종결점이 『의사소통행위이론』이다. 곧 출간될 나의 책,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아카넷 刊)은 이론이 얼마나 실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20세기 최고의 이론가들인 하버마스와 로티가 벌인 논쟁을 다룬다. 로티는 타계했지만, 하버마스와 로티 논쟁에 등장하는 수많은 세계적 석학들이 이에 대해서 논쟁을 진행 중이다. 바로 여기가 내가 천착하는 곳이다. 이론적 연구는 이런 해석의 연속일 뿐이다.”

△ 서구 의존성을 넘어서는, 즉 서구적 종속성을 넘어서는 하나의 방법으로 ‘글로벌 지식장에서의 상징이익 획득’을 제안했다. 1980년대말 과학사회학 장에서의 선생님의 지적 활동을 ‘자기민속지(autoethnograpy)’라는 방법으로 조명해, 그 구체적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읽힌다. 개인적으로는 ‘자기민속지’로 읽어낸 선생님의 지적 성장기가 매우 흥미로웠다. 미국에서든, 유럽에서든, 아니면 동북아시아에서든 이런 다양한 지적 성장사를 가감 없이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자기민속지’로 학자의 이력을 그려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기민속지는 많은 경우 개인적 얘기, 바꿔 말하면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쓰는데 이 상처는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사회적 요인을 언급하고 비판하면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자기민속지는 극히 개인적인 서사처럼 보이지만 내러티브의 ‘미세조직’ 속에 거시적 사회구조가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민속지는 단순한 개인의 내러티브가 아니다. 이 책의 2부에서 제시된 자기민속지는 단순히 나의 지적 편력 혹은 성장에 관한 개인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내가 나를 둘러싼 지적 환경―다시 말하면 지식 장의 구조―에 반응함으로써 그 지적 환경에 적응하는 동시에 또 그것의 구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궤적’을 그린 것이다. 나의 지적 성장에 대한 자기민속지는 이제 막 학자의 길에 접어드는 한국의 젊은 학생들에게 글로벌 지식장의 구조와 변동에 대한 실천 감각―물론 대리 경험을 통해서지만―을 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부르디외의 수제자인 로익 바캉과 서신논쟁을 한 것으로 안다. 어떤 내용의 논쟁이었나.

“한마디로 이 논쟁은 나와 바캉이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되는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촉발됐다. 미국저널에 출간한 한 논문에서 나는, 이론가가 일상인들이 보지 못하는 ‘진리’를 볼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일상인들의 실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부르디외와 바캉의 주장을 비판했는데, 바캉이 이에 대한 반론을 펴면서 논쟁이 촉발됐다. 나는 부르디외의 이론이 학문 장내에서는 미려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 이론을 다시 실천의 세계로 끌어내려 실천과 접촉시키고, 그를 통해서 실천을 변화시키려는 비판적 시도를 했을 때 그것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바캉은 이론가들이 일상인들이 보지 못하는 진리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론가가 일상인들의 지식보다 ‘인식론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론이 실천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고 반론을 폈다. 이것이 우리 논쟁의 핵심이다.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 출간된 『담론과 해방: 비판이론의 해부』란 책에서 나는 부르디외 뿐 아니라 하버마스, 기든스도 이 문제에 천착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바캉을 비판했다.”

△ 책의 곳곳에 부르디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엿보인다. 앞서의 이론적 영향 때문인가? 아니면 부르디외가 특별히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인가?

“부르디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학자 둘 중의 하나다. 부르디외에 대한 애정은 부르디외가 다른 사회과학자들과 다르게 자신의 이론에 대한 깊은 성찰적 관점, 즉 자신의 이론도 ‘구성된 이론’일 뿐이며 따라서 장내에서의 객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에 기인한다. 부르디외의 콜레쥬 드 프랑스 취임강연의 제목은 「강연에 대한 강연(A Lecture on the Lecture)」이다. 즉 자신의 강연이 가지고 있는 사회학적 함의를 ‘인과적으로 추적’한 것이다. 콜레쥬 드 프랑스와 같은 최고권위의 대학교수로 취임한다는 것은 자신이 ‘상징 권력’의 정점에 서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는 취임강연을 통해서 그가 가진 상징권력의 기원을 성찰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학계에서 자신이 가지는 권위와 상대적 위치를 ‘사회학적’으로(부르디외의 말을 빌리면)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성찰적 사회학(reflexive sociology)‘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부르디외는 기존 사회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 즉 이론이 이론 독립적인 실재와 대응하고 있다는 객관주의를 넘어섰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이론의 힘과 객관성도 오직 학문 장안에서 생성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데, 나는 이점이 부르디외 이론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여러 논문에서 비판했듯이 부르디외는 그가 주장한 인식론적 성찰성이 어떻게 이론의 객관성을 담보해줄 수 있는가에 대해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 선배 동료 학자를 실명비판한다는 것은 상당한 어려운 일이다. 한국 사회과학계가 그만큼 지금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한국 사회과학의 갱신을 위한 제언이 책 전체에 담겨 있다고 본다. 과연, 현재와 같은 대학 구조와 학문학술정책, 연구자들의 연구 관행 등에서 본다면 한국 사회과학의 혁신이랄까, 종속성 극복을 위한 첫걸음은 어떤 것이 돼야 할까.

“실명 비판이란 말도 ‘우스운’ 말이다. 한국에서만 실명 비판이란 말이 관심을 끄는 것이 한국 학술문화의 ‘낙후’를 말한다. 한국 사회과학의 갱신이 왜 필요한가? 이것은 목적 상대적이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서구 사회과학을 추격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을 넘어서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현재의 학술문화와 관행으론 어림도 없다는 얘기다. 물론 다른 목적, 즉, ‘대중에게 쉽게 재밌는 얘기를 풀어서 해주는 것이 사회과학의 목적’이라고 규정해버리면 사회과학의 갱신, 혁신 등의 주장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우리가 첫 번째 목적을 추구한다면 실명비판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 사회과학계, 더 나아가서 인문학에서도 실명비판이란 말이 충격적인 것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다. 굳이 포퍼를 언급하지 않아도 학문의 성장에 가장 중심적인 것은 ‘비판’이다. 서구에서의 이론의 발전은 모두 선배 학자들의 이론과 연구를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구체적인 저자와 그의 저작을 정치하게 논하고 비판하지 않는다면 무슨 발전과 희망이 있겠는가? 대부분의 우리 사회과학 교수들이 외국에서 공부해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임에도 실명비판을 두려워하는 것은 넌센스다. 우리 학문의 서구 종속성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하되,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는 학술 문화를 정립해야한다. 내 생각엔 현재 한국 학계는 존경받는 지적 리더도 또 비판의 표적이 되는 도발적인 연구를 한 사람도 없다. 한마디로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세계 수준의 사회과학을 하려면 우선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상호비판을 통해서 연구를 심화시키고, 이를 통해 서구 헤게모니에 도전해야만 가능하다.”


△ 매우 공감하는 설명이다. 이 무시무시한 책 작업을 마친 후유증이 있을 것 같은데, 향후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있나.

“6월 중순에 또 한권의 책이 출간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 하버마스와 로티의 논쟁』이다. 이 책은 10년 넘게 하버마스의 이론과 로티철학에 대한 비판적 독해의 산물이다. 이 연구들은 미국의 사회과학철학 저널인 <인간연구(Human Studies)> 와 영국의 비판이론 저널인 <이론, 문화&사회(Theory, Culture & Society)> 에 「Habermas on Understanding: Virtual Participation, Dialogue and the Universality of Truth」 와 「Beyond Justification: Habermas, Rorty and the Politics of Cultural Change」 란 제목의 논문으로 각각 발표됐는데, 이 책은 이들 논문에 기초하고 있다.

짧게 말하면 이 책은 이론의 ‘공적 유용성’, 즉, 이론이 실천의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 하버마스와 로티가 지난 20년간 벌여 온 격렬한 논쟁을 논의한 책이지만, 단순히 그들의 논쟁을 정리하고자 쓴 책이 아니다. 서구에서도 하버마스와 로티 각각의 철학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이 둘의 논쟁점이 무엇이고 이들의 추상적인 철학적 논쟁이 구체적으로 문화(실천)변동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서 나는 문화사회학자인 알렉산더의 문화화용론과 로티의 맥락주의적 철학을 연결시킴으로써 왜 하버마스식의 비판이론이 실제로 실천의 변화를 유도하는데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가를 논증했다. 이 책은 일단 한국에서 출간되지만, 연극학, 공연학, 비판적 민속지를 포함한 이른바 ‘연행적 사회과학(perfomative social science)’에 대한 논의를 더하고 수정, 보완해서 『기준 없는 비판: 비판사회이론의 새로운 지평(Criticism without Criteria: New Directions in Critical Social Theory)』이란 제목으로 하버드대나 시카고대 출판부에서 출간할 욕심을 갖고 있다. 이 연구는 예일대의 제프리 알렉산더 교수의 초청으로 내년에 예일대 문화사회학 연구소에 머물면서 마치려고 계획하고 있다.

영어로 쓰고 있는 두 번째 책은 약 60%정도 진척됐는데, 간략히 말하면 부르디외의 과학철학에 대한 책이다. 부르디외 연구는 국내나 국외에서나 대부분 계급과 문화 연구에 국한돼 왔다. 나는 이 책에서 부르디외의 인식론이 토마스 쿤, 메리 헤시 등 후기경험주의적 과학철학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논하고, 그의 자연과학철학과 사회과학철학을 대비해서 논함으로써, 그가 사회과학의 객관성을 담보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 두 개념, 즉, ‘인식론적 성찰성’ 과 ‘참여자 객관화 방법론(participant objectivation)’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 비판 사회과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김경만 교수는 시카고대에서 과학사회학 및 과학철학을 전공하고 1989년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서강대 사회학과에서 이론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의 저명 학술지 <사회과학철학(Philosophy of the Social Study)>, <인간연구(Human Studies)>, <사회과학정보(Social Science Information)> 등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국내외에서 무게 있는 연구서를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 특히 부르디외의 수제자로 알려진 사회학자 로익 바캉과의 서신 논쟁으로 국제적 시선을 한몸에 받기도 했다. 캐나다 학술지 <오늘의 사회과학(Today Social Science)>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2008년 『담론과 해방』으로 한국사회학회 저술상을 수상했다. 특히 2009년에는 세계 사회학계와 지적 소통의 장을 열고 적극 참여해 담론을 생산하는 능력과 성과를 축적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암학술상(인문·사회 부분)을 수상하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관리자 2015-06-03 10:28:22
더 좋은 기사로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