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6:40 (금)
동쪽으로 간 소그드인들, 交易 확장해 ‘강건한 권력’ 등에 업었다
동쪽으로 간 소그드인들, 交易 확장해 ‘강건한 권력’ 등에 업었다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5.28 1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10. 장안에서 만난 소그드 상인, 그리고 그들의 장안(1)

▲ 동주살보 안가의 묘에서 출토된 석곽 벽화 부분. 돌궐인과 소그드인이 함께 등장해, 돌궐인과 소그드인이 일상생활에서 밀접한 관계였음을 보여준다(579년. 섬서성역사박물관 소장).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내지와 실크로드 연변 각지에서 교역활동을 했던 소그드 상인들의 가치는 치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양자가 요구하는 경제적 가치는 물론이고, 그에 수반되는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도 상인보다 더 나은 존재는 없었을 테니까. 돌궐과 돌궐이 지배하는 중앙아시아, 중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실크로드 연변과 중국 내지에까지 일정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소그드인의 존재가치는 더 귀해질 수밖에 없었다.

則天武后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7세기 후반의 장안은 그야말로 세계도시로서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극성을 이뤘던 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측천무후가 자기 권력의 정당성을 불경의 예언에 기대었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어떻게 보면, 노자와 동성이라고 해서 도교를 지원했던 唐의 이씨 왕조와 자신은 다르다는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 더욱 노골적으로 불교를 지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측천무후가 후원했던 승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法藏(643~712년)이다. 우리에게는 장안으로 유학해 종남산의 智儼(602~668년)에게서 수학했던 義相(625~702년)의 동문 사제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 두 사람의 사형제는 한 사람은 당나라 장안에서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됐고, 한 사람은 신라로 돌아와서 해동화엄의 초조가 돼, 동아시아 불교사의 한 장을 장식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참 후인 신라 말에 崔致遠(857~?)이 지은 법장의 전기 『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에는 법장의 가계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그의 이름은 범어로는 달마다라이고, 자는 현수이며, 또 범어로 발타라실리라고도 한다. 황제께서는 國一法師라는 별호를 하사하셨다. 속성은 康氏인데, 본래 康居國 사람이다. …… 고조부는 강거국의 국상이었고, 조부 때 강거국에서 당나라로 와서 귀화해 장안에 살았다. 아버지인 謐은 당 조정으로부터 左衛中郞將의 관직을 하사받았다. 어머니가 꿈에 햇빛을 삼키는 꿈을 꾸고 잉태했으며, 당나라 정관 17년(643년) 11월 2일에 낳았다.”
7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화엄종의 제3조이면서, 측천무후의 총신으로서 불경 번역에 종사했던 법장의 가계다. 그 집안은 본래 대대로 강거국의 국상을 지냈던 집안인데, 조부 때 장안으로 와서 귀화했다고 적고 있다. 출신이 출신이었던 만큼, 범어를 비롯한 서역어에 능통했던 듯하며, 때문에 불경 번역장에서 大德이 돼 번역작업을 지휘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강거국 출신으로 당나라에 들어와서 불교의 대덕 승려가 된 것은 사실 대단히 진귀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강거국 곧 오늘날의 사마르칸드(Samarkand)와 부하라(Bukhara) 지방은 소그디아나라고 불렸던 곳으로, 소그드인의 본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강국은 그 소그드인의 나라를 구성하고 있던 아홉 개의 부족, 이른바 昭武九姓 중의 대표 성씨에 해당한다. 소그드인들의 본거지와 풍습에 대해서 『新唐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련산맥 북쪽의 昭武城에 거주했는데, 돌궐의 공격을 받아서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와 蔥嶺에 의지하다가 그 지방(소그디아나)을 영유하게 됐다. 지파에 속한 사람을 왕으로 나눠 보내니 安, 曹, 石, 米, 何, 火尋, 戊地, 史 등으로 칭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九姓인데, 모두 昭武씨를 성으로 삼는다. ……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며 길에서 가무하기를 즐긴다. …… 아이를 낳으면 석밀을 먹게 하고 손에 아교를 쥐어 주는데, 장성해서는 달콤한 말을 하고 보화를 손에 잡으면 마치 풀처럼 달라붙으라는 것이다. 옆으로 쓰는 글을 읽히고, 장사에 능하며 이익을 좋아하고, 사내가 스무 살이 되면 이웃 나라로 가고, 또 이익이 있는 곳이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12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浮圖法을 숭상하거나 祠神을 섬긴다.”(『신당서』 「서역전」 ‘康’조)

조로아스터교 신봉 지역 출신의 대덕 승려
마지막에 신앙을 언급하고 있는데, 浮圖法은 불교를 말하고 사천신은 조로아스터교를 말한다. 소그드인들이 불교와 조로아스터교를 신앙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기원 전후해서 인도를 통일했던 쿠샨제국의 영역에 속했던 지역이었다. 쿠샨제국이 불교의 전파에 매우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불교도가 생겨난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페르시아제국으로부터 파르티아 제국 그리고 사산조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이란계 문화의 영향을 꾸준히 받는 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페르시아인들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를 신앙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상 특정 종교를 고집하는 전통은 그리 강하지 않았던 듯하지만, 종교 신앙이라는 것은 대개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흐름을 따라서 소그드인들의 다수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런 지역을 출신으로 하고 있는 법장이 불교의 대덕 승려가 됐다는 것은 그야말로 아주 예외적인 현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오늘날 장안성 인근에서 발굴된 제법 많은 소그드인들의 묘는 그들 대부분이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묘들의 대부분은 북주 시대부터 당나라 말기에 걸친 시대의 것인데, 적어도 7세기 말 이전의 묘에서 불교로 전향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소그드인들의 묘는 발견되지 않은 것 같다.
당대 장안의 사회 각층이 신앙한 종교는 아무래도 불교가 주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장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불교를 신앙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적 사회질서를 신봉해 불교를 배척한 봉건관료가 있었는가 하면, 당 조정이 정책적으로 배려했던 도교 역시 7세기 중후반에는 그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당대 장안성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앙대상 전부는 아니었다. 한족뿐만 아니라 서북의 이민족들 역시 당대 장안성의 일부를 차지해 정착했고, 서쪽 오랑캐 곧 西胡라고 불린 이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당시의 중국인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했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敎라고 불렸던 조로아스터교와 景敎 그리고 마니교를 신앙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연변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북의 이민족이 중국의 내지로 좀 더 깊숙하게 들어왔던 것이 바로 북조 말기부터 당대에 이르는 시기였고, 덕분에 당대의 왕도였던 장안성과 그 주변 역시 그들의 활동 중심지로 등장했다. 이들 서북 혹은 중앙아시아 출신 胡族들은 하서회랑 연변의 도시들 곧 돈황이나 무위, 고창 같은 도시들을 물론이고, 장안성 안팎에서도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장안성 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을 粟特商胡라고 불렀다.
당나라 사람들은 이 소그드인들을 胡 곧 서쪽 오랑캐와 商 곧 상인이라는 두 가지로 특징지어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역사에 등장하는 남북조 시대에 그들의 거주지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특히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지방이 그 중심이었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중국과 인도 그리고 페르시아를 잇는 거점 지역이었다. 실크로드를 둘러싸고 있는 천산산맥의 바깥 쪽 지역이기 때문에 천산북로(초원로)와 천산남로가 만나는 지역이기도 하고, 다시 거기에서 남으로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으면 인도가, 서남으로는 이란고원으로 연결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거대한 동서교역로 전체로 보았을 때도 핵심 거점 지역일 수밖에 없는 사통팔달의 요지에 해당한다.


그런 교역로를 거점으로 삼는 민족이 理財에 밝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석밀을 먹게 하고 손에 아교를 쥐어 주는데, 장성해서는 달콤한 말을 하고 보화를 손에 잡으면 마치 풀처럼 달라붙으라는 것이다. …… 장사에 능하며 이익을 좋아하고, 사내가 스무 살이 되면 이웃 나라로 가고, 또 이익이 있는 곳이면 가지 않는 곳이 없다”는 『신당서』의 평가는 그런 지역에서 나고 자라서 교역 상인이 됐던 소그드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비쳤을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런 사통팔달의 요지에 있으니 강성해진 주변 이민족들의 침입을 언제든 감내해내야 하는 불운의 지역이기도 했을 것 역시 분명하다. 달콤한 말을 해야 살아남고, 거머쥔 이익을 놓치지 않아야 삶을 보장할 수 있다. 어쩌면 가장 치열한 강자존의 잔인한 전쟁터일 수밖에 없는 본거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상인의 본성은 필연적으로 익혀야 하는 어떤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당나라 사람들은 이재에 밝다고 했지만, 그들로서는 정글에서 살아남는 생존의 법칙이었던 셈이다.

▲ 7세기 말의 狩獵出行圖. 말과 함께 낙타가 동원된 사냥 행렬의 모습에서 장안성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서역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711년, 서안 장회태자묘 묘도 벽화의 수렵출행도 부분).

이익이 있는 곳이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만큼 상업에 밝았던 소그드인들의 특성을 지적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평은 현지의 사정을 직접 살펴본 후에 기록한 것이라고만 말하기는 곤란하다. 본래의 거주지에 가지 않고 당나라 내에서도 그리고 실크로드와 하서회랑의 연변에도 소그드 상인 곧 粟特商胡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돼 있어서 그들의 풍습과 특징을 접하는 것이 대단히 쉬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당나라 사람들의 평가는 그들과는 처지가 달랐던 粟特商胡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 점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소그드인들은 일찍부터 동쪽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역시 교역이었다. 이미 북조 말기에 벌써 난주 서쪽의 실크로드 연변 곳곳에 소그드인들의 거주지가 형성됐는데, 이때 그들이 교역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바로 돌궐이었다.
북조 말기에는 중국의 왕조들보다 돌궐이 훨씬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돌궐이 소그디아나를 점령한 후 소그드인들은 돌궐의 가한에게 적극 협력하는 대가로 생존을 보장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그드인들은 돌궐에 복속한 후에는 돌궐의 영역 내에서 부락 단위의 거주지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돌궐의 가한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축적하는 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 이것은 교역에 종사하는 집단으로서는 당연한 대응이었다. 왕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영역 내에서의 상업 활동이 좀 더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소그드인 사독호실의 암살, 그 정치경제적 함의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돌궐 사회 내에서 소그드인들의 지위와 영향력은 점차 커져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영향력의 확대를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가 바로 소그드인 史獨胡悉의 암살이다. 사독호실은 7세기 초반 돌궐의 始畢可汗 밑에서 자주 계책을 내어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특히 가한의 밑에서 수나라에 대응하는 계책을 내고 정책을 주도하고 있어서, 수나라 측에서 보면 손톱 밑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수양제와 그의 신하 裵矩가 “천자가 진귀한 물품들을 내놓아서 교역하려 하는데, 먼저 오는 자가 좋은 물건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소문을 내어서 사독호실을 유인한다. 결국 이 유인계책에 말려든 사독호실은 참살을 당하게 된다(614년). 이 이야기는 두 가지를 보여준다. 이재를 추구하는 데 열심인 소그드인의 성격, 그리고 암살대상이 될 정도로 소그드인들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가 돌궐 사회 내에서 높았다는 것이다.
수와 수를 이은 당나라에서는 돌궐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수는 2대에 걸쳐 돌궐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없었고, 그것은 당나라 초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당 교체기에는 각축전을 벌이던 전국의 군웅들이 모두 돌궐에 조공을 바칠 정도였으니, 더 심했을 것이다. 그런 돌궐의 강성함은 가한의 막강한 왕권에서 비롯되는데, 가한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것은 결국 경제력이었고, 돌궐 경제의 향방을 좌우하는 것은 소그드인 곧 속특상호였다.


수와 당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해 양면책을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암살이나 이간책 등을 통해 소그드인과 돌궐 간의 분열을 야기하는 방법이다. 사독호실에게 사용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때문에 수와 당의 조정은 두 번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른바 당근정책이다. 소그드인들이 중국 내지에 집단으로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고, 서역 여러 나라들과의 교역 및 외교에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이미 北周 시대인 大象元年(579년)에 죽은 소무구성 중 安國 출신인 安伽는 하서회랑의 姑藏(오늘날의 武威) 출신으로, 서안에 들어와 서안 인근의 同州 지역 薩保를 맡았던 인물이다. 薩保 혹은 薩寶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역할이 다르기는 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소그드인들의 집단거주지를 관리 감독하는 역할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따라서 同州 곧 華州 지역에 소그드인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돼 있었다는 방증인 셈이다. 이미 북주 시대에 장안성 바로 인근에 소그드인 촌락이 형성돼 있었다면, 북주를 이은 수와 당 조정의 관료들 역시 소그드인들의 성향과 기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대 시대에 교역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강자와 약자의 입장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만큼,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경제적 요구는 더욱 노골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내지와 실크로드 연변 각지에서 교역 활동을 했던 소그드 상인들의 가치는 올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양자가 요구하는 경제적 가치는 물론이고, 그에 수반되는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도 상인보다 더 나은 존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궐과 돌궐이 지배하는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실크로드 연변과 중국 내지에까지 일정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소그드인의 존재가치는 그만큼 더 귀해질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당나라는 서역 제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제국으로 성장해가면서, 오히려 그만큼 주변 제국들과의 관계를 조정하는데 많은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나라가 지향했던 것은 정치적인 명분과 경제적 실리의 양자를 모두 취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그런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인적 집단의 필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치세를 구축하면서 제국으로 도약했던 당 태종의 정관 시대에는 그런 원활함이 더 많이 요구됐다. 제국으로 성장해가는 와중이었지만, 주변의 제국들이 아직 당나라에 완전히 복속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그드인들이 당과 주변 제국 특히 서역 제국과의 외교 및 경제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