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7:35 (금)
고대 유목 종족 사카와 키르기스스탄에 세워진 돌하르방 ‘발발’
고대 유목 종족 사카와 키르기스스탄에 세워진 돌하르방 ‘발발’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 영어학
  • 승인 2015.05.19 17: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39. 중앙아시아 초원에서(3): 이 땅의 선주민 塞種, 그들은 어디에?

이시크 쿠르간과 그 속에 매장된 황금 인간과 명문이 새겨진 은제 술잔을 위시한 엄청난 부장품, 이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여기가 고대 유목 종족 사카의 요람이었다고 믿게 됐다. 이 사카가 중국 문헌에는 색종(塞種 또는 索種)이라고 기록돼 있다.

"친구를 얻고자 하면, 함께 길을 떠나라" -카자흐 속담

▲ 키르기스스탄 부라나탑 부근의 발발출처: http://en.wikipedia.org/wiki/Kurgan_stelae#/media/File:Balbal.jpg

팝업 퀴즈! ‘발발’이 무엇일까요? 발바리도 아니고 웬 발발이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혹은 발발이 개의 종자를 말하는 것이냐, 아님 무슨 먹거리 이름이냐고 시비조로 물어올 수도 있겠다. 정답은? 아래의 石人像을 발발이라고 한다. 이런 발발은 몽골-알타이 초원, 중앙아시아 초원 어디서고 흔히 볼 수 있다. 코카서스 지방에서도 형태는 좀 달라도 ‘바바’ 즉 발발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없을까? 있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이 발발과 흡사하다.
돌하르방이란 ‘돌 할아버지’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으로, 흔히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부르던 명칭이 이제는 일반화된 것이다. ‘偶石木’, ‘武石木’, ‘벅수머리’(벅수는 제주 남부지방에서 장승을 이르는 말), ‘두릉머리’(뿔이 닳아진 소를 지칭하는 말), ‘돌영감’, ‘장군석’, ‘망주석’, ‘동자석’, ‘수문장’, 혹은 ‘백하르방’이라고도 한다. ‘우석’과 ‘무석’은 석상의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眈羅誌』(1653년)에 의하면, 돌하르방을 ‘翁仲石’이라고 하고, 『眈羅紀年』(1918년)에는 1754년(조선 영조 30년)에 당시 제주목사 김몽규가 돌하르방을 세웠다고 돼 있지만 선뜻 믿기지 않는다. 우실하 한국항공대 교수 지적대로 한 개인이 하루아침에 이런 독특한 형상의 석상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翁仲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14세기 후반 安南(베트남)에서 편찬된 『영남척괴열전』에 따르면, 交國(漢代의 郡名으로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 통킹, 하노이 지바에 해당)으로 불리던 옛날 베트남에 李身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해 키가 2장3척이나 되는 거인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 사람을 가리켜 李翁仲이라고 하는데, 중국과 한국에는 完翁仲이 있다. 李瀷(1681~1763년)에 의하면 “완옹중은 安南사람으로 키는 2장3척이나 되고 기품은 단정하면서 씩씩해 보통 사람과 아주 달랐다. 진시황이 완옹중에게 병권을 맡겨 임조를 지키게 하고 죽은 후에는 동상을 만들어 함양궁 사마문 밖에 세워 지키게 했다.” 성만 다르지 이옹중과 완옹중은 동일인물이다. 결국 돌하르방의 별칭 옹중석은 옹중이라는 인물처럼 기골이 장대한 석상, 혹은 수호신장 역할을 하는 석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김유정 제주문화연구소장, 「김유정의 제주해양문화읽기」, <제민일보>, 2009.3.10).


발발과 돌하르방이라는 닮은꼴 형상을 보며 나는 우리 민족의 종족적 기원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개인의 것이면서 학문적인 것. 오래 두고 묵히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운명처럼 문제의 해답이 보이는 수가 있다. 나는 발발을 몽골,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봤다. 책을 읽고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스키타이 쿠르간 주변에도, 일본학자의 흉노 고분 발굴 보고서에도 발발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우리나라 경주 괘릉에는 12지 신상이 護石으로 세워져 있고, 능 입구에는 신비의 武人像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이제 무덤, 분묘, 陵이란 말 대신 쿠르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곳으로 가보자. 카자흐스탄 동남부, 알마타(Almata)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이시크 지역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시크 쿠르간(Issyk Kurgan)이 있다. 쿠르간이라니? 고고학자들에게는 친숙한 이 용어는 원래 투르크어였으며, 이 말이 러시아를 거쳐 영어에도 차용돼 쓰이고 있다. 한 마디로 분묘를 가리키는데, 대개 규모가 큰 대형의 것을 가리킨다.


쿠르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보자. 영어 kurgan을 러시아어로는 курга′н, 폴란드어로는 kurhan, 그루지야어로는 ყორღანი(q'orghani))라고 표기한다. 흔히들 쿠르간은 왕왕 나무로 만들어진 玄室 위를 흙으로 덮은 분묘 혹은 봉분의 일종인 뫼에 해당하는 슬라브어로들 알고 있지만, ‘土壘’를 뜻하는 터키어 즉 투르크어 ‘kurgan’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게 맞다. 합리적이어야 할 인간들이 조상의 혼령을 믿고 의지하기 위해 무덤이나 무덤군 위로 흙과 돌을 크게 쌓아올린 封墳의 일종이 쿠르간이다. 규모가 커야만 돌아가신 조상들이 흡족해서 후손들을 잘 돌봐주실 거라는 희망 속에 사는 인간의 모습은 너무 왜소하다.
백제 무령왕릉,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들도 쿠르간에 해당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덤 축조방식도 그렇지만 대형 봉분을 둘러싼 12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새겨진 護石의 기능을 고려할 때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의 쿠르간이 掛陵 같은 규모가 큰 원형 봉토분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괘릉은 누구의 능인가. 행정적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왕릉. 사적 제26호. 『三國遺事』의 기록으로 미뤄 봐 신라 제38대 元聖王의 능으로 추정된다. 왕릉을 조성할 때 유해를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의 수면 위에 걸어 안장했다고 해서 掛陵이라 불린다. 원형의 봉토분 앞에 石床을 놓았고, 분 주변에는 호석을 두르고 12지 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괘릉이라. 문제는 12지 신상이 아니라 괘릉 입구에 떡 버티고 서있는 특이한 용모의 武人像.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이 아니라 전형적인 色目人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보니 조선시대 언문으로 ‘제융’이라 표기되는 ‘處容’ 또한 이국적 용모의 남자랬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과거에도 한반도와 서역 간 다양한 교류 활동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시크 쿠르간은 1969년 발견됐다. 알마타 동쪽 65㎞에 자리한 이시크市 인근 탈가르(Talgar) 충적선상지(alluvial fan)로부터 다시 동쪽으로 20㎞의 거리에 위치한 곳이다. 고대인들은 산록의 완만한 경사면에 분묘를 세웠다고 한다. 발굴 당시 60기 이상이던 것이 현재는 30기 정도만 남아 있다. 그 중 황금 인간이 발견된 쿠르간은 그 지역이 택지로 조성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높이 6m, 지름 60m의 중형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기원전 4~5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 국립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태양처럼 번쩍이기 때문인지 유목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황금을 좋아하나 보다. 발견된 유물 중 상당수가 금으로 만든 장신구. 그 중에는 순록, 말, 사자(머리)와 같은 실제 동물은 물론 숨은 보물을 지킨다는 상상의 동물 그리핀(독수리의 머리와 날개에 사자 몸을 한 怪獸)까지 조각돼 있다.


그러나 전시품 중 가장 특이하고 귀한 것은 銘文이 새겨진 은잔이다. 여기 새겨진 명문이 이 땅의 주인이 누구였으며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려줄 것이다. 이집트에서 강탈해 간 로제타스톤의 고대문자를 판독하는 데 상폴레옹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도전하고 오랜 시간이 경과했듯이, 이곳 초원의 문명이나 역사를 말해 줄 고고학적 발견물도 저를 알아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아직 명확히 밝혀진 건 아니지만, 이 명문은 대체로 스키타이의 방언으로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헝가리 출신 언어학자 하르마타(Janos Harmatta, 1917~2004년)는 파르티아 陶片(Parthian ostraca)과 두라 에우로포스(Dura Europos) 출토 파피루스, 그리고 주요 박트리아 명문 등을 해독한 인물이다. 두라 에우로포스는 오늘날 시리아의 작은 마을 살히예(Salhiye)에서 가까운 유프라테스 강 오른쪽 급경사지에 세워진 과거 그리스, 파르티아, 로마의 삼국이 맞닿아 있던 국경 도시다. 하르마타는 카로슈티 문자(Kharoshti)를 활용해 이시크 쿠르간에서 출토된 은잔에 새겨진 명문을 쿠샨인들이 사용하던 호탄 사카어(Khotanese Saka)라고 규정했다. 쿠샨인(貴霜)은 다름 아닌 월지인이다. 예컨대 그의 번역은 이렇다.


“이 그릇에는 포도주를 담아야 한다. 死者를 위해 익힌 음식을 많이 넣고 신선한 버터도 담아야 한다(The vessel should hold wine of grapes, added cooked food, so much, to the mortal, then added cooked fresh butter on).”
정작 놀라운 건 이른바 황금 인간(golden man)의 등장이다. 고고학적으로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출현 이상의 놀라운 발견이다. 河中지방인 소그디아나 북방, 동부 스키티아 지역에 해당되는 곳에 만들어진 이시크 고분에서 戰士의 복장을 한 유골이 발견됐던 것이다. 물론 4천개나 되는 금 장신구를 포함해 수많은 부장품이 함께 들어있었다. 유골의 주인공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18세가량 된 사카(Saka) 즉 스키타이 왕자나 공주임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아니면 그 누가 이런 엄청난 황금으로 치장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붙인 이름이 ‘황금 인간’ 혹은 ‘황금 공주’다. 카자흐스탄의 상징 중 하나로 채택된 건 너무나 당연했다.
알마타 소재 카자흐스탄 고고학연구소의 아키세프(A. Akishev) 교수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69~70년 이시크 쿠르간 발굴팀을 이끌었다. 그 덕분에 황금 의장을 걸친 채 땅 속에 묻혀 있던 젊은 남성(혹은 여성), 후일의 황금 인간의 묘를 발굴하는 행운아가 됐다. 그리고 발굴보고서 『이시크 쿠르간―카자흐스탄에서의 사카인의 예술』을 작성했다. 그는 이시크 쿠르간의 연대를 기원전 5세기라고 주장한다. 한편 앞서 말한 헝가리 언어학자 하르마타는 기원전 2세기경이라고 말한다.


이시크 쿠르간과 그 속에 매장된 황금 인간과 명문이 새겨진 은제 술잔을 위시한 엄청난 부장품, 이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여기가 고대 유목 종족 사카의 요람이었다고 믿게 됐다. 페르시아인들이 사카(Saka or Saca)라고 부르던 종족 사람들을 그리스 로마인들은 스쿠타이(Scythai)라고 했고, 인도인들은 사키야(Sakya, 釋迦)라고 했다. 중국 문헌에는 색종(塞種 또는 索種)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塞種이 낯설지 않다. 그랬다. 흉노에 내몰린 월지가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땅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 정착해 살고 있었다. 바로 색종이었다. 이들의 땅 塞地는 天山山脈 북방에 있는 일리(Ili)강과 추(Chuu)강 유역이었다. 이들이 내습한 월지의 위세에 눌려 야속한 운명을 슬퍼하며 타지로 이주했다.
“(오손국은) 본래 塞의 땅이었는데, 대월지가 서쪽으로 塞王을 패주시키자 색왕이 남쪽으로 縣度를 건너가 버리니, 대월지가 그 땅에 거주하게 됐다. 후에 오손의 곤막이 대월지를 격파하니, 대월지가 서쪽으로 이주해 대하를 신하로 삼았고, 오손의 곤막이 그곳에 살게 됐다. 이런 연유로 말미암아 ‘오손 사람들 중에는 색종과 대월지종이 [섞여]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前漢書』 「西域傳」 第66 烏孫國)


천산 북쪽 광대한 초원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선주민 색종이 월지의 침탈로 서쪽으로 쫓겼다가 다시 남쪽으로 현도를 지나 이주해갔다. 이주를 포기하고 그 땅에 남은 부류도 있었다. 얼마 후 오손에 밀린 월지도 그러했다. 이들이 부족연맹체 성격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오손의 구성원이 됐다. 이 나라 오손은 세월 변화가 무상하듯 영토가 줄었다 늘었다 했겠지만, 거란족의 나라 遼의 역사를 기록한 『遼史』에 등장할 만큼 수명이 길었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오손국만 그런 건 아니다. 비잔틴제국도 천년 역사를 자랑한다. 외면하지 말고 풀어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가 660년 羅唐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것으로 알려진 백제의 사신이 元 世祖 쿠빌라이의 궁정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元史』의 기록. “원 세조 至元 4년(1267년) 정월 백제가 그 나라의 사신 梁浩를 보내 조회하니 錦繡를 하사했다.” 믿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러나 史家가 무엇 하려고 쓸데없는 거짓을 꾸며 기록을 남기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4세기 후반 고구려에 들어가 불교를 전한 승려가 있었다. 아다시피 小獸林王 2년(372년) 前秦왕 堅이 보낸 順道가 그 사람이다. 2년 뒤 또 다른 젊은 승려가 고구려에 입국해서 불교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阿道. 아도는 我道 또는 阿頭라고도 轉寫됐다. 명색이 언어학자인 필자의 관심사는 이 명칭의 정체다. 한자어로 표기했지만 이는 필경 음차어다. 전진왕 부견은 북방 유목민족 族 출신이다. 그가 파견한 順道 역시 유목민이었을 것이고, 阿道 또한 그러할 것이다. 順道는 잘 모르겠으나, 阿道는 ‘아버지’를 뜻하는 투르크어 ata의 音譯일 수 있다. 옛날에는 친족어가 오늘날처럼 분화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남성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함경도 아바이’처럼. 조선 成宗朝에 지어진 『악학궤범』, 『악장가사』에 실린 ‘處容歌’에 “아흐, 처용 아”라는 구절에서 보듯 ‘아’는 혈연관계의 아버지가 아닌 성인남자 일반을 지칭했다. Ata도 일반 남성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일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추정에 불과하지만, 阿道(ata)라 불리는 투르크족 출신 승려가 傳法을 위해 낯선 땅 고구려에 왔다. 신라에도 갔다. 당연히 중국에도 갔을 것이다. 고래로 사람들은 어떤 목적으로든 어떤 이유에서건 천지사방으로 움직였다. 기원전 2세기 흉노가 월지를 격파했을 때 흔히 대월지라 명명되는 월지의 主流는 西遷해 마침내 天山山脈과 蔥嶺(파미르고원)을 넘어 大夏(Bactria)까지 지배하면서 소그디아나의 주인이 된다. 이때 천산 일대에 先住하던 색종도 남쪽으로 가서 계빈국(賓國)을 지배했다. 색종은 나눠져 여러 나라를 이뤘는데 疏勒으로부터 서북쪽으로 休循, 捐毒 등은 원래 색종의 나라였다(『前漢書』 「西域傳」 第66 賓國 條).


색종이 남하해 지배했다는 계빈이 Kapisi의 音譯임은 이미 말했다. 그런데 “현재 현도의 막힘으로 인해 계빈이 넘어올 수 없다”는 『전한서』 「서역전」 제66 계빈국 조의 기록을 믿는다면 계빈이 Kashmir 지역을 가리킨다고도 말할 수 있다. Pulleyblank는 “계빈의 古音은 Kashmir의 프라크리트(Prakrit) 語形인 Kaspir를 음역한 것”이라고 했다. 물론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Prakrit는 holy language(梵語)인 Sanskrit에 대해 고대와 중세에 인도 북중부의 방언으로 사용된 일반 대중어(common language)를 의미한다. 어찌됐든 흉노의 공격에 쫓긴 월지의 서천으로 본디 천산북안 일리 초원과 이식쿨 호수 일대, 추강 유역 등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고 있던 색종, 즉 사카족(Saka)에 속한 유목부족들이 차츰 남하해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고 험준한 힌두쿠시를 넘어 간다라 지방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부득이한 이주 이전 이들의 거주 흔적이 이시크 쿠르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