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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와 ‘곤궁함(窮)’
군자와 ‘곤궁함(窮)’
  •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승인 2015.05.1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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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봄날이 짧다. 계절 변화로 겨울 지나고 바로 여름으로 가는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막상 그 변화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初唐 張若虛는 “인생 대대로 그침이 없고, 강에 비친 달 해마다 비슷하다(人生代代無窮已, 江月年年望相似)”라고 읊었지만, 봄밤 달 비치는 그 강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唐詩엔 봄이 소재인 작품이 많은데, 짧아진 봄은 우리 삶이 그만큼 더 각박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몇 주 전부터 학교에서 고전강좌를 시작했다. 동서양 고전을 원문 위주로 읽는 강의로 학내외를 가리지 않고 수강생을 받았더니, 예상과 달리 일찌감치 정원이 마감됐다. 『논어』, 『도덕경』, 플라톤의 『향연』 등을 전공교수들이 돌아가며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둘지는 학기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아직까진 분위기가 좋은 편이다. 고전을 소리 내어 읽고 함께 그 뜻을 헤아리는 시간은 오랜만에 강의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교양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실천”이라고 한다. 지난 해 대학 강의를 마감한 신영복 교수가 최근 펴낸 『담론』(돌베개 刊)에서 한 말이다. 모든 고전 공부가 텍스트를 읽고, 그 다음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는 三讀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잇는 노학자의 메시지가 묵직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대학시절 선생의 책을 읽고 느꼈던 울림이 여전한데,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에 가슴 한 켠이 서늘하다.


고전 강독을 하며 『논어』를 다시 보니, 예전 읽었을 때와는 많은 부분에서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학생 때 읽었던 『논어』와 지금 읽는 『논어』가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어느 대목에서 감정이입이 되는 빈도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가령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任重而道遠)” 같은 말은 학교에 몸담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진다. 반면 전에 읽었을 땐 그저 넘어갔던 구절이 크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군자는 먹는 데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거처하는 데 편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도 험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말할 수 없다(士志於道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는 최근 들어 자주 되새기는 말이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의 국경에서 곤란을 겪는 상황이 나온다. 양식이 떨어져 쓰러지는 제자들이 연이어 나오자 자로가 공자에게 성낸 표정으로 묻는다. “군자도 이와 같이 곤궁한 때가 있습니까?” 공자의 대답은 이러했다. “군자라야 곤궁함을 견딜 수 있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지는 법이지(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공자가 자로에게 묻는다. “유야, 『시경』에 이런 시구가 있다.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광막한 들판을 달리네.’ 우리가 코뿔소도 호랑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게 이 광야를 헤매고 있을까. 우리의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자로가 대답했다. “우리가 아직 仁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공자가 반문한다. “어진 사람이 반드시 신임을 받는다면 伯夷, 叔齊가 왜 있었겠느냐.”


공자가 자공을 불러 같은 질문을 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선생님의 도가 너무 큽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선생님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좀 축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자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좋은 농부는 곡식을 경작할 뿐 그 수확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솜씨 좋은 공인은 정교하게 만들 뿐 시장의 흐름은 말하지 않는 법이다.”
뒤이어 안회에게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가셔야 합니다. 설령 못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에야 비로소 군자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도를 제대로 닦지 못한 것은 우리의 부끄러움이지만, 도를 잘 닦았는데도 쓰지 않은 것은 군주의 잘못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못 받아들여진 연후에 비로소 군자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곤궁함에 처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자꾸 마음이 가는 이유는 지금의 처지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 모일간지가 대학의 비정년트랙 전임교수들의 평균 연봉이 일반 전임교수의 49% 수준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실었다. 수치상으론 절반이지만 강의책임시수나 연구년 등을 고려하면 그 비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경제적 궁핍도 궁핍이지만 교수사회에 존재하는 계급적 위계는 그 곤궁함의 정도를 더욱 실감케 한다.


대학을 시장의 잣대로 재편하려는 재단이나 본부의 전횡도 문제지만, 학내민주화를 얘기하며 그 행태를 비판하는 교수들 역시 강의교수나 시간강사들에 대해선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험한 옷과 거친 음식은 참을 수 있지만, 인간적 모욕과 멸시는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공감이 없는 모든 구호가 결국 위선에 불과한 이유다. 이런 상황이 한동안 바뀌긴 어려울 듯 보이니, 가는 봄날의 화두는 여전히 ‘곤궁함(窮)’을 휩싸고 돈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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