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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견인, 그리고 기다림
삶과 죽음의 견인, 그리고 기다림
  •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 승인 2015.04.2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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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세월호 침몰 1주기가 다가오는 오늘, 갑갑하고 우울했던 1년 전 이맘때를 떠올리며 삶과 죽음을 성찰해본다. 우선 나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해본다. 젊은 시절 세상은 내게 낯설고 암울했고, 그러한 세상을 바라보는 나 자신은 참으로 무능하고 초라한 존재로 여겨져 수시로 좌절했다. 그러면서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 설렘으로 나날을 살았던 것 같다. 또한 절망하는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 절망감이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의식으로 깨어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 당시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하얀 노트 위에 파란색 잉크로. 그 때의 감각을 떠올려본다.


글을 쓸 때의 마음은 여일하다, 즉 초심이다. 과거를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백지상태(tabula rasa)의 마음! 물론 기억을 지우겠다는 마음은 아니고, 외려 기억을 정리하는 마음이다―아, 이 오늘이라는 시간을 느끼고 설렌 적이 얼마나 오래됐는가! 그 새로운 오늘의 느낌이 들 때가 바로 글을 쓰고 싶어지는 때였다. 새로워지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인지 당시 나는 전날에 썼던 일기는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노트를 낭비한다는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면서 전날에 썼던 면을 덮고 노트의 새 면을 펼쳤다. 그 위에 세상을 심판하고 나 자신을 단죄하듯 펜을 꾹꾹 눌러 썼던 감각을 내 손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간 세상은 엄청 변했는데, 그 감각에 대한 기억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삶을 생각할 때마다 언젠가부터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강한 모티프가 있다. 즉 삶은 맹목적인 에너지인데, 사람들은 저마다 그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쓸지 잘 모른 채 분출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갈급한 생명의 에너지가 다른 사람에게는 주체할 수 없는 여분의 에너지라는 불평등과 불균형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렇지만 생명이나 세상의 소실점에서 바라보면 이 세상은 하여튼 과잉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을 형성한 에너지가 그 자신을 파괴하는 에너지로 돌변할 수 있다. 에너지는 소모돼야 하기 때문이다.


성찰은 나중에야 들어선다. 그러면서 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바꾸지도 못한다. 그래서 독일 시인이자 소설가인 에리히 캐스트너가 풍자소설 『파비안』에서 말했던 “삶은 나쁜 습관이다”라는 말이 조금 이해된다. 자살은 이러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그 삶을 거두는 맹목적 의지의 분출일 것이다. 삶도 자살도 방향을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생명충동과 죽음충동(열반 Nirvana의 원칙)은 무언가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삶과 죽음의 이러한 줄다리기는 인생 전체에 걸쳐 펼쳐지며 매일 되풀이된다. 사람은 잠을 잘 시간이 됐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데도 그 앎을 거스르고, 왜 거스르는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 거스른다. 잠이 와야만 잠을 자는데, 그 잠이 언제 올지 스스로 모르기 때문에 기다리면서 동시에 그 잠에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생명이다. 꿈을 꾸면서 깨어나는 순간을 모르면서 기다리는 것이 삶이다. 그리하여 생명과 죽음, 깨어 있음과 잠듦은 하나인 셈이다. 남는 것은 고통과 신음이거나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닐까.


잠을 자는 것은 잠에 아부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들의 호기에서 나온 표현일텐데 그것은 일말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깨어 있음은 잠을 경멸하고, 잠은 깨어 있음을 어머니처럼 감싸 안으면서 해소하고 파괴한다. 둘의 관계는 마치 남성과 여성의 영원한 투쟁의 관계와 같다. 낮과 밤, 생명과 죽음, 남성과 여성, 깨어 있음과 잠듦은 서로를 견인하면서 서로를 조건 짓고 서로를 해방시킨다. 둘 중 하나가 없는 상태는 지옥일 것이다. 어쨌든 반립적 관계에 있는 이 둘의 균형과 화해가 삶을 구성하고 죽음도 구성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누가 아무리 권해도 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반대로 그것을 아무리 말려도 하고야 마는 옹고집이 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다. 생명은 죽음과 대면하면서 비로소 온전히 살아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그래서 철학자들, 예술가들, 성현들은 삶을 삶답게 견인하는 죽음에 대해 말했다. “죽음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축복 가운데 최고의 축복이다.”(소크라테스) “죽음은 진정한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다.”(모차르트) 하지만 죽음이 제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는 아직 삶 속에 있다. 삶이란 고통스런 오디세이인데, 그 고통에서 쉽게 해방돼도 이상하고, 그 고통이 견딜 만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서 삶은 그 견인을 견디면서 나아가고 그 견인이 풀어질 때 비로소 손을 놓는다. 손을 놓으면서 모두가 해방되고 모든 것이 화해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생명의 내재적이고 무의식적인 목표인 自然史일 것이다. 삶은 그래서 결국 기다림이고 견딤이고, 또 그것이 사랑과 동정심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무책임하면서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성만 서평위원/이화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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