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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된’ 민주주의 시대, 잃어버린 사회를 찾아서
‘관리된’ 민주주의 시대, 잃어버린 사회를 찾아서
  • 교수신문
  • 승인 2015.04.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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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사회적 인간의 몰락: 왜 사람들은 고립되고, 원자화되고, 파편화되는가?』 김윤태 지음 | 이학사 | 351쪽 | 17,000원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시민과 현대 민주주의의 혁명적 대중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수많은 개인과 소비자만 남았다. 새로운 유연노동사회와 대중소비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경쟁을 찬양하고 사회구조를 외면하고 자신에게만몰두하는 인간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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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오직 공동체(즉 그리스 도시국가) 안에서만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 존재의 목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바로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최상의 능력들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최상의 능력을 실현할 수 있으려면 가족, 마을, 그리고 도시국가(공동체)를 거치는 점진적인 사회화 단계를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공동체 즉, 사회는 인간에게 외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최상의 능력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개인도 아니고 개인으로부터 독립된 사회(국가)도 아니며, 바로 공동체 속의 인간이다. 인간은 시민적 삶의 행위자로서,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실현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했다. 이는 사회적 동물이자 정치적 동물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 인류는 지난 2천400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을 당연하다고 믿었고, 사회 또한 그렇게 작동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인간’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사회적 인간의 몰락』은 ‘사회적 인간’이 사라져가는 현실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고, 변화하는지를 설명하는 한편, 왜 사회가 점점 약화되고, 분산되고, 해체되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이 책은 홉스, 루소, 스미스, 마르크스, 엥겔스, 베버, 뒤르켐 등 근대 사상가에서부터 프로이트, 레비스트로스, 아렌트, 푸코, 엘리아스,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부르디외, 벡, 기든스, 바우만 등 현대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인간을 분석, 설명, 전망하고자 노력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살펴보고 이를 세계적 현상 및 한국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함으로써 ‘사회적 인간’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가는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사회적 인간이 약화되는 반면에 고립되고 원자화된 경제적 인간이 확산되는 사회적 현상의 원인을 분석한다. 데이비드 리스먼이 주장한 고독한 군중(공적 영역을 파괴하고, 사회문제를 외면하고, 정치에 무관심한,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사람들)의 출현, 리처드 세넷이 설명하는 공적 인간의 몰락(사적 생활로 도피해 개인적 의미만 찾음으로써 공적 문화와 공동체가 해체되는 현상), 지그문트 바우만이 묘사한 액체 사회(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전통 사회가 아니라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액체적이고 유동적인 사회), 울리히 벡이 분석하는 개인화(전통과 억압에서 자유로워진 개인들이 극단적으로 완성하는 개인화)는 거대한 사회변동이 어떻게 인간성과 사회적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도 급속하게 사회적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 노동 유연화, 계급 정체성의 약화 및 워킹 푸어의 증가, 조직 속의 고독한 개인, 국가의 쇠퇴, 오리엔탈리즘과 문화 제국주의, 소비주의 문화의 지배, 가족의 해체, 여성 차별 등 취약 계층의 사회적 배제, 네트워크 속의 고독한 대중, 사회적 무관심은 우리를 전혀 다른 사회로 이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시민과 현대 민주주의의 혁명적 대중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수많은 개인과 소비자만 남았다. 새로운 유연노동사회와 대중소비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경쟁을 찬양하고 사회구조를 외면하고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인간을 만든다. 자신만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안달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찾으라는 자기계발서를 따르고, 책임감과 불안에 시달리고, 결국 힐링과 치유를 갈구하는 고립된 개인들이 늘어간다. 이들에게 모든 문제는 개인의 문제다.


산업사회의 노동, 조직, 계급, 국가의 성격이 서서히 변화하고 사람들의 문화적 정체성, 사랑, 가족, 소통의 형태도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모든 고정적인 것은 녹아내리고, 전통과 억압이 사라지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더욱 원자화되고, 고독해지고, 파편화된다. 개인의 자유가 증가할수록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줄어드는 ‘자유의 역설’이 발생한다. 방황하는 개인들이 가득 찬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점점 희귀한 일이 되고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이타주의, 사회의 공동선, 좋은 사회에 관심이 사라진 사회가 출현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이 취업을 위한 통과의례가 되면서 사회적 무관심이 전 사회에 팽배해 있다. 대학이 비판적 지성의 공간이 아니라 인력 양성 공장으로 탈바꿈하면서 비판 정신은 역사의 한 귀퉁이로 밀려나고 경제와 효율성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대학생이 행동하는 지식인에서 거대한 산업예비군으로 변하면서 대학생은 침묵한 채 스스로 자본의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민주화 이전의 대학생이 개인적 문제도 사회화한 것과 반대로, 오늘날의 대학생은 사회적 문제도 개인화한다.


최근 한국 사회를 ‘힐링’이 휩쓸고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긍정 심리학’ 관련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일차원적 경제주의를 극복하려는 행복의 주관적 차원에 대한 분석은 역설적으로 모든 사회문제를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데 이용된다. 결국 개인적 상처의 근원을 외면한 채 피상적 이해와 처방을 제시하는 데 그친다. 사회에 대한 냉철한 비판 의식과 제도적 개선을 위한 노력은 회피한다. ‘힐링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사회적 무관심을 조장한다. 사회적 무관심은 사회를 움직이는 세력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결과다. 대개 사회적 무관심은 시민을 대표하지 않는 정당과 언론에 의해서 조작되고 강요되기도 한다. 정치인은 자기 이익에 몰두하고, 미디어는 연예와 오락으로 광고 따기에 바쁘다. 기업은 시민이 수동적인 시청자와 소비자에 머물도록 더 많은 돈을 쓴다. 우리는 ‘관리된 민주주의’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인간의 몰락은 수많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우리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권력과 자본에 맞서 행동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과거의 사회운동(노동운동)에 뒤이어 나온 새로운 사회운동, 즉 신사회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사회운동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복원을 추구하며 다양한 개인의 연대를 꿈꾼다. 신사회운동은 초계급적인 운동이며, 문화적인 가치, 정체성, 삶의 질의 차원을 중시한다. 신사회운동은 조직이 수평적이고 유연하며, 의사 결정 방식이 상향식이다. 신사회운동은 초국적이어서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 발전과 지구 시민사회를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구호가 새로운 모토가 됐다. 한국에서도 1987년 민주화 이후 신사회운동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한국은 역동적인 시민사회를 가진 나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한국의 시민사회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민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공론장에서 발언하고 논쟁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시민으로서 권력과 지배에 반대하는 자율성과 비판적 정신을 가지고 ‘직접행동’에 앞장서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무관심하고 냉소적이라면, 우리가 사회를 방관한다면 민주주의는 미래가 없다. 사회 참여, 정치 참여, 민주주의가 없다면 사회적 인간도 사라질 것이다.

 


김윤태 고려대·사회학
필자는 런던정경대(LSE)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저서로 『Bureaucrats and Entrepreneurs』, 『한국의 재벌과 발전국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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