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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행동의 실현에 대한 가르침 …‘행복의 윤리학’에서‘행복의 정치학’으로
탁월한 행동의 실현에 대한 가르침 …‘행복의 윤리학’에서‘행복의 정치학’으로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3.30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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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 9강. 조대호 연세대 교수의‘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3월 마지막주 토요일인 28일,‘ 문화의 안과 밖 시즌2’고전읽기의 2섹션 고전시대의 두 번째 강연이 진행됐다. 앞선 박종현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플라톤 독법에 이어 조대호 연세대 교수(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주제로 고전 독법을 제시했다.
조대호 교수는 연세대를 졸업한 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와 역서에는 OUSIA UND EIDOS IN DER METAPHYSIK UND BIOLOGIE DES ARISTOTELES(2003),

『철학, 죽음을 말하다』(공저·2004),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2004),『 지식의 통섭』(공저·2007)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고대 그리스 시문학과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생물학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국내외에서 발표했다. 지금은 주로 동물의 습관적 행동과 인간의 윤리적 행동 사이의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춰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과 실천철학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 저서로 평가받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알려진 대로 전체 10권으로 돼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바치는 형식이거나 그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도덕적 행동의 습관화를 통해 도덕적 성품을 고양하는 것에 초점을 뒀으며,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를 삶의 목표로 보고 있다.
이날 강연에서 조 교수는『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사유의 탁월성과 실천적 지혜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평가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행복의 윤리학’은‘행복의 정치학’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강연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 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리 삶의 가장 큰 관심사이자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가장 큰 관심사인‘행복’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욕망’,‘ 좋은 것’,‘ 행복’사이의 관계에 대한 말부터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우리는 모두 좋은 것들을 욕망하는데, 좋은 것들 사이에는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있고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다’는 것이『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전제이자 논의의 출발점을 이루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좋음들 가운데 최상의 것을 일컬어‘eudaimonia’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것을‘행복’이라고 옮긴다. 아리스토텔레스도‘행복’이‘잘 사는 것’과‘잘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생각을 부분적으로는 수용한다. 그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에게 에우다이모이나 혹은 행복은 주관적 만족감이 아니라 객관적인 성공을 뜻했던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 이런 뜻에서‘잘 사는 것’혹은‘잘 행동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써 아직 행복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이뤄진 것은 아니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려면, 즐거움의 감정보다는 오히려 그런 감정을 낳는 활동에 더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가 찾는 행복이‘동물로서’잘 사는 것이 아니라‘인간으로서’잘 사는 것인 한, 도대체 어떤 종류의 활동이 인간의 행복한 삶을 이루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통념에서 벗어나는 행복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최고 목적으로 삼는 에우다이모니아는‘인간으로서’잘 사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알아야 인간의 ‘에우다이모니아’를 충분히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논의 방식을 일컬어 ‘기능 논변(the function argument)’이라고 부른다.

“행복은‘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

기능 논변은 모든 것은 각자 고유한 기능이 있어서 그 기능을 잘 실현할 때 최선의 상태에 이른다는 주장으로 간추릴 수 있다. 행복의 문제에 적용하자면, 인간에게는 고유한 기능이 있어서 이 기능을 잘 실현할 때 행복하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특징은, 형이상학이나 생물학이나 윤리학이나 어떤 분야를 가리지 않고, 건축술이나 의술 등 기술의 예를 즐겨 끌어들이는 데 있다. 기능 논변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바로 이런 기능 논변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한 정의에 도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고유한 이성적 기능과 욕망의 기능을 잘 실현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각각의 기능에 알맞은 탁월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종류의 탁월성을 나눈다. 하나는 이성 기능을 잘 실현할 수 있게 해 주는 ‘사유의 탁월성(aretē dianoētikē)’이다. 말하자면 철학적 지혜는 이성 능력을 잘 실현할 수 있게 하는 탁월성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욕망을 잘 실현시키는 탁월성은 어떤 것일까. 욕망을 잘 실현하는 데는 절제나 용기 등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탁월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사유의 탁월성’과 구별해서‘습성의 탁월성(aretē ēthikē)’이라고 부른다. 욕망을 잘 실현하는 일은 좋은 습관을 갖춤으로써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습성의 탁월성에 대한 논의는『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모두 11가지 습성의 탁월성이 소개된다. 이 탁월성들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첫째 범주에는 감정(pathos)의 영역과 관련된 탁월성이 속한다. 둘째 범주에 속하는 탁월성으로는 재물이나 명예 등 외적으로 좋은 것들과 관련되는 탁월성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범주에는 사회적 삶과 관련된 탁월성들이 속한다. 습성의 탁월성은 이렇게 감정의 영역, 외적으로 좋은 것들, 사회적 삶과 관련된 것으로 나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극단의‘중간’혹은‘중용(to meson)’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절제, 용기, 정의 등의 가치 개념들에 대한 서양의 최초, 최고의 현상학적 분석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각 행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고, 그것을 지향하는 데 습성의 탁월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마디로‘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규정하는 방식으로’행동하는 것이 중용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행복’,‘ 탁월성’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적인 개념이 또 하나 등장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중용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능력을 가리키는‘실천적 지혜(phronēsis)’가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살펴봐야 할 다른 종류의 탁월성, 즉 사유의 탁월성들 가운데 하나다.

▲ 라틴어로 된 1566판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첫 페이지. 사진출처=http://en.wikipedia.org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절제, 용기,
정의 등의 가치 개념들에 대한 서양의 최초,
최고의 현상학적 분석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사유의 탁월성과 실천적 지혜

우리는 앞에서 사유의 탁월성이 인간에게 고유한 이성 기능을 잘 실현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것은 실천적 이성의 탁월성인 실천적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뿐만 아니라 현대의 실천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주로 이 개념을 중심에 두고 사유의 탁월성을 논의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우리가 논의의 실마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실천적 지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가지 규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편으로는 실천적 지혜가 감정이나 행동에서 중용을 찾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적 지혜를 ‘숙고(bouleusis)’와 결부시키면서 숙고를 잘하는 데 실천적 지혜의 특징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혜를 대비시켜 놓고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행복이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라면,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일까. 실천적 지혜의 인도 아래 습성의 탁월성을 실현하는 실천적인 삶이 행복할까, 아니면 철학적 지혜를 갖고 순수한 관조에 몰두하는 이론적인 삶이 더 행복할까. 이것은『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기되는 문제이자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봐야 할 문제다.

행복의 두 가지 길: 이론적인 삶과 실천적인 삶

우리는 이제껏 인간적인 좋음, 즉 행복이 어떤 뜻에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인지 살펴봤다. 그런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탁월성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삶을 위해서 어떤 탁월성을 취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탁월성 가운데‘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행복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의 해석은 두 방향으로 갈린다. 한쪽 사람들은 인간적인 좋음을 가능하게 하는‘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이 철학적 지혜를 가리킨다고 말한다(지배적 해석). 반면, 다른 쪽 사람들은‘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은 지혜까지 포함해서 지금까지 소개한 모든 탁월성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본다(포괄적 해석). 이 해석은‘완전한’을‘전체적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어떤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발언에 더 부합할까.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면, 분명 지배적 해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더 들어맞는 것 같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전개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는 보통‘행복의 윤리’혹은 ‘덕 윤리’라고 불린다. 이런 이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가 행복을 최고의 목적으로 내세우고 또 덕을 그런 행복의 실현 조건으로 삼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여기에서‘정치학적’측면을 엿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정치학적 성격은『니코마코스 윤리학』마지막 부분의 발언들, 즉 이제까지 논의된 행복 혹은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이 교육이나 법적인 조건에 의존한다는 발언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윤리학 논변들의 목적은 앎 자체가 아니라 탁월한 행동을 실행하는 데 있다. 윤리학의 논변들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하려면 먼저 그들이 교육을 통해 좋은 습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런 뜻에서 좋은 습관을 낳는 교육은 법적 강제 없이는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런 교육을 위해서는 사람을 탁월한 행동으로 이끄는 법률 체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탁월한 행동의 가능성 혹은 그것의 실현 조건에 대한 논의는 윤리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행복의 윤리학’은‘행복의 정치학’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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