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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⑧
● 기획연재 :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⑧
  • 교수신문
  • 승인 2002.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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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대학에 발을 들이다
“내 죽은 사상을 시든 잎처럼 몰아, 몰아서,/우주 사이에 휘날리어 새 생명을 주라/그리하여,부르는 이 노래의 소리로,//영원의 풀무에서 재와 불꽃을 날리듯이/나의 말을 인류 속에 날려 흩으라!/내 입술을 빌어 이 잠자는 지구 위에//예언의 나팔소리를 외치라, 오, 바람아/겨울이 만일 왔거든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셸리(Percy Bysshe Shelly, 1792-1822)의 시 ‘Ode to the West Wind’의 마지막 연의 번역이다. 함 선생님이 이 시를 번역하셔서 1937년 12월호 ‘성서조선’지에 게재하셨다. 선생님이 1924년에 당시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바로 그 해에 동경제국대학을 갓 나온 야마다(山田盛太郞)라는 아직 서생 냄새가 없어지지 않은 젊은 강사가 ‘If winter comes’라는 영화가 왔는데 재미있으니 한번 보라는 말과 더불어 이 ‘If winter comes’라는 제목은 영국시인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부연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를 심봉하는 경제학자였으며 언제 어느 모로 보나 재치와 진실이 흘러 넘치는 선생이었다고 함 선생님은 그의 ‘겨울이 만일 온다면’(전집 4권에 수록)이라는 글에서 소개하고 있다.

서풍에 부치는 노래

셸리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해준 것이 없었지만 어떻든 그 젊은 야마다 선생에 의해서 소개된 ‘서풍의 노래’가 함 선생님의 일생을 통해서 그의 삶을 지배하는 좌우명이 됐던 것이다.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오산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는 비로소 셸리의 시집을 사서 ‘서풍의 노래’의 전문을 대하게 됐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

<“오 사나운 서풍이여 너 산 가을의 숨이여”(O Wild West Wind, thou breath of Autumn’s being)하는 첫 줄로 시작되는 그 시는 첫 글자 그대로 와일드(wild)한 생기찬 영의 부르짖음이요, 자기 말대로 “예언자의 나팔”이요, “슬프면서도 녹아드는 혼의 기도”이다. 나뭇잎을 흔들며 떨며 씨를 날려 땅 속에 묻고, 구름을 몰아쳐 폭풍우를 퍼부으며 죽어가는 해를 위해 만가(輓歌)를 부르고 지중해를 흔들어 평화의 꿈을 깨쳐 어지럽게 하며 새 시대의 오는 앞길을 여는 사나운 서풍을 향해 노래를 하다, 외치다 못해, “사나운 영아 네가 나려무나!/나를 일으켜 주려무나!/잎새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엎어졌노라./너처럼 그렇게 날쌔고 그렇게 뻣뻣하고 자랑하던 내가…”하여 울음으로 다투어가며 애타는 기도를 하는 셸리는 저 자신이 이 나를 몇 번이나 엎어진 데서 일으켜 주었는지 모른다.

일제시대의 그 내리누르는 압박 밑에서 숨이 막히려 할 때에도 황성산 푸른 솔잎을 흔들고 오는 그 서풍은 내 코를 뚫어 새 숨을 넣어 주었고 해방 후 공산주의 그 살벌한 포악 앞에서 사지가 움츠려지려 할 때에도 몽고 사막 만주 벌판을 쓸고 압록강으르 건너오는 그 서풍은 내 가슴에 새 피를 돌리어 한 몸을 버티고 걸어 나갈 수 있게 해주었으며, 6·25전쟁에 낙동강 썩은 물가에 솔피처럼 몰려 슬픈 탄식에 지친 혼이 조는 때에도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 홍해 인도양 황해를 건너 태평양을 단숨에 끊으려고 불어대는 그 서풍은 나를 깨워 흔들어 새날을 바라게 하였다. 그것은 슬플 때의 나의 위로요, 맥날 때의 나의 가다듬어 주는 자요, 내가 터무니없는 잘못을 하고 내 혼이 꺼꾸러질 때 내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길동무요, 내 맘이 둔해질 때 나를 책망해 뒤의 것을 잊고 알 수 없는 앞을 향해 막 더듬어 나가게 하는 “빈 들의 소리”다.>‘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라는 결구로 끝나는 ‘서풍의 노래’를 모르고서야 어찌 함석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함석헌의 ‘기다림의 철학’은 바로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 다름 아니다.

영문과를 졸업한 김동길 박사로 하여금 찬사를 불사케 한 함석헌 번역의 ‘서풍의 노래’는 전집 5권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지금껏 나에게 무한한 기다림의 삶을 되씹게 하는 그 사건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논산훈련소에서 대전의 63 육군병원으로 이송되고 그곳에서 의병제대로 나의 군대생활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몇 달간의 군대생활은 시간으로 따지면 미미할지 모르나 나의 삶의 경험으로 말하면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귀중한 체험으로, 그리고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해방 직후 ‘국립서울대학교 안’ 반대투쟁하다가 두서너 달의 형무소 생활을 경험한 삶이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듯이.

평생 교사이기를 바랐던 시절

나는 다시 천안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복직됐고 천안중앙장로교회의 집사로 되돌아 왔다.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또 다른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평생을 고등학교 교사로 보내겠다는 각오랄까 여하튼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꼬집어서 이렇데 할 이유는 없었지만 천안농고로 부임해서 그 다음해에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학생이 십여명에 이르렀고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의 영어공부반에 열심히 참석하던 학생들이었다. 그 당시에 개봉됐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여배우가 주연하는 ‘랩소디’라는 영화에서 얻은 감명도 나의 그러한 결심을 굳히는데 한 몫을 한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야기 줄거리야 한 여인을 둘러 싼 삼각관계의 흔한 줄거리지만 나의 눈에 잡힌 사람은 주인공이나 조역들이 아니라 단역에 불과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첫 번째 애인과 두 번째 애인을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로 만들어서 무대에 세워 놓고 만석을 이룬 청중들의 박수 갈채를 받을 때 무대 뒤에 숨어서 그야말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용히 박수를 치고 있는 노음학교수의 모습이 나에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인생의 무대 뒤에서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자기가 길러 놓은 제자들의 성공을 빌며 또한 그들의 성공을 숨어서 기뻐하는 그 늙은이의 모습을 바로 나의 장래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출교가 삶의 전환으로

그런데 나의 이와 같은 소원은 일년이 못가서 꺾이고 말았다. 그때까지 천안농업고등학교 교사가 나의 직업이라면 직업이었지만 나의 생활은 천안중앙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출교(黜敎)를 당하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표면적 이유는 이단이요 적그리스도인 무교회주의자 함석헌을 추종하는 김용준 집사 역시 이단이요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천안중앙교회의 목사님은 성경을 원어로 읽을 만큼 말하자면 실력파에 속하는 분이었다. 내가 이끄는 성려회는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충분히 세력화돼 있는 집단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어떻든 나는 당시 주일학교 선생은 학교 성적이 평균 80점 이상이래야 하고 찬양대원은 성적이 75점 이상이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나의 주장과 학교 성적이 형편없는 학생이 신학교 가겠다고 할 때 하나님은 너같은 열등생을 목사로 키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라는 이유로 소견서 쓰기를 거부한 일 등등이 목사님의 비위를 거슬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근본적 이유는 교회 안의 세력다툼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여하튼 나는 교회에서 출교 당했고 그때까지 나의 삶의 중심이었던 교회를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나 자신은 심리적으로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틀림없었다. 물론 천안농업고등학교 교사라는 직장에 그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몰아닥치는 일종의 허탈상태를 감당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의욕을 잃었다고나 할까. 결국 나는 천안농업고등학교를 떠나고 만다. 3년 전 이 학교에 부임할 때 같이 입학했고 그때 맡았던 담임반 학생들이 이제는 졸업반이었고 여전히 나는 그들의 담임선생이었는데 그들을 졸업시키지 못하고 나는 천안을 떠나고 만다.

함 선생님께서 퀘이커가 되신 다음에 쓰신 유명한 글이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이다. 영문으로 번역까지 된 명문이며 말하자면 선생님의 간략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이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평생을 바치겠다고 맘속깊이 다짐했었던 천안농고를 그만두고 3년 전에 역시 허탈감에 빠져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던 나의 모교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의 무급조교로 취직 아닌 취직을 하게 된 것을 감히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그렇게 됐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 떨리기도 하지만 선생님께서 사람의 일만 아니라 생명의 전 과정이 교육이고 교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이라고 하신 말씀을 힘입는다면 나도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고등학교를 떠나 대학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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