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듯이 ‘不貞한 미녀들(벨 앵피델)’이라는 표현은 유려하긴 하지만 원작에 충실하지 못한 번역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다. 이 말은 17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번역가 페로 다블랑쿠르의 번역을 놓고 동시대의 비평가 질 메나주가 여자에 빗대어, “그가 한 번역들은 내가 투르에서 아꼈던 한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 아름답긴 했지만 정숙하지는 못했던 여자였다”라고 지적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무냉은 번역사를 관류하는 직역과 의역의 대립을 짚어내기 위해 ‘채색유리’와 ‘투명유리’라는 독특한 비유를 동원한다. 무냉이 말하는 투명유리는 텍스트가 처음부터 번역어로 집필된 것처럼 보이도록 외국작품의 낯섦을 지우고 번역문의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방식을 뜻한다. 무냉이 의역을 투명유리에 연결시킨 까닭은 러시아의 문호 고골이 생각했던 이상적 번역가의 모습, 즉 너무나 투명한 나머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불가시적 존재로서의 번역가의 모습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반면 채색유리란, 낯선 풍토에서 낯선 언어로 착상하고 집필된 책의 번역본이라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독자가 잊지 않도록 원작의 낯섦을 그대로 보존하는 번역 방식, 즉 직역을 뜻한다. 채색유리를 통해 외부 풍경을 볼 때처럼, 독자는 원작과 번역본 사이에 낀 번역자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번역학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그리고 가장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직역과 의역의 대립을 다루면서 무냉은 그 중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에, 각 입장의 연원과 맥락을 그 담론의 내부에서 추적하며, 부정한 미녀와 정숙한 추녀 사이에서 고민했던 번역가들이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원했던 현실적 방법론을 분석한다. 서문을 쓴 미셸 발라르와 리벤 뒬스트가 이 책을 “논리적이고 연대기적인 연속성 속에서 번역 방법과 번역관을 이해하려 애쓴, 나름의 폭을 갖춘 프랑스 최초의 역사적 시도”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 프랑스 번역학의 출발점
번역의 역사는 길지만 번역학의 역사는 결코 길지 않다. 번역학은 현재 인문학 중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신생 연구 분야로 주목받고 있지만, 20세기 후반 독립학문으로 인정받기 전까지 아주 오랜 기간 번역학은 응용언어학이나 비교문학의 하위 범주 정도로 취급돼 왔다. 조르주 무냉은 그 초라했던 시작, 번역학과 언어학의 동맹과 균열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이론가들 중의 하나다.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듯, 현대 프랑스 번역학은 무냉으로부터 출발한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몇몇 고전을 제외하면, 프랑스 번역 관련 이론서로는 무냉의 박사학위논문인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1963)이 유일했다. 무냉이 박사논문을 쓰던 당시, 주류 언어학은 1950년대부터 인문학의 전 분야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구조주의와, 1957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변형생성이론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언어학이 주도하던 당시의 학문적 풍경 속에서 언어학 이외에는 달리 번역을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통로를 알지 못했던 무냉은 일반언어학, 특히 구조주의에 입각해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들에 접근한다. 경험론에 의존했던 과거의 번역론과 단절하고 과학적 입장에서 번역의 문제에 접근한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은 프랑스 번역학의 탄생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 됐지만, 그러나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에서의 논의는 본격적인 번역 이론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채 일반언어학의 수준에 머무른 측면이 있다.
반면, 그보다 8년 전에 발간된 『부정한 미녀들』(1955)은 무냉이 아직 언어학의 세례를 받기 이전에 집필한 책이다. 『부정한 미녀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나 이론적 엄밀성으로나 4년간의 치밀한 준비 작업 끝에 출간된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과는 비교될 수 없는 글이다. 그러나 이 작은 책자가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꽤나 날선 비판을 감행했던 현대의 번역학자들에게서마저 “모든 번역학 서지에서 빠져서는 안 될 필독서”(라드미랄), “진정한 의미에서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들에 가장 명확한 방식으로 접근한 책”(페르니에)이라는 호평을 듣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두 책의 결정적 차이점은 번역의 문제에 접근하는 입장의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의 무냉이 추상적인 랑그의 차원에서 번역을 바라봤다면, 『부정한 미녀들』의 무냉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가진 텍스트의 차원에서 번역의 문제를 조명한다. 또한 『부정한 미녀들』의 무냉은 언어학자로서의 무냉이 아닌, 문학 번역가, 번역 비평가, 번역본 독자로서의 무냉이다.
『부정한 미녀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번역을 위한 변명’이다. 바벨탑 이후의 모든 문명의 역사가 번역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유구한 번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이론적 가능성을 의심하는 고집스러운 회의론이 좀처럼 꺾이지 않는 기이한 풍조에 대항해, 무냉은 “번역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를 바라는 이 유구한 전통의 연원과 동기들”을 파헤쳐 나간다. 그는 우선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16세기 시인 조아생 뒤 벨레가 내세운 反번역론의 논쟁적, 역사적, 이론적 논거들을 점검하고(제1장), 뒤 벨레가 내세운 논거들을 의미론, 형태론, 음성론, 문체론의 네 분야로 세분해 검토하며(제2장), 각 분야에서 도출된 논거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방식을 택한다.
무냉으로 돌아가기, 무냉을 넘어서기
일단 번역의 이론적 가능성을 입증한 다음, 무냉은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3장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서 고대로부터 20세기까지 다양한 번역방법을 검토하며 번역가들의 역사를 기술한다. 키케로에서부터 출발해 아미요를 거쳐 발레리 라르보에 이르는 번역가들의 귀중한 ‘증언’은 『부정한 미녀들』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질료다. 『부정한 미녀들』은 훗날 『번역의 이론적 문제점』에서 부정당할, 번역의 역사성을 중시하는 飜譯史家로서 무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책이다. 1963년 언어학자로서의 무냉은 시대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한계 속에서 우리는 그를 사로잡고 있던 문제들, 그리고 번역학을 학문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그가 부딪치고 넘어서야 했던 난관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라드미랄의 적절한 표현처럼, 현대 번역학이 ‘무냉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은 그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인 동시에 그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선영아 한국방송통신대·불어불문학과
필자는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ESIT)에서 번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발자크의 『인생의 첫출발』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를 프랑스어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