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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에서 '서양의 바깥'은 어떤 존재여야 할까?
서양 철학에서 '서양의 바깥'은 어떤 존재여야 할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3.09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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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2_ 6강.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오늘의 사상의 흐름: 현대 철학사를 보는 몇 가지 관점’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강연의 핵심은 우리시대의 고전읽기다. 고전은 동서고금의 문제적 저작이므로, 이를 새롭게 명명하고 읽어내기 위해서는 이들 고전의 토대를 면밀히 응시할 필요가 있다. 시즌2 강연이 개별 강연에 앞서‘고전 개론’으로 여섯 개의 강연을 배치한 것도 이와 관련된다. 이슬람 문명, 오늘의 사상의 흐름, 그리고 문화 연구와 문학 연구 등의 개론은 새로운 고전의 탄생과 현대적 접근을 위한 전략적 배치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제4대학(소르본)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고등과학원 초학제독립연구단 연구책임자, 계간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 등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문화, 정체성, 차이』(공저·2014),『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2012),『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2002),『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2000),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1999),『 매체의 철학』(1998),『 해체론 시대의 철학』(1998) 등이 있고 엮은 책으로『라캉의 재탄생』(2002) 등이, 옮긴 책으로『헤겔의 정신현상학』(공역), 『차이와 반복』(2004) 등이 있다.
이날 강연에서 김 교수는‘서양적 사유의 바깥과 기원’까지 짚어내면서, 서구도 동양도 넘어선 제3의‘잉여지대 사상사’의 가능성을 주문했다. 다음은 강연 주요 내용이다.
-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지난해 '문화의 안과 밖' 시즌1 24강 강연중인 김상환 교수

서양 철학은 여전히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된 동서분기의 흐름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는 서양의 해체론이 그토록 찾던 바깥은 역시 서양의 지리적 바깥에서부터, 다시 말해 동양의 어디에선가부터 모색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학사를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고전적인 사례는 철학사 연구와 철학적 탐구를 구별하지 않는 저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서양에서는 헤겔,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 들뢰즈, 바디우 등을 좋은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동양, 특히 한국에서 사례를 찾자면 박동환의 3표론을 들 수 있다. 이런 관점들 중 몇몇을 돌아보면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사의 관점을 다듬어 나가 보도록 하자.

데카르트와 헤겔: 서양 근대철학의 출발점에는 데카르트가, 종착점에는 헤겔이 있다. 처음과 끝의 두 철학자는 철학사를 보는 관점에서도 명료한 대비를 이룬다. 데카르트는 박학 대신 양식을, 역사적 기억 대신 본유 관념을 신뢰한 철학자다. 그러나 헤겔에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다. 헤겔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시대, 다시 말해서 주체 내부에서 보편자를 찾는 주관적 이상주의의 시대를 완성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시대를 예고한다.

헤겔과 니체: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사물의 존재이자 바탕인 역사성이 무-바탕(Abgrund)으로 반전되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때 무-바탕은 바탕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근거이되 충족이유율을 초과한다는 것을, 예측 불가능한 우연에 열려 있다는 것을, 따라서 중심이 복수화한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현대 유럽 사상사는 존재=역사성=무-바탕이라는 니체적 삼위일체를 겨우 벗어나는 중이다. 그러나 니체적 반전이 있으려면 먼저 헤겔적 반전이 있어야 했다. 니체의 삼위일체는 존재=역사성=바탕이라는 헤겔적 삼위일체의 변형이다. 두 철학자는 사물의 존재가 역사성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본 점에서 다르지 않다. 다만 역사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점에서만 다르다. 이것은 체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와 같다. 니체는 헤겔이 열어놓은 시대에 속한다.

헤겔-하이데거의 관점: 일몰 이후 서양 혹은 세계의 밤

그러므로 헤겔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헤겔은 역사를, 특히 철학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아마 두 가지 테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철학사를 철학 체계 자체와 구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동일성의 테제)이다. 다른 하나는 철학체계의 완성과 더불어 철학사가 종말에 도달했다는 것(종언의 테제)이다. 두 가지 테제를 차례로 검토해보자.

철학사와 철학의 동일성: 헤겔의 관점에서 철학사는 현재와 무관한 이론들의 우연한 집적이 아니다. 철학사에 등장하던 이론들은 여전히 현재의 철학 속에 지양된 형태로 보존된다. 이론들이 등장하던 역사적 순서(뮈토스)는 참된 철학의 내용이 구성되는 논리적 순서(로고스) 자체에 해당한다. “철학사 연구는 철학의 연구 자체다”라는 테제가 성립한다. 이때 연구란 어떤 내면화하는 기억(er-inner-en), 반추하는 회상이다. 이런 사유의 이념은 20세기 유럽 철학에서 한편으로는 해석학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철학사 해체론을 통해 훨씬 더 과격화된다. 그러나 20세기 철학사 해체론이 과격화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철학사와 관련된 헤겔의 두 번째 테제, 종언의 테제다.

종언의 주제: 헤겔은 정신을 태양에, 정신의 역사를 해의 궤적에 비유했다. 헤겔의 역사가 정신의 역사라면, 하이데거의 역사는 존재의 역사(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의 자기 후퇴 및 은폐의 역사=존재 망각의 역사=형이상학의 역사)다. 헤겔-하이데거적인 종언의 주제가 서양철학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는 선도적인 주제로 거듭나는 것은 레비나스, 푸코,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 등과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에 의해서다. 이들은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국한됐던 종언의 주제를 다른 문제와 관련지었다. 이른바 탈근대 담론이 시작된 것이다.

들뢰즈-바디우의 관점: 역사와 사건의 구별, 그리고 철학의 재개

당대의 철학을 백일몽에서 깨어나게 한 것은 이미 깊숙이 진행된 세계화가 지구 곳곳에 초래한 경제적 엘니뇨 현상이었다. 예측하기 어려운 자본의 쏠림은 여기저기 금융 위기와 경기 침체를 초래하면서 지구촌을 뒤흔들었다. 다만 현실의 지각 변동과 더불어 과거의 헤겔-하이데거식 역사 도식도, 그 도식에 기댄 종말론적 담론들도 모두 깨져버리게 됐다는 점만 다시 기억하도록 하자. 이제 정신의 역사나 철학사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새롭게 구축돼야 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해 각별한 시선을 끈 철학자로는 들뢰즈와 바디우가 있다. 이들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헤겔-하이데거의 세계사 도식을 대체할 후보로 평가될 수 있다. 하나는 현실의 역사적 변화를 주도하는 세계화의 물결에 대처할 철학적 시선을 제시한다는 점이다.들뢰즈는 과타리와 함께 해체론적 전통(니체, 하이데거, 데리다)의 전유물로 간주했던‘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도전해 철학사를 바라보는 신선한 관점을 구축했다. 바디우 역시 현대 서양철학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재구성하는 가운데 종언의 주제에 붙들려 답보 상태에 빠진 듯한 서양철학에 강력한 충격을 던졌다. 들뢰즈와 바디우는 개념의 창조와 체계의 구축이라는 고전적인 철학의 개념을 되살리면서, 그리고 각기 독창적인 사건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새로운 철학적 담론의 방향을 열어갔다.

지리철학의 관점: 현대 사조의 국가별 지형

역사와 지리: 바디우는 시적인 조건에 함몰해 있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서양 현대 철학 일반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새로운 관점에 도달한다. 프랑스의 차이의 철학뿐만 아니라 독일의 해석학적 전통과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이 함께 붙들려 있는 지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의미가 대립하는 지점인데, 다음과 같다.

현대 철학에는 세 가지 주요한 흐름이 있다. 이것은 세 가지 지리학적 위치(국가)에 상응한다. 독일 낭만주의에서 발원하는 해석학적 전통(하이데거, 가다머),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됐지만 영미 제도권 철학을 석권한 분석철학적 전통(비트겐슈타인, 비엔나 학파), 프랑스에서 시작돼 스페인, 이탈리아,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확산한 탈근대 철학(데리다, 리오타르)이 그것이다. 독일의 해석학적 전통은 성서해석(유-무한의 변증법적 담론) 전통과 밀착돼 있다. 영미의 분석철학은 자연과학에 고착돼 있다. 프랑스의 탈근대 철학은 예술과 공모하는 가운데(그리고 구조주의 인간 과학과 맞물려) 차이의 철학을 도모한다.

해석학적 전통에서 철학의 목적은 의미를 해석하는 데 있다. 다른 한편 분석철학적 전통에서 철학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정한다. 마지막으로 차이의 철학에서는 19세기에 성취된 위대한 철학적 건축술이 해체된다. 주체, 체계, 진보, 혁명 등의 이념은 무효화되고, 거대담론을 대신해 미시담론이 들어선다. 중심은 복수화되고, 언어는 다의성을 띠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존중이라는 새로운 윤리학이 계획된다.

철학극장: 철학의 분신들과 윤리학의 과잉

그렇다면, 현대 서양 철학 역시 지리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디우는 최근의 저작에서 현대철학을 소피스트 담론, 반-철학, 세속 철학으로 대별했다. 소피스트 담론과 반-철학은 서로 겹치는 측면이 있지만, 사건의 철학을 기준으로 할 때 서로 다른 차원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즉 사건의 철학과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소피스트 담론이라면, 사건의 철학보다 상위의 차원으로 향하는 것이 반-철학이다. 반면 세속 철학은 문명과 역사가 자리한 하위의 차원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사조와 구별된다.

윤리의 과잉과 그 흐름: 철학의 안팎에서 윤리적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는 것은 오늘날 세속이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을 교차하는 가운데 균형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흐름은 세계화로 통칭하는 단일화의 흐름이다. 다른 하나는 문화적 다양성의 분출이다. 획일화와 다양화라는 두 가지 상반된 추세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은 무엇보다 윤리다. 오히려 위기의 원인은 바디우가 강조하는 것처럼 ‘윤리의 인플레이션’에 있다. 그렇다면 그토록 다양한 윤리적 목소리는 어떻게 정리해 볼 수 있는가. 영미권의 대학은 세 가지 윤리적 논쟁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는 의무의 윤리학과 덕의 윤리학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이다. 이것은 칸트 윤리학(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과 부활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이의 논쟁이다. 다른 한편 개인주의 윤리학과 공동체주의 윤리학 사이의 논쟁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보편주의와 상대주의(문화적 다원주의)의 논쟁도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잔여가 있는 풍경: 철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신학적 차원으로 이행하는 반-철학적 담론은 지식의 영역과 믿음의 영역을 나누는 (그러나 동시에 연결하는) 어떤 잔여 앞에서 펼쳐진다. 잔여는 합리적 논증(지식)이 끝나고 순수한 靜觀이나 계시(믿음)가 시작되는 출구이기도 하고, 실재의 세계가 현상의 세계나 상징(언어)의 세계로 역류하는 입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대의 중요 철학 대부분을 이런 잔여의 개념을 중심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이는 데리다나 바디우 혹은 레비나스, 슬라보예 지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독창적인 철학자로서 인정받는 이유는 결정적으로 문제의 잔여에 해당하는 것을 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견하거나 설명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바디우의 분류법에 따른다면, 바디우를 포함한 현대 철학자 대부분은 철학에 속한다기보다 반-철학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양적 사유의 기원과 그 바깥: 다시 정향의 문제로

세계화의 아침과 서양의 바깥: 서양 철학은 협소한 인식론을 넘자마자 반-철학의 양상을 띤다. 그리고 반-철학의 양상을 띠자마자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윤리적 형식에 의해 구조화된 사유를 펼쳐간다. 그 형식은 두 차원(이편과 저편)의 교차와 거기서 남는 잔여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호명의 변증법 속에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 등이 찾던 서양적 사유의 바깥이 여전히 서양적 사유의 울타리에 속한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이는 헤겔적 일몰 이후 하이데거가 바라보는 세계의 밤이 여전히 서쪽(서쪽의 서쪽)에 속한다는 것과 같다.

바디우의 용어로 하면, 그 안과 바깥의 차이는 철학(이성)과 반-철학(믿음)의 차이에 불과하다. 양자는 어떤 변증법 속에서 이중화와 이분화를 반복한다. 그런데 지젝에 이르러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세계의 밤이 쾌락원칙과 그 너머의 사이, 생명과 죽음 사이, 다시 말해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의 세계로 변질되는 사건이다. 이것은 서양적 사유가 호명의 변증법에서 막 벗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라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는 좀 더 추이를 지켜본 이후에 대답하기로 하자. 지금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만 이것이다. 즉 첨단의 서양 철학에서마저 서양의 바깥은 헤겔-하이데거의 세계사 도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철학의 바깥으로 방치되고 있다. 서양 철학은 여전히 기원전 4세기에 시작된 동서분기의 흐름을 떠나지 않고 있다. 세계화와 더불어 동서 합류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외면되고 있다. 이는 서양의 해체론이 그토록 찾던 바깥은 역시 서양의 지리적 바깥에서부터, 다시 말해서 동양의 어디에선가부터 모색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유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정향의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특히 동서합류의 물꼬를 튼 세계화는 오늘의 철학에 대해 정향의 문제를 절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 난해한 문제는 어쩌면 동서의 보편자가 상호 교차, 순화되는 가운데 어떤 제3의 보편성이 분만될 때야 겨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박동환의 3표론과 같이 동양의 사상사(제1표)와 서양의 사상사(제2표)뿐만 아니라 동서의 바깥에 해당하는 잉여지대 사상사의 가능성(제3표)을 하나의 평면에 구성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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