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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의 자리
학자들의 자리
  • 윤영휘 광주대 학술연구교수·역사학
  • 승인 2015.03.09 11:3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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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윤영휘 광주대 학술연구교수·역사학

"효율성의 논리로 미래가 불안한 비정규직 자리로만 젊은 학자들을 몰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구비되면 좋겠다."

필자가 학문을 하는 이유를 되새기고 싶을 때 보곤 하는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데이비드 커닝햄 감독의 영화「To end all wars」다. 이 영화는 프린스턴대의 교목이었던 어네스트 고든(Ernest Gordon)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고든은 에든버러대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입대해 미얀마 전선에 투입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혀 악명 높았던 인도·미얀마 철도 건설 현장의 수용소에 수감됐다. 포로수용소 안에서 그가 경험한 것은 인간성의 말살이었다. 영국 포로들은 아침마다 일본 천황에게 절을 해야 했고, 일본군들에게 종처럼 인사를 해야 했으며, 죽을 조금 더 먹기 위해 전우들끼리 죽고 죽이는 인간이하의 존재로 전락해야 했다. 살기 위해 일본군에게 굽실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땅에 떨어진 죽을 핥아 먹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은 희망을 잃어간다.

인간성이 사라지고 희망을 잃어가던 이 순간에 포로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허기를 면할 식량? 저항할 무기? 연합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삶의 의미’였다. 인간 이하의 생활 속에서 자신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던 고든에게 하루는 친구들이 찾아와 철학을 강의해달라고 부탁한다. 우리가 이런 상황 속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인간이 정말 가치가 있는지, 우리가 산다는 것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든은 플라톤의 정의론에 관한 내용부터 강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모임은 점점 더 커져서 문학을 전공한 포로가 셰익스피어의 시를 강독하고, 군목 출신 포로는 복음서를 강해하는‘정글대학’으로 발전한다. 이‘정글대학’에서 인간의 가치를 강의하면서 고든은 자신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됐고 그의 동료들 또한 삶의 목적과 의미를 깨달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본군도 포로들을 달리 볼 수밖에 없었다. 포로들은 동료에게 음식을 양보하고, 일을 대신해주며, 심지어는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동료대신 자신을 벌해 달라고 나서기까지 한다. 일본군은 이런 예상치 못한 모습에 곤혹스러워 할 뿐이었다.

마침내 포로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됐다. 한 일본인 간수는 자신에게 모진 고초를 당했음에도 자기를 용서하고 도망가게 해주는 고든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 악명 높았던 간수를 진정 굴복시킨 것은 무력도 무기도 아닌,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고매한 인간성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대기업뿐 아니라 대학도 경쟁성과 효율성이라는 잣대에 맞춰 시장성이 떨어지는 학문에 대한 통폐합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력 없어 보이는 인문학의 입지는 계속 좁아지고 있으며, 그것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미래 또한 불안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이런 학문들은 여전히 인간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문학은 다시 말하면‘인간됨에 대한 학문’이다. 인간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영원적인 추구와 갈망이 있을진대, 그것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학문의 가치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 선배 인문학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익을 만드는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아마도 많은 학자들이 이런 마음으로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연구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효율성의 논리로 미래가 불안한 비정규직의 자리로만 젊은 학자들을 몰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구비되면 좋겠다. 교양교육을 담당할 최소한의 전임교원 수를 유지하도록 법으로 보장하는 것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를 향해 무언가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만 존중받을 수 있어도 좀 더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꼭 전쟁상태까지 가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누가 가르치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윤영휘 광주대 학술연구교수·역사학

영국 워릭(Warwick)대에서 서양근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교회사협회의 최우수 논문상 중 하나인‘Sydney Mead Prize’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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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식 2015-03-25 12: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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