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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생' 연구자와 대학사회
'취준생' 연구자와 대학사회
  • 소영현 연세대 국학연구원·문학평론가
  • 승인 2015.02.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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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소영현 연세대 국학연구원·문학평론가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을 부제로 한 오찬호의『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 2013)는 홍상수의 영화처럼 피하고 싶은 불편함을 야기한다. 그 불편함은 숨기고 싶은 진실을 대면하는 데서 생겨난다. 오찬호의 책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유지되는 사회적 차별을 사실상 우리가 용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일상을 유지하거나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묻는다. 그의 폭로 앞에서 우리는 겹의 기만성이 발가벗겨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왜 우리인가.

오찬호는 2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일상을 지탱하게 하는 인식의 지반 같은 것을 가시화한다. 근대 이후로 20세기를 이끌어온 청년은 어떻게 차별과 해고를 정당하게 여기게 된 것일까. 오찬호는 학벌주의보다 미시화된 기형적 차별화 논리(학력위계주의)가 학력과 학벌의 위계를 보다 세분화하고 강고하게 만든다는 점을 아프게 지적한다. 한국의 학벌이 만들어내는 위계의 피해를 역설하면서도 그 피해로부터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위계의 사다리를 거슬러 오르는 일이라는 인식이 20대를 출구 없는 쳇바퀴 속의 다람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찬호의 이런 판단은 새삼스럽지 않다. 출구 없는 자기계발 메커니즘의 일부가 되는 것, 그것이 자기계발 논리의 제어되지 않는 자생적 동력이라는 점을 고려하자면, 청년들이 차별화의 기수가 된 사정에 대해 우리가 이미 알만큼은 안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신자유주의가 20대 청년들을 차별화의 화신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기만 하다고 해도 좋은가.

앞서 오찬호의 폭로가‘우리의 불편함’을 야기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차별에 찬성하는’20대들이 어디로부터 왔느냐에 관한 질문은 20대라는 특정 세대의 것으로 한정되거나 신자유주의에로 돌려져서 두루뭉술하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사회의 현재를 만들어낸‘우리’혹은 기성세대에게 물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을 지냈던 채현국 선생(1935~)이 보여준 노인세대의 성찰이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오늘날 거의 발견하기 어려운 기성세대의 어떤 고백, ‘부끄러움’으로 불려 마땅할 그런 고백과 만나서다. 최근 이른바‘386세대’로 불렸던 이들 다수가 출간한 고백서사가 역사적 자기 정당화의 혐의를 벗기 어려운 경향과는 꽤 대조적이기도 하다.

선생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가 청년 세대나 신자유주의로만 돌려질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축조의 일원이거나 이렇게 만들어지도록 방관한‘우리’의 자기성찰뿐 아니라‘우리’에 대한 청년 세대의 철저한 비판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와 관련해, 오찬호의 연구가 대학생을 표본집단으로 한 것임은 좀 더 강조되어야 할 문제인지 모른다. 한국사회와 기성세대 일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학벌주의 혹은 미시화된 기형적 차별화 논리(학력위계주의)는 엄밀하게는 대학사회를 통해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마련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학사회 내의 차별적 위계는 학력위계주의의 다른 일면이자 프랙탈(fractal) 구조로서 반복되는 학력위계주의의 다른 버전이다.

성적에 따른 위계화가 분명할 학과별 위계화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 내부에도 세분화된 미시적 위계화가 존재한다. 정교수로부터 시간강사에 이르는 이 위계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법이나 학습 내용과는 관련이 많지 않을 것인데, 고등교육의 문제로만 한정해 보더라도 위계의 결과와 폐해에 대한 비판에 폭넓게 동의하면서도, 내부의 일원들 또한 위계가 그 위계의 사다리를 거슬러 오르는 일로만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이 대학생을‘취준생(취업주준비생)’으로 만드는 것과 똑같이 연구자를‘취준생’으로 내몬다. 대학생의 스펙경쟁이 그러하듯, 연구는 곧 취업을 향한 수월성 확보와 업적 축적으로 치환된다.

우리의 오해와 달리‘스펙경쟁’은 이러한 위계사회의 일면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시작됐다. 대학별 순위로 위계화된 차별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평가의 공정성’을 요청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평가의 공정성’이 불러온 것이 바로 ‘스펙경쟁’이다. ‘평가의 공정성’이라는 유의미한 취지가 무색하게 평가 기준의 수량화가 순식간에 야기됐는데, 애초에 이것은‘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요청이 불러온 사태였다. 알다시피 오늘날‘취준생’은 과도기적 통과의례가 아니라 미래의 삶 전체를‘스펙쌓기’블랙홀로 밀어 넣으며 현재도 미래도 없는 연명의 삶을 산다.

대학에서 차별에 찬성하는 학생을 만날 수 있다면, 대학사회에서는 차별에 찬성하는 인식을 교육하는 현장을 만날 수 있다. 학생뿐 아니라 연구자를‘취준생’으로 내모는 대학사회가 문제의 근원지다.

소영현 연세대 국학연구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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