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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셔널 아카이브, 그 시스템이 말해주는 것들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 그 시스템이 말해주는 것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2.10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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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_ 『대통령의 욕조: 국가는 무엇을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가』 이흥환 지음|삼인|383쪽|18,000원

▲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 ‘독립헌장’ 홀 내부에서 자유롭게 문서를 열람하고 있는 시민들.

최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의 활동을 담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출간해 화제가 되고 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전임 대통령의 회고록은 현실 정치에 풍파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직전 전임 대통령의 회고록이 흔치 않은 우리 풍경에서 그의 회고록은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오래도록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하나 곱씹어볼 주제는 퇴임 대통령이 열람했다는 ‘국가기록’ 문제다. 도대체 국가기록이란 무엇인가. 이와 관련 미국 워싱턴 KISON의 선임편집위원으로 있는 이흥환이 쓴 『대통령의 욕조』(삼인 刊)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국가기록 문제를 환기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로 읽힐 수 있다.


저자 이흥환은 국가 기록을 두고 ‘학술 연구의 대상이 돼야 마땅한 주제’라고 말한다. 그의 책은, 그가 안방 드나들 듯 찾았던 미국 국가 문서 창고인 내셔널 아카이브(National Archives)를 직접적인 소재로 한 이야기다. 잘 알려져 있듯, 미 연방정부 기록물 창고인 이 아카이브는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 즉, 시스템이다. ‘Archives’라고 복수로 쓴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몇몇 지도자들은 기록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거대한 대리석 조형물이나 화려한 청동상 대신 돌보다 가볍고 청동보다 약한 종이를 영구적인 국가 기념물로 택했다. 문서를 남기기로 한 것이다. 문서고에 가둬 놓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풀어 놓는 편이 더 안전하고 힘이 강해진다는, 아무나 깨닫기 힘든 기록물의 비밀스러운 속성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가 기록의 진짜 소유주가 누구인지 깨닫고 주인에게 문서의 소유권을 넘긴 일이야말로 그들이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이흥환에 의하면, 미국의 국가 기록 시스템은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 기록과 보관, 공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가 빠져나가는 순간 국가 기록이라는 시스템은 무너지고 만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국가 기록물의 범주가 어디까지이며, 기록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고, 그 기록물을 가진 자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준다. 어디까지 기록할 수 있고, 어떤 것까지 보관하며, 얼마만큼이나 공개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국가기록’을 바탕으로 회고록을 펴낸 전임 대통령의 행보로 떠들썩한 우리에게 미국의 대통령실록 관련 부분은 확실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 도서관이 그 실록을 보관하는 史庫 역할을 하는데, 이 도서관은 대통령이 자기 돈으로 지어 국가에 헌납하고 정부가 세금으로 운영한다. ‘대통령 도서관’이라는 것을 갖고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저자는 그래서 미국의 정권교체가 바로 이 백악관의 대통령 문서 이관에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셔널 아카이브에 보관된 문서의 양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일단, 시스템으로서의 이 아카이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세 개의 시스템으로 가동한다. 본부 구실을 하는 아카이브 Ⅰ과 메릴랜드 주 칼리지 파크의 아카이브 Ⅱ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다음은 대통령 도서관들이다. 전국 열세 곳의 도서관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여 있다. 또 하나는 미 전역 열일곱 곳에 있는 연방기록물센터(FRC, Federal Records Center)라는 시스템이다.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국립인사기록물센터(NPRC, National Personnel Records Center) 등 산하 문서고들도 내셔널 아카이브의 식구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아카이브 Ⅰ, Ⅱ와 대통령 도서관, 연방기록물센터 FRC가 아카이브의 주요 시스템이다.


아카이브 Ⅰ, Ⅱ에 소장돼 있는 문서는 대략 90억 장 정도다. 정확하지도 않고, 정확할 수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400개가 넘는 연방정부 기관이 하루에 억 단위의 문서를 생산해 내고 있고, 아카이브 문서고에는 아직 뜯어보지도 못한 문서 상자 속에 2억 장 가량 되는 문서가 아키비스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아카이브에 보관된 문서는 어떤 것들일까. ‘큰’ 문서, ‘작은’ 문서, 100년 전, 200년 전의 문서 등 다양하기 그지없다. 2009년 3월 워싱턴 시내 아카이브 건물에서 ‘BIG!’이라는 주제로 열린 내셔널 아카이브 설립 75주년 기념 전시회가 단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바로 이 전시회에 소개된 두 개의 문서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몸무게가 150킬로그램으로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뚱뚱했고 키도 180센티미터나 됐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백악관에서 사용했던 대형 욕조가 전시돼 있었다. “대통령이 사용했던 100년 전 욕조가 어딘가에 보관돼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욕조 앞에는 엷은 미색의 빛바랜 편지 문서 한 장도 전시됐다. 공문서인 이 편지에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이란, △놋쇠 프레임으로 된 초대형 침대 1세트 △초대형 스프링 매트리스(초강력 스프링) 1조 △초대형 베개 1조 △초대형 침대 받침대 △길이 165센티미터에 폭이 아주 넓은 욕조 1개를 말한다. 미 해군 소속 마셜 함장의 자필 서명이 담긴 이 문서가 작성된 날짜는 1908년 12월 21일이다. 대통령이 군함에서 쓸 물품의 제작을 요청하는 주문서였다. 물론, 대통령의 키는 179.7센티미터여서 욕조의 길이는 215센티미터로 수정해서 재주문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내셔널 아카이브가 갖고 있는 수십억 장의 문서 가운데 한 장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수십억분의 1이 이렇게 역사를 풍성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1781년에 만들어진 3.9미터짜리 두루마리 문서로, 바로 미국의 연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이다. 북부 13주가 제정한 미국 최초의 헌법으로 알려진 문서다. “아카이브가 무엇이고 왜 있는지를 말 한마디 없이 100년 된 문서 한 장과 200년 전 문서 한 장을 쓱 꺼내 놓고 보여 준다.”


저자는 한국 관련 문서 59건도 이 책에 소개했다. 내셔널 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문서 가운데 뽑은 것들로, 한국전쟁과 그 이전 또는 그 이후를 기록한 문서들이다. “미국의 문서 창고에서 한국 관련 문서를 열람하기 위해 비싼 여행 경비를 아끼지 않고 내셔널 아카이브를 찾는 연구자도 해가 갈수록 숫자가 는다. 적게는 몇 만 장에서 많게는 200만~300만 장 이상 한국 관련 문서를 수집했거나 지금도 수집 중인 기관이 미국내에 서너 곳이나 되고, 특정 주제의 문서를 수집하는 크고 작은 단체, 기구, 위원회 등도 열 손가락을 넘는다.” 그러나 이런 설명보다 더 절절하게 와닿는 대목은 바로 다음 구절이다. “미국의 한 국립기관이 한국 현대사 연구의 핵심적인 1차 사료 공급처 중 하나로 자리를 굳혀 가는 셈이다. 놀라운 일이라고 혀를 내둘러야 할지, 이제야 제대로 돼 가나 보다 고개를 끄덕거려야 할지, 아니면 어째 이런 부끄러운 일이 다 일어나느냐 혀끝을 차게 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대통령의 회고록 하나에 핏대를 올리기보다는 이참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작업이 역사와 미래를 위해 갖춰져야 할지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게 유익하다는 걸, 이흥환의 책은 말없이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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