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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금관은 한민족 문화 속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났다”
“신라금관은 한민족 문화 속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났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2.03 15: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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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두양문화재단 이사, “신라금관은 ‘용의 뿔(龍角)’형상화” 주장

▲ 사진1. 신라 황남대총금관

신라금관의 기원과 조형적 특징을 밝힌 기존의 諸說들을 보면, 금관의 기본요소는 나뭇가지[樹枝形], 사슴뿔[鹿角形], 曲玉 세 가지이며, 그 기원은 시베리아 샤먼의 巫冠일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러나 임재해 안동대 교수는 이러한 통설을 뒤집어 신라 금관은 5세기 무렵 김씨 왕조의 출현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므로, 김알지 신화와 신라 왕권 성립과정에서 그 기원이 시작된 것이라는 설을 제시했다.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서예학)는 이러한 통설 대신 ‘古東夷族의 태양숭배와 새 숭배사상’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했다(<교수신문> 694호, 2013.7.22.).


『동아세아 역사문화논총』에 「삼국시대 金冠의 再照明」을 발표한 김대환 이사는 이런 시각에서 좀 더 나아가 ‘유물적 근거’를 통해 신라금관의 Y형, 出형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금관에 달린 曲玉의 의미까지 짚어냈다. 고대 사회에서 龍이 차지하는 상징성에 주목한 김 이사는 용을 가리켜 우주만물의 신성한 질서를 상징하는 최고의 동물로 국가의 수호와 왕실의 조상신으로 제왕의 권력을 상징한다고 봤다. 왕실의 건축물이나 제왕의 장신구, 의복, 무기, 마구 등 器物에는 용의 형상을 새겨 넣으며, 龍顔, 龍床, 龍座, 龍袍 등의 용어가 사용된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용의 눈, 코, 입, 귀, 수염은 인간인 제왕의 것으로 모두 대신할 수 있지만, 가장 상징적인 용의 뿔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몸에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의 금관은 용의 신체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이고 인간 스스로는 갖추지 못한 용의 뿔(龍角)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즉, 용의 뿔을 제왕의 머리에 얹으면서 용과 같은 지위의 절대왕권의 권력자가 돼 국가를 통치하고 왕실을 보존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정당화 시켰을 것이다.”이렇게 봤을 때, Y형, 出형의 신라금관 세움 장식은 용의 뿔을 전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현존하는 신라 유물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인 셈이다.


논자는 신라시대와 조선시대 용의 뿔이 다른 점에 깊이 착안했다. 조선시대 용의 뿔은 귀의 위나 뒤쪽에 나란히 두 개가 뻗어나와 한 쌍을 이루지만, 삼국시대부터 대부분 용의 뿔은 양 눈썹의 중간(眉間)에서 하나로 뻗어 나와 두세 갈래로 갈라지며 뻗어나간다. 이는 고려시대의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용의 얼굴이 대부분 측면으로 표현돼서 정면으로 본 용의 얼굴을 간과하기 쉽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신라시대 유물 가운데 용의 얼굴을 정면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유물이 남아 있어, 정면으로 바라본 용의 뿔이 왜 신라금관의 세움 장식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사진2.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금동제용두장식
[사진 2]는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제용두장식으로 한 쌍이며, 의자의 양옆 팔걸이나 등받침 양 끝에 끼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눈썹의 중간에서 한 뿌리로 올라온 뿔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용의 뿔이 미간에서 한줄기로 나와서 갈라지거나 같은 줄기에서 벌어져서 정면에서 보면 Y형상으로 보이는 유물은 이외에도 다수가 있다. 특히 교동출토 금관의 세움 장식과 강원도 양양 진전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용두장식의 뿔을 비교해보면, 바로 신라금관의 세움 장식이 용의 뿔을 형상화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사진 3-1, 3-2].


▲ 사진3-1.경주 교통출토 금관

▲ 사진3-2. 양양 진전사지 출토 금동용두장식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렇게 용을 형상화하거나 용을 주제로 제작한 유물은 왕실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용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특히 왕궁이나 왕실과 관련된 사원건축지에서 출토되는 막새문양에는 정면에서 본 龍面이 잘 나타나므로, 정면에서 본 용의 뿔도 잘 관찰할 수 있다[사진 4].”


그렇다면 용의 뿔을 형상화한 Y형 세움 장식은 어떻게 出형으로 좀 더 형상화된 것일까. 김 이사는 ‘형상화의 진전’으로 이를 설명한다. “앞쪽에는 정면에서 본 용뿔 세움 장식 3점과 뒤에는 측면에서 본 용뿔의 세움 장식 각 1점씩 2점을 배치해 모두 5점의 용뿔 세움 장식을 입체적으로 완성했다”는 것.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유물은 초기 Y형으로 제작된 1단의 교동출토금관, 호림박물관소장금관사진, 3단의 복천동출토 금동관은 모두 측면에서 본 용뿔의 세움 장식은 없고, 정면에서 본 용뿔 세움 장식만 있다. 이후 제작된 出형의 금관에는 모두 정면에서 본 3점의 용뿔 세움 장식과 측면에서 본 2점의 용뿔 세움 장식으로 도합 5점의 세움 장식으로 입체적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 사진4.신라용면 마루기와의 탁본(부분)
이렇게 발전한 신라금관이 出형의 세움 장식에 달린 달개장식 때문에 나뭇잎이 달린 나뭇가지로 오인돼 신라금관의 조형이 북방이고, 측면에서 본 용뿔의 세움 장식은 사슴뿔로 격하시키는 결론에 이른 것이 기존 통설이라는 게 논자의 지적이다. 이런 시각에서 김 이사는 신라금관에 달려 있는 曲玉이 胎兒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용의 뿔을 형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선희, 임재해 교수의 전문적 연구(2008), 그리고 김양동 교수(2013)의 상징해석에 이어 김대환 이사의 ‘용뿔’ 형상화라는 새로운 주장이 학계에 어떻게 자리 잡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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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경 2016-01-06 22:53:10
용뿔이라면 왜 정면 3, 측면 2, 모두 5개나 묘사했을까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부족하지만 제 연구결과를 말씀드리면, 신라금관은 하늘과 조상을 상징하는 불꽃, 나무, 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흔히 出자 모양이라 할 때의 出은 木의 性인 曲直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고요.
그렇다면 왜 하필 지배왕족의 금관에 이런 문양이 보이고, 또 고정적이지 않고 미동에도 흔들리도록 약하게 디자인되어, 햇빛을 받아야 반짝이도록 되어 있는, 그동안 그냥 영락이라고 불러 왔던 '불의 알'들이 그렇게도 많이 달려있는데도 부장용품이라는 오해까지 받았을까요?
바로 '역'의 화풍정(불과 나무)괘 및 풍지관(나무와 땅)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금관 해석의 열쇠는 우리 전통사상인 역과 음양오행사상입니다.
...
그리고 그림1은 금령총금관인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