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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학 둘러싼 제국의 헤게모니는 어떻게 파열됐을까?
지역학 둘러싼 제국의 헤게모니는 어떻게 파열됐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1.27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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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_ 채오병 국민대 교수의 ‘냉전과 지역학’(<사회와 역사>제104집)

미국의 보편적 이념과 그것을 훼손하는 해외에서의 공작과 무력 개입이 지역연구자들로 하여금 그 모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기회를 제공했다면, 정부 및 군부와 학계를 밀접히 연계시키고자 한 시도는 현실 학계의 다원적 정치문화에 의해 좌절된 것이다.

 

한국학에 대한 관심은 ‘동아시아’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 속에서 더욱 체계화 됐다고 볼 수 있는데, 동아시아와 같은 개별 지역 연구를 총칭한다면 아마도 ‘지역학(Area Studies)’이 될 것이다. 이 지역학은 전후 미국에서 발전했다는 발생론적 측면을 안고 있다.
최근 한국사회사학회(회장 한영혜)가 펴낸 학술지 <사회와 역사>통권 제104집(2014년 겨울)에는 이와 관련 한 편의 흥미로운 논문이 실려 있다. ‘동아시아의 냉전체제와 분단의 경계’를 특집으로 내 건 메인논문은 아니지만, 이들을 보조하는 의도로도 읽힐 수 있는 채오병 국민대 교수(사회학)의 「냉전과 지역학: 미국의 헤게모니 프로젝트와 그 파열, 1945-1996」이다.


채 교수는 미국의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육성된 지역학의 탄생을, 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던 사회과학연구협의회(SSRC)의 활동과 국가방위교육법을 통한 연방정부의 기금, 주요 민간재단의 지원을 중심으로 개괄한 다음, 지역연구 분야를 라틴 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 소비에트와 동유럽,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의 여섯 개로 나눠 구체적 전개 양상을 검토했다. 이를 통해 그가 읽어낸 것은 “초기의 냉전적 기조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많은 경우 미국의 냉전 의도와 상충하거나 이에 저항하는 결과로 귀결됐다”는 사실이다. 채 교수는 이 원인을 분석, “무엇보다도 지역학을 둘러싼 미국 헤게모니 프로젝트와 현실의 괴리”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채 교수의 논문 가운데서 ‘제국의 헤게모니와 그 파열’ 부분을 발췌한 글이다.

전후 지역학의 육성을 중심으로 한 지식-권력 체계는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자신을 자리매김하기 위한, 그러기에 ‘아직 완수하지 못한’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는 남아메리카, 소비에트, 동유럽, 중동, 동아시아, 남아사이, 동남아시아 등의 하위범주로 분활됐고, 반공주의와 근대화론이라는 이데올로적 ‘내용’이 채워졌다. 또한 그 ‘형식’에서 지역학은 전지구적으로 급팽창한 탈식민 국민국가를 연구단위로 설정했는데, 이것은 반식민주의적이며 자유무역 제국주의를 지향한 미국의 노선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戰前의 국제질서가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일본 등 식민제국의 영토를 중심으로 상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이제는 냉전구도 속에서 국민국가들이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자연적 범주가 된 것이다. 또한 ‘동유럽’, ‘극동’, ‘동남아시아’ 등의 지역범주는 점차 학문적이고 정치적이며 일상적인 담론에서 상식화되면서 자명한 범주가 됐다.


바로 이러한 범주들의 자연화는 제국의 헤게모니가 부분적으로 성취됐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지역학에서 이 범주들을 공리적으로 받아들인 많은 연구자들이 제국의 이해에 상충하는 연구결과를 생산해냈음을 보았다. 그것은 오히려 그렇게 자연화된 범주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바로 헤게모니가 성취된 곳에서 제국에 대한 비판담론이 개진되는 동시에 ‘헤게모니적 인각’과 ‘이데올로기적 반발’의 과정이 진행된 것이다. 이것은 제국의 주변과 중심의 두 수준에서 발생한 제국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파열에서 잘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제국 외부, 즉 주변에서 발생한 파열이 제국의 모순에서 비롯한 비판적 지역학의 문제의식이 싹트는 데 기여했다면, 제국 내부의 파열은 그 문제의식의 발화를 가능케 해 준 현실적 조건이었다.


첫째, 미국은 제국의 주변에 보편을 수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편에 위배되는 결과를 낳거나, 그 보편을 설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것에 모순되는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저항을 야기했다. 마이클 만은 『모순된 제국』에서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 미국이 직면한 난관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불균등한 제국의 권력 자원, 즉 모순적인 제국의 모습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 글의 주제인 지역학으로 한정할 때, 모순은 이데올로기 및 헤게모니적 실천과 현실의 괴리로 구체화됐다.


사회주의권을 제외한 모든 사례에서 초창기 지역학의 지배 패러다임은 종국에는 미국이라는 보편으로 수렴될 근대화론이었다. 근대화론을 아직 공리화되지 않은 세계관, 즉 이데올로기로 이해한다면, 다수 지역에서 목도된 현실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내용과 거리가 먼 것으로 판명됐다. 남미와 중동, 아프리카에서 정치불안은 지속됐고 계급불평등은 확대됐으며 북남 간 경제적 격차는 벌어졌다. 이러한 인식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과 종속이론, 관료적 권위주의론, 세계체제론에서 예증되는 대안이론에 대한 고민으로 나타났다. 동아시아의 경우에도 미국의 시장합리성과 근대화론보다는 국가의 ‘계획합리성’을 강조하는 발전국가론이 등장했다. 이 이론들은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괴리에서 파생된 저항 이데올로기이자, ‘이단(heterodoxy)’으로서 헤게모니 프로젝트의 파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헤게모니화된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는 적어도 외견상 동등한 주권을 지닌, 그리고 대내적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국민국가를 전제한다. 지역학도 그러한 인식론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헤게모니 혹은 독사의 상태는 인지구조가 외부세계와 일치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헤게모니 프로젝트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정부가 사용한, 정당성이 결여된 물리적 수단의 행사라는 현실은 이 전제를 위반하는 증거였다. 그것은 제국의 헤게모니적 가치와 현실 간의 괴리였고, 여기서 다양한 학문적 대응이 등장한다.


둘째, 제국 내부에서 발전된 지역학의 지식-권력 체제는 근본적으로 탈중심적 학문생산구조에 의존했고, 그 이유로 특정 주체―가령, 정부기구나 SSRC의 헤드쿼터―의 의도는 일사불란하게 관철될 수 없었다. 지역학 초창기에는 상대적으로 긴밀한 정부, 대학, 재단 간의 협력이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 연구내용을 통제할 수단과 역량이 결여된 경우가 많았다. 물론 마이클 신이 지적한 것처럼, 미국 주요대학의 지역학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오리엔탈리즘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냉전 성향의 교수진은 신임교원 채용과 종신고용 심사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이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지역연구가 활성화 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정부-재단-대학 간의 치밀한 협력에서 비롯되는 지식-권력 쌍을 거론한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냉전적 지역학은 특정 주체들의 연결망에서 고안됐으며, 이는 마치 ‘모세관’처럼 학계 전역으로 확대됐다. 이제 “사람들은 흔히 그들의 행위에 미칠 영향을 알지 못한 채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부를 떠나 우선 이 주장은 이론적 의구심을 들게 한다. 도대체 어떻게 특정 집단에 의해 은밀하게 추진된 계획이 마치 모세관처럼 학계에 확산돼 모두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그 계획을 따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란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의 지식-권력 쌍에는 두 개의 양립하기 어려운 권력, 즉 행위주체를 전제하고 있는 권력과 푸코의 ‘작동하지만 행사되지 않는’ 권력이 동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비현실적이지만, 이 시나리오가 성립할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충분한 역사적 시간을 통해 특정 지배 질서가 자연화될 경우,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의식은 너무도 유사해진 나머지 지배집단의 헤게모니는 피지배집단의 자명한 발화와 실천을 통해 재생산될 것이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이제 갓 세계질서의 지배적 위치에 올라선 미국의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전문화에 의해 독립적 장을 구축한 학문 영역이 미국 내 특정 집단의 안보적 히스테리에 동조할 조건은 과연 충분히 마련돼 있었는가. 설령 이 학문적 장에서 여전히 작동할 수 있는 잠재적 오리엔탈리즘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곧 제국이 설파하는 보편주의와 그것에 모순되는 정부의 행위에 대한 침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빈센테 라파엘을 따라 미국 지역학의 문화를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라고 이해한다면, 거기에는 오리엔탈리즘 및 냉전적 지역학에 동조하는 경향과 이것에 반발하는 경향이 공존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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