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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구조적 요인 강조하면서 참전국 책임론도 제기
전쟁 발발 구조적 요인 강조하면서 참전국 책임론도 제기
  • 김준석 가톨릭대·국제정치
  • 승인 2015.01.12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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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 패권경쟁의 격화와 제국체제의 해체』 박상섭 지음|아카넷|404쪽|25,000원

 

지난해 1차 세계대전이 전쟁 발발 100주년을 맞았다. 민간인을 제외한 사망자의 수만 해도 1천만 여명에 달할 정도로 파괴적이었던 이 전쟁은 “근대국가의 잠재력을 그 궁극에까지 드러내게 만든” 사건이자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후 유럽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한국 학계와 지성계에서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전쟁의 의의를 반추하고 재평가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는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한반도와 동아시아 각국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1차 세계대전이 이 지역에 미친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는 (사실은 잘못된) 인식이 전쟁에 대한 관심의 부재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오늘날 한국 학계의 연구 동향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역사학계의 경우에는 정치사·국제정치사에 대한 빈약한 관심이, 정치학계, 국제정치학계의 경우에는 역사적 접근법에 대한 불신과 낮은 인기가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학계의 전반적인 역량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세계대전과 같이 복잡·미묘하면서도 폭넓은 배경지식을 요하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학과 국제정치학을 동시에 아우르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학제간 소통의 부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학문연구자 집단의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로 인해, 또 부분적으로는 우리 학계에 만연한 ‘조바심’으로 인해 그러한 접근법을 체화한 연구자들 사이의 의미 있는 교류의 장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저작 전무한 학계에 단비 같은 저작”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뒤늦게나마 1차 세계대전의 기원에 관한 단행본이 출간된 것은 단비와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대학에서 오랜 기간 국제정치사상과 역사사회학을 연구하고 가르쳤고, 전작인 『근대국가와 전쟁』(나남, 1996)에서 유럽근대사에서 국가의 형성과 관련한 전쟁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바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전쟁의 기원에 관한 종합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몇몇 번역서, 그것도 주로 전쟁의 기원보다는 발발 이후의 전개과정에 초점을 맞춘 외국 저자의 책들 이외에는 1차 대전에 관한 저작이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 학계의 상황에서 이러한 종합적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쟁의 기원 문제를 바라보는 나름의 관점을 정립하려 시도한다. 동일한 주제를 다룬 다른 저작들과 비교할 때 저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점을 가진다.


먼저 저자는 전쟁의 여러 원인들 중 국력에 걸맞은 권리와 지위를 누리기를 원하는 신흥강국 독일과 이러한 독일과 자국 사이의 국력 격차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상황에 내심 불안감을 느끼던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패권경쟁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물론 양국 사이의 해군경쟁을 통해 극명하게 표출된 이 패권경쟁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신 이는 전쟁의 ‘구조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은 국제정치학의 이른바 ‘세력전이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국력의 불균등한 성장은 강대국 사이에 갈등을 유발하고, 이는 종종 전면적인 전쟁을 통해서 해결되는 경향을 보인다.
다음으로 저자는 오스만제국의 약화 또는 해체에 따라 ‘무주공산’이 된 발칸반도에서의 정치적 혼란이 전쟁의 주요한 원인이 됐음을 지적한다. 여기에서도 ‘구조적 요인’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강대국 사이의 평화는 “전면적 무력 대결을 불사할 정도의 큰 분쟁”이 발생할 경우 위협받게 되는데 오스만제국의 쇠퇴로 인해 발칸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간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여건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혹자는 기존 영토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세력 확대를 도모하는 강대국들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강대국 국제정치의 속성상, 그리고 주권국가를 구성원으로 하는 근대적 국제관계의 속성상 양국이 실제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판이 원칙적으로는 정당할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별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전쟁 발발의 구조적인 요인을 강조하면서도 저자는 다른 한편으로 주요 참전국들의 전쟁책임에 관해 상세하게 논한다. 저자는 특히 전쟁의 가장 큰 책임이 독일에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어떻게 보면 전쟁책임 문제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을 지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러한 입장을 거부하면서 독일 이외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이 적어도 독일과 같은 정도의 전쟁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누구도 전쟁을 의도하지 않았으므로 책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최근의 연구동향과 대조를 이룬다.


물론 저자는 독일이 전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과거 프리츠 피셔와 그의 학파가 주장했듯이 독일이 처음부터 전쟁을 계획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다만 사라예보 암살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를 제압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행동이 강대국들 사이의 전면적인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사전에 인지했음에도 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슐리펜 계획’과 같은 위험천만한 군사전략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임으로써 외교적 협상의 여지를 대폭 축소시켰다는 점에서 독일의 책임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도 각각 ‘달리 행동했더라면 전쟁을 막았을 수도 있었을 순간’들을 가졌고, 그런 한에서 이 국가들도 일정하게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이 국가들의 전쟁 책임은 독일의 책임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저자는 1차 세계대전의 기원에서 구조적 요인의 중요성을 옹호하면서도 각국의 책임론을 언급함으로써 전쟁이 그러한 요인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발했다는 결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이 얼핏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서로 다른 차원의 원인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정합적으로 서로 맞물리면서 공존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주제에 대한 오랜 관심과 연구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성과이다. 혹자는 전쟁 원인의 설명이 보다 유기적으로, 보다 수미일관되게 제시됐어야 한다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적 실제는 그렇게 단순화된 방식으로 이해되기 어렵다. 적어도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그런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살펴보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의 동아시아 국제정치를 이해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방안을 모색하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강대국의 부상, 영토 분쟁, 민족주의 감정의 분출 등 현재의 동아시아 국제정치를 특징짓는 여러 요인들은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논의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를 주저한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규모와 복잡성이라는 점에서 21세기의 세계 정치는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한 세기 전 국제정치의 기본 규칙이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짤막한 언급만을 남기고 있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때문에 책 전체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 책은 사실 그러한 ‘교훈’보다 훨씬 더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것은 직면한 현실을 때로는 긴 호흡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끈기 있는 천착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이다.

 

 

 

김준석 가톨릭대·국제정치
필자는 시카고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주로 국제관계사, 국제정치사상이 관심분야이다. 주요논문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과 동아시아 국제정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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