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21:30 (화)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제 교육의 이념에 대해 논의하자”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제 교육의 이념에 대해 논의하자”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2.29 14: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의 안과 밖 46회차 강연_ 이태수 인제대 인간환경미래연구원장 ‘교육의 이념과 제도’

▲ -자료·사진 제공= 네이버문화재단

지난 13일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47회차 강연의 주제는 시의적절하게도 ‘교육의 이념과 제도’였다. ‘교육’을 내걸었기 때문에 흔히 교육학자가 강연자로 나섰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사는 이태수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이었다.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이자, 인제대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원장이기도 한 그가 강연을 맡은 이상, 논의는 좀 더 철학적인 방향으로 단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 괴팅겐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태수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장, 서울대 서양고전학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며 해박한 인문 지식과 풍부한 삶의 경험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 문학, 한국 인문학을 중심에 놓고 활발한 강의와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나는 누구인가』(공저·2014), 『고전 콘서트』(공저·2014), 『인문학 명강: 서양고전』(공저·2014), 『분류와 합류: 새로운 지식과 방법의 모색』(공저·2014)등이 있다.


이날 강연에서 이 교수는 “가르침이라는 행위가 교육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가르침이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나머지 부분’을 깊이 사유하고 사색했다. 그러나 출발점은 독특했다. 그가 “먼저 왜 우리가 교육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는 기본적인 사항을 망각하다시피 하게 됐는지”를 고민하면서 논의를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인성교육’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교수는 ‘인간의 가슴과 머리에 해당하는 내용’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 교수가 말하는 그것이 인성교육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사실은 다음 문장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가슴을 상대한다는 인성교육은 자칫 反지성주의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윤리적 인간성은 별개라는 것을 넘어서 그 둘이 서로 반대되기까지 하기 때문에 지식을 쌓는 것이 인간성을 피폐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내가 말하는 반지성주의다. 우리나라의 반지성주의는 무엇보다도 인문 지성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작금의 인성교육의 영역이 ‘감성’에 국한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일련의 시대 분위기를 문제 삼으면서 ‘인문지성’의 높은 성취를 플라톤의 『향연』에서 이끌어낸다.


이렇게 해서 그는 “교육 제도를 실용적인 전문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논의하는 목소리”를 ‘조금 더 작게’ 만들자는 의외의 대안에 도달한다.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교육의 이념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정말 사람과 사람이 만나듯 서로 만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우리가 차세대의 교육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정말 아름답고 훌륭하게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이 교수의 강연 주요 대목을 발췌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교육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 이뤄지는 일이다. 우선 가르침과 교육의 차이를 머리에 떠올려 보자. 사람과 짐승 사이에서도 가르침은 있을 수 있지만, 교육은 성립되지 않는다. 가르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고 사람과 짐승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보다는 일단 더 넓은 외연을 가진 것처럼 보이나 교육에는 가르침만으로 다 이야기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조급한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은 교육 제도에 관한 것에 집중돼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입시가 단연 으뜸 이슈이나 경쟁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 한 어떤 수를 쓰든 입시 지옥을 완전히 없앨 길은 없다. 입시 제도도 물론 개선할 것이 있으면 당연히 논의를 통해 개선을 시도해야 한다. 본래 제도는 이념을 실현하는 방안이다. 교육 제도도 물론 교육 이념의 실현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교육 이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점부터 강조했다. 교육 이념이라면 바로 그 대목을 어떤 방식으로든 내용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학교에서 생활하는 내내 우리는 동료든 선생이든 타자와의 만남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꾸미는 동시에 그 내용을 확장시켜 나간다. 그런 과정을 다른 말로 성장 또는 성숙이라고 하겠는데, 그 과정에서 선생과 동료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역할을 한다. 부모가 자식의 정체성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결정지어 줬다면, 선생은 학생을 그가 위치해 있는 세계의 문화 속으로 안내해 그의 정체성에 문화적 배경의 깊이가 스며들어 가게 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생은 학생을 역사 속의 존재로 성장하게 해 주는 것이다.


한 젊은이가 성장한다는 것이 단지 머릿속에 저장할 지식의 양을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면, 그리고 그런 성장의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 교육이 할 일이라면, 교육의 이념은 지식의 전수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대한 생각을 포함해야 한다는 당위는 충분히 인정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문제는 우선 그 생각을 좀 더 명료하게 개념화하는 일인데, 그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 원래 인간의 삶이 모호함으로 가득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 모호함을 헤쳐 가는 일이라면, 교육 이념은 가능한 한 모호함을 걷어내고 상충될 수 있는 것을 조화시키는 이론적인 정리를 거쳐야 수립될 수 있다. 그런 이론적 정리는 전형적인 철학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이 저술한 유명한 『향연』에 기술된 교육 활동은 그 구조가 생식 활동과 아주 유사하다. 즉 교육자 역할을 하는 사람은 교육을 받을 나이가 된 젊은이에게서 아름다움과 훌륭함의 요소를 발견하고 그것에 끌린다. 그것은 그의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즉 재능, 성격,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등등일 수 있다. 『향연』에 따르면 사실은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만나서 같이 이뤄낸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자와 피교육자 두 보모의 자아를 내용적으로 시간적으로 확대해 준 정신적 자식과 같은 것이다. 플라톤은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밀도 높게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만남이 바로 이 글이 모두에서부터 이야기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가르침 즉 지식의 전수와 관련해서도 플라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야기하겠다.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논의가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즉 대학에서는 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전문 지식을 가르치면 되고, 그 이전 단계의 학교에서는 그 전문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적 바탕을 마련하는 과목을 가르치면 된다는 것이 그 답이겠다. 플라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따라 그 답을 해 보라면 사회 발전이라는 만병통치약과도 같은 범용의 구호를 동원하는 대신 사회 구성원 각자가 다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해 주는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지식이란 곧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 직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라고 보고 그런 지식을 실용적인 지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은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사회 발전’과 더불어 ‘실용’도 범접을 불허하는 아우라에 싸여 있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실용 대신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더 앞에 놓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름다움과 훌륭함은 진정한 실용까지도 포함한다. 실용을 이야기 할 때마다 나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생각한다. 기하학은 다 알다시피 그 서양 말 ‘geometry’의 어원에서 읽어 낼 수 있듯이 고대 이집트의 측량술이 그리스로 수입, 변형돼 탄생한 학문이다.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큰 땅이 있던 이집트에서 측량술은 참으로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홍수가 난 후 토지를 다시 측량해 소유권을 재확정해 준다는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측량할 그런 땅을 가지지 못한 고대 그리스에서 그 지식은 쓸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지식을 받아들여 그것을 현실의 땅 대신 머릿속에 순수 공간을 구상해 그 위에 도형을 그리고 그 도형들의 관계를 관조하는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그 학문은 참으로 비실용적이었다.


유명한 무한의 공리를 생각해 보자. 무한까지 그은 두 직선이 만날까 또는 만나지 않을까에 관한 언명을 담은 이 공리는 정말 쓸모없는 내용이다. 무한한 크기의 땅도 없고 땅 위에 하릴없이 한없이 직선을 그을 일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삼각형의 두 변의 합이 다른 한 변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 정리도 있다. 무한을 그리고 우아한 논리적 추론의 절차를 생각해내는 인간 머리의 지적 모험은 그 자체로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해 보인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체계는 선생과 학생이 만나 지적인 모험을 통해 만들어 낸 아름답고 훌륭한 결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플라톤이 생각한 교육을 통해 이룩된 성취다. 다시 말해 아름답고 훌륭한 것에 대한 갈망을 지닌 인문 지성의 성취다. 눈앞의 실용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런 성취는 불가능하다. 특히 교육과 관련해 제도를 실용적인 전문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논의하는 목소리가 작아져야 한다. 그 대신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교육의 이념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정말 사람과 사람이 만나듯 서로 만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우리가 차세대의 교육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정말 아름답고 훌륭하게 꾸밀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