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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도 모르게 준비한 연구자 30명의 절묘한 ‘和音’
스승도 모르게 준비한 연구자 30명의 절묘한 ‘和音’
  • 김세중 서울대 강사·한국음악학
  • 승인 2014.12.29 1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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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한국 음악학의 지평』 황준연교수정년퇴임기념 기념논집간행위원회 엮음|민속원|543쪽|40,000원


지난 8월 서울대 국악과를 정년퇴임한 황준연 교수의 기념 봉정집인 『한국음악학의 지평』은 이 껄끄러움을 거꾸로 好機로 활용한 드문 경우다.
노트북이나 개인 블로그에 처박아 두기는 아까운 글감을 한 편의 글로 다듬어 마감에 맞추기까지, 은사를 기린다는 명분이 일종의 ‘건강한 부담감’이 돼 줬으리라. 

은사의 停年 같은 대사를 기려 후학이 봉정하는 논집이나 공동저술 출간이 눈에 띄게 드물어졌다. 출판 환경의 변화(종이책이 더 이상 희귀하지 않다), 수평이동의 활성화(정년에 이르기까지 한 대학에 수십 년 머무르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평균수명의 증가(정년은 끝이라기보다 새로운 시작이다) 등 외적 요인 이면에, ‘논문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공공연한 속사정이 있다. 봉정 논저에 내는 논문은 ‘온전한 한 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데다, 간행위를 꾸리고 출판과 ‘행사’ 비용을 갹출하는 등의 부담까지 따르는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근년 발표했던 논문들에 ‘~을 수정 보완한 것임’이라는 각주 0번을 덧붙여 모아 펴내기도 한다.
지난 8월 서울대 국악과를 정년퇴임한 황준연 교수(세종문화회관 국악사업총괄예술감독)의 기념 봉정집인 『한국음악학의 지평』은 이 껄끄러움을 거꾸로 好機로 활용한 드문 경우다. 30명 필자의 논문 30편은 모두, 더러 국내외 학술회의나 학외 심포지엄 등에서 발표했던 것들이긴 해도 활자화돼 출판되기는 처음인 새 글들이다. 학문적 관심으로 손댔으니 학외 매체용은 아니고, 그렇다고 규모와 체재를 갖추고 심사까지 거칠 논문용도 아니고, 하지만 노트북이나 개인 블로그에 처박아 두기는 아까운 글감을 한 편의 글로 다듬어 마감에 맞추기까지, 은사를 기린다는 명분이 일종의 ‘건강한 부담감’이 돼 줬으리라.

1896년 ‘한민족 최초 음원’과 서광범
봉정받는 주인공보다 유일하게 연장자로 해외 음악학계의 대표적 지한파인 로버트 프로바인 메릴랜드대 명예교수의 권두 특별기고는, 2007년에 필자 자신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발굴해 국내에 소개한 「한민족 최초의 음원 아리랑」의 비하인드 스토리쯤 된다. 이 최초 음원이란 1896년 渡美 조선인 유학생 3명이 녹음한 「애국가」, 「아리랑」, 「달아 달아」를 말하는데, 정작 녹음을 담당한 음악인류학자 앨리스 플레처는 한국이나 아시아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가 조선 노래를 녹음한 경위가 그간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다. 플레처가 활동한 분야의 저널들과 관보, 신문 등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튀어나온 媒婆의 이름이, 역시 음악학자이자 교육가로 플레처와 절친했던 애너 톨먼 스미스(1840~1917). 하지만 스미스는 또 어떻게 조선인 유학생들을 만났을까. 여기서 뜻밖에, 갑신정변 주역 중 하나로 미국 공사로 부임했다 1897년 객사한 서광범의 이름이 한국 독자의 눈길을 확 잡아챈다. 공사에서 해임되고도 귀국을 미루던 서광범이 스미스와 같은 시기 미연방교육국에 근무하며 그와 교분을 쌓았고, 서광범 사망 직후 미국 지면에 긴 추모글을 쓴 사람도 스미스였고, 녹음에 참여한 3명을 비롯한 조선인 최초 유학생들의 뒤를 봐 준 이가 바로 서광범이라는 사실을 추모글에서 찾아냈다. 결론적으로 한민족 최초의 음원 녹음의 ‘숨은 진짜 주역(Unsung Hero)’은 스미스이며, 이는 다름아닌 서광범과의 짧지만 굵은 교분 덕분이었다는 것.

세종조 ‘여민락’은 안단테~라르고 빠르기
조선 왕의 도성 내 행차에 쓰인 음악 ‘여민락’은 전통음악 중에서도 한없이 느린 악곡에 속한다. 그런데 허균을 비롯한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글에, 이 ‘여민락’이 선조 연간부터 마구 빨라지더니 급기야 난리(임진왜란)가 났다는 기록이 산재한다. 구체적으로 임금이 대궐(경복궁)을 나서서 숭례문쯤 와야 ‘여민락’ 1~10장 전곡이 끝나던 것이, 선조 연간부터는 광통교(지금 광교)에서 끝나 버리도록 빨라졌고, 난리 후에는 더 빨라졌다는 내용이다. 이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는 「『금합자보』 여민락의 음악적 성격 및 속도」에서, “대궐에서 숭례문이나 광통교까지 이르렀을 때 전곡이 끝난다면 도대체 ‘여민락’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빠르기였을까?”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 서광범(1859~1897)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갑오개혁 때 학부대신에 임명됐으나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런 서광범이 ‘한민족 최초 음원’녹음에 깊은 역할을 했다는 진단이 이번 책에 수록됐다.
이진원 교수는 먼저 임란 전 ‘여민락’에 음악 총길이가 다른 두 가지 버전이 있었음에 주목한다. 15세기 『세종실록악보』의 것(총 2천560박)과, 1572년 민간 거문고 악보 『금합자보』의 것(총 1천760박)이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숭례문까지의 당시 동선을 GIS로 계산하니 약 3킬로미터, 광통교까지는 그 절반쯤 된다. 여기에 어가를 멘 가마꾼들의 보행 속도를 어림하면 1박당 빠르기가 나올 터. 이 교수는 운동생리학 분야의 연구를 근거로 가마의 속도를 초당 약 1.2미터로 잡아 근정전~숭례문 구간 소요시간을 41분으로 계산했다. 따라서 ‘여민락’ 1박은 실록의 것이 1초(초당 1박, 즉 MM=60, 안단테 해당), 『금합자보』의 경우 약 1.4초(초당 42박, MM=42, 라르고)에 해당한다. 이것이 선조 연간에 두 배로 빨라졌다면 MM=120~82, 즉 프레스토~모데라토 정도가 된다는 얘기다.

‘한국음악학’의 주체, 대상, 방법
세습무권인 남부지방 굿에서, 의식은 女巫가 담당하지만 굿의 전승은 모녀간이 아니라 고부간, 즉 무녀의 남편인 악사 집안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지적(이용식 전남대 교수)도 흥미롭다. 논문은 그에서 더 나가지 않았지만, 강신무권인 북방 굿이 신어미에서 신딸이라는 상징적 모녀간으로 전승되는 점에서 북방무와 남방무 사이의 흥미로운 대조점 하나가 추가된 셈이다.


그밖에 일제강점기 1924년 이왕직아악부의 전무후무한 일본 방문공연의 유쾌하지 않은 속살(야마모토 하나코 일 센조쿠가쿠엔대 연구원), 영국 학자에 의한 울릉도 내 풍물패 복원 과정 현지조사(사이먼 밀스 영국 더럼대 교수), 한국에서 배워 간 영동농악을 북미에서 ‘정통, 퓨전, 창작’으로 재구성한 공연 후기(네이선 헤슬링크 캐나다 브리티시콜럼비아대 교수) 등, 책은 한국과 한국음악을 중심축으로 한 다채로운 바깥고리들로 풍성하다. 전체로 보아 책은 ‘한국음악학’의 정체 또는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뿜어 낸다. 30명 필자 중 외국인이 7명(미국 3, 중국 2, 영국 1, 일본 1)이고, 지역적으로는(비교연구 포함) 한국 외에 중국, 일본, 인도, 북미를 아우른다. 한국음악학은 ‘한국’의 음악학인가, ‘한국음악’의 학인가? 현재로선, 전적으로 서양음악학이 아닌 것은 다 한국음악학의 잠재적 대상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마는, 우리 인문 및 예술학계 전반의 학문적 편식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한 책의 한계―아시아(특히 한국 주변 동아시아)와 구미를 합하고도 커버하지 못하고 남는 지역(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음악 연구는 ‘어느’ 음악학의 대상이 될 것인가.


 

 


김세중 서울대 강사·한국음악학
필자는 서울대 공법학과를 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서울대에서 한국음악학 전공으로 박사를 수료했다. 저서로는 『정간보로 읽는 옛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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