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0:30 (금)
영화 보면서 건축하기
영화 보면서 건축하기
  • 양상현 순천향대
  • 승인 2002.10.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강의시간
양상현 / 순천향대·건축학과

 

매 학기 건축설계 과목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설계’를 ‘가르친다’라고 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학부생이었을 때부터 줄곧 따라다니고 있지만, 학생들과 함께 건축도면을 펼쳐 놓고 묻고 토론하며 트레이싱지 위를 누비다보면 때로 수긍할만한 대안을 찾기도 하는 것이어서 그나마 스스로를 위무하곤 한다.

이번 학기에 진행하고 있는 설계 주제는 초등학교 계획이다. 과제의 진행에 앞서, 소설 ‘쿠오레’ 중에 아버지가 학교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독백하는 글을 읽어 주었다. “네가 한 30년이 지난 후에 너의 자식을 만나러 학교에 가게 되면 학교는 훨씬 아름답게, 훨씬 시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너는 진정한 학교를 보게 될 것이다. 마치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학교처럼. 나는 너의 학교 공부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용히 거리를 거닐며 발을 늘어뜨려 햇빛을 가린 아래층 창에 귀를 기울였다. 이 모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세상은 학교에 대해서 커다란 약속을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니겠느냐.”

교실의 규모, 평수를 따지는 것보다 그것이 어떤 집이 돼야할지를 상상하는 일이 먼저다. 지어질 학교를 상상하고 그 안에서 뛰놀 아이들을 그려보고, 그리고 그들이 성장해 다시 학교를 찾았을 때의 감회까지 담을 수 있는 학교라면, 진정 사랑의 학교가 될 것이다.

딱딱한 건축을 좀더 유연하게 상상하기 위해 곧잘 다른 예술분야나 인문학적 영역을 훔쳐보곤 한다. 집이란 콘크리트와 철, 그리고 유리로 지어지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더운피의 인간들이 숨쉬고 있는 까닭이다. 학생들이 단순한 전문기능인으로서의 건축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기 탓에 설계 수업은 엉뚱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학기의 첫 설계 시간, 학생들과 함께 본 것은 영화 ‘공동경비구역’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 학생들에게 던진 그 날의 과제는 영화 속에 등장한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부수고 다시 만드는 작업이었다(우리 학과의 설계 수업은 통상 하루종일 진행된다). 학생들과 함께 분단과 통일에 관해 생각하고 이를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오늘과 현대사의 질곡에 대해 잠시나마 고민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의외로 진지했고 짧은 시간임에도 풍부한 사고를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이런 식의 수업을 학기 중간 중간에 배치해 학생들의 사고가 인문적 지평으로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소설을 읽고(은희경의 ‘아내의 상자’나 박상우의 ‘내 마음의 옥탑방’이 대상이었다) 주인공이 머물렀던 방을 리모델 링 하기도 했다.

 

건축을 상상하고 지어내는 일은 건축가만의 작업은 아니다. 영화 속에도, 소설 속에도 건축과 공간은 등장하고, 언제나 그것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잘 짜여진 세팅이 된다. 이 때 작가는 건축가 못지 않게 훌륭히 ‘건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읽어내는 작업을 통해 건축이 지금껏 빠뜨린 것들이나 혹은 지향해야 할 가치들을 탐색하는 것 또한 건축의 몫이 될 것이다. 정태춘의 ‘고향집 가세’를 듣고 따라 부르며 자신의 고향집(혹은 할머니 댁)을 재현해 보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은 밤샘작업으로 지친 학생들의 활력을 재충전하는 기회가 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