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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되도록 ‘전임교수’ 하나 없다니…”
“25년 되도록 ‘전임교수’ 하나 없다니…”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2.10 1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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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인문대학 협동과정 서양고전학 창립 25주년 기념학술대회


지난 3일 서울대에서 작지만 중요한 질문 하나가 다시 던져졌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이 질문은 장차 ‘요원의 불길’처럼 우리 학문의 기저를 달구게 될 것이다. ‘왜 서양고전문헌학인가?’라는 이름으로 이날 열린 서울대 인문대학 협동과정 서양고전학 창립 25주년 기념학술대회에는 이성원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이태수 인제대 인간환경미래연구원 교수(철학), 이강재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등이 참여해 발표했다. 발표 면면이나 규모를 보면 작은 세미나 정도지만, ‘해답’보다 ‘질문’의 중요성에 공감한다면, 이날 학술대회는 그 내파력이 보통 아닐 듯싶다.


이들의 질문은 수렴적이었다. 이성원 교수는 「왜 고전을 공부하는가?」를 발표했다. 현직에서 퇴임한 학자가 아주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태수 교수는 「철학에서 문헌학으로」를 들고 나왔다. 그가 서양철학을 공부해온 1.5세대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철학에서 문헌학’으로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문헌학’의 복권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이어받아 이강재 교수는 「동양고전학에서 문헌학의 중요성」을 발제했다. 그리고 김헌 교수는 「고전 연구와 번역의 문헌학적 기초」를 발표, 이날 논의의 한 방향성을 구체화했다.
과연 이들은 왜 ‘왜 서양고전문헌학인가?’를 내세웠을까. 발표자들의 주요 주장을 발췌해본다

▲ 왜 서양고전문헌학인가?’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내파력은 대단해보인다. 서울대 단위를 확장한 모색도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제공=서울대 인문대학 협동과정 서양고전학

. ■ 「왜 고전을 공부하는가?」(이성원)
한국에서 서양고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서양에서 고전학을 공부하는 사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없는 이점 하나는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한문을 알고 라틴어를 아는 사람들의 수는 전 세계적으로 극히 제한돼 있다는 사실이다. ‘학습’이라는 말의 진의가 왜곡돼 고전을 공부해 ‘인간됨’의 의의를 반추하는 일의 교육적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오직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일지라도, 한국에서 서양고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세계적으로 아직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는 문제들에 도전해볼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말로 애써 힘을 내려 하더라도, 서양고전학 프로그램이 출범한지 25년이 되도록 서양고전학을 전공으로 하는 전임교수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 「철학에서 문헌학으로」(이태수)
우리는 니체가 떠난 뒤 빌라모비츠가 대변하는 길을 따라 고전문헌학이 현재 시점까지 이뤄 놓은 것을 그냥 그대로 이어 가기만 하면 되는 편안함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왜 오늘날 이곳에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먼 고대 그리스, 로마가 남긴 것 중 어떤 것을 골라 고전이라고 특별대우 하면서 공부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야 할 처지다. 교수직을 그만 둔 뒤 니체는 고전문헌학의 전문적인 연구가 아닌 철학적 저술에 몰두했다. 취임 강연에서 그는 문헌학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했지만, 문헌학을 떠나 철학에 전념하겠다는 뜻으로 그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철학적 기반 위에서 문헌학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철학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가 하려던 일을 이어 한다는 것은 철학에서 다시 문헌학으로 나아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되는 문헌학은 텍스트의 문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의 연결을 잊지 않는 철학의 자격을 갖춘 문헌학이 될 것이다.

■ 「동양고전학에서 문헌학의 중요성」(이강재)
이 시대의 동양고전학은 우리 시대에 알맞은 시대적 사명을 찾아나가는 데중요한 삶의 준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동아시아 시대를 맞이하는 전환기의 이 지역인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또한 동아시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서구 편향적인 학문경향이 강한 우리나라 학계의 현실에서, 동양고전학은 우리의 사고에 길항작용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고전학은 갈수록 중요시될 가능성이 큰 것에 비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여러 분과 학문 속에 파편적으로 존재하면서 어느 분과 학문에서도 주류로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가령 유가경전에 대한 연구는 중문학과, 한문학과, (동양)철학과, (동양)사학과 등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동양고전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분과학문에서도 가장 기초적이거나 중요한 학문으로서 대우받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각 분과학문 속의 동양고전학을 묶어서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대학원 동양고전학협동과정을 신설할 수 있다면, 고전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 「고전연구와 번역의 문헌학적 기초」(김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역’을 통해 서양의 고전을 접하기에 더욱 그렇다. 만약 어떤 서양 고전의 번역이 ‘엉망’이라면, 그것을 읽는 사람은 원 저자의 뜻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이며, 이해와 판단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들 사이의 ‘오해’와 ‘오독’이 나름의 가치가 있고, 원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생각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전의 오역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최선을 다해 원전에 대한 오역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며, 그런 주장이 정상적인 태도라면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학문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지극히 올바른 태도다. 따라서 그리스 문헌을 그리스어를 읽을 수 없는 독자가 한국어 번역으로 읽을 경우, 번역의 오류는 독서의 오류를, 독서에 따른 사유의 오류를 낳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외국어 텍스트를 읽고자 하는 독자 모두가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해에 의한 우발적인 결과보다는 정확한 이해에 기초한 예측 가능한 비판과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창의적 도약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도 타당한 태도다. 그렇다면 외국어로 작성된 텍스트의 정확한 번역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그 무엇보다도 먼저 ‘문헌학’(philology)의 비판적인 정신에 직면하게 된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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