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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과 세계문학의 조건
더블린과 세계문학의 조건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4.12.01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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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어영문학과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지난 10월에 잠시 더블린을 다녀왔다.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을 맞아준 것은 비바람이 을씨년스럽게 휘날리는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였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흩뿌리는 비바람, 그리고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따뜻한 햇볕처럼 이곳 사람들의 마음도 이렇게 흐리고 거칠고 따뜻할까.

독일작가 하인리히 뵐은 50년대 중반 더블린을 여행하면서“이곳에서는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절로 생기는 일도 흔치 않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술 마시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신마저도 격렬하게 사랑받거나 몹시 미움을 산다”고 쓴 적이 있다. 날씨만큼 변화무쌍한 더블린 사람의 성정을 잘 표현하는 말 같다.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반면 이민족들의 점령에 고통당해온 나라, 즉 아일랜드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볼 때 한국과 매우 비슷한 처지에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의 영문학자들은 유럽의 주변인 아일랜드를 동아시아의 주변인 한국과 겹쳐 읽었다. 물론 그 겹침의 정도는 우리의 슬픈 민족적 자아가 투영한 동일시 때문에 과장된 면이 없진 않다.

아일랜드는 인구가 4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쇼, 예이츠, 베케트, 히니와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화 강국이다. 물론 이 사실이 개별 국민들의 경제적, 문화적 행복을 의미하진 않지만 그 문화의 수준과 자긍심을 가늠해볼 순 있다. 도심에 위치한 ‘제임스 조이스 센터’를 둘러본 후 안내원에게 어디를 더 둘러보는 것이 좋을지 물었을 때 지도에 열심히 표시하며 설명해주던 그의 환한 모습이 몹시 부러웠다.

아일랜드는 어떻게 해서 세계적 수준의 문학들을 갖게 된 것일까. 어쩌면 유럽문화의 보편적 정수가 담긴 가톨릭 문화를 일찍부터 수용하고 지켜온 점, 오랜 세월 제국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 문화의 수준과 격을 같이 한 점, 게일어라는 민족어가 있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점 등 다양한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일랜드는 지리적으로는 섬이지만 문화적으로 섬이 아니었다. 그곳은 민족적인 것과 유럽적인 것, 그리고 세계적인 것이 교차하고 변용되는 열린 교차로이기도 했다.

『세계문학공화국』이란 책으로 유명한 프랑스 이론가 파스칼 카자노바는 세계문학을 주변부 출신의 작가들이 자신의 민족적,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중심부의 문학적 문법을 터득하거나 그것에 혁명적 변화를 주는 문학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는 민족문학, 지역문학을 부정적으로 획일화하는 편견이 있긴 하지만 사실 조이스와 베케트 같은 아일랜드 작가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녀는 민족적 한계를 넘어 중심과 주변, 지역과 세계 간의 관계를 횡단하는 아일랜드 작가들을 세계문학의 범례로 봤던 것이다.

특히 카자노바는 민족과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 아일랜드 작가에게 파리라는 탈출구가 있었음에 주목한다. 파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예술가와 작가들로 넘쳐났고 온갖 문학적 실험들이 펼쳐지던 세계문학의 수도였다. 이곳에선 제국과 식민의 관계, 특히 민족주의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다양한 문학적, 정치적 혁명들이 가능했다. 아일랜드 작가들은 이런 실험의 주역이 되거나 그 성과를 전유해 자기 문화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의 작가들에게 그런 탈출구는 기대할 수 없었고 지금도 쉽지 않다. 식민과 제국, 그 연장인 분단은 한국문학을 친일과 반일, 극우와 종북, 전향과 지조의 민족주의적 이분법에서 탈피할 수 없도록 만들어왔다. 없는 것을 한탄할 일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이분법의 닫힌 논리와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그것을 깨고 나올 때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에 한걸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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