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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세계화는 학자의 사명 … 누군가해야 할 일 묵묵히 했다”
“고전 세계화는 학자의 사명 … 누군가해야 할 일 묵묵히 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1.21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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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출판기념회 풍경_ 『태조실록』 영역본 출간한 최병현 한국고전번역센터 소장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록된 지 2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등록’만 됐지, 그간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들 텍스트들의 분량이 방대해서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이렇게 방대한 자료들을 언제까지 바라보기만 할 것입니까. 현실은 갈 길이 멉니다. 갈 길이 먼 것은 텍스트 분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국가적·국민적 관심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이 땅에 외국어를 공부한 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많은 학자들이 평생 외국어를 공부했는데, 제 나라 문화를 외국에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공부겠습니까?”
지난 3일 저녁 6시 30분, 『태조실록』 영역본(하버드대출판부 刊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더 프라자호텔 그랜드볼룸 장내가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기침소리도, 포도주 잔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번 영역 작업의 주인공인 최병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고전번역센터 소장(호남대·영문학)이 인사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고려대 한국고전번역센터 소장으로 오기 전에 이미 『징비록』(미국 UC버클리대, 2002), 『목민심서』(캘리포니아대, 2010) 등을 미국 학계에 소개한 바 있는 최 교수는 4년여에 걸쳐 『태조실록』 번역에 매달려왔다. 『조선왕조실록』(1천893권) 가운데 모두 15권에 이르는 『태조실록』을 영역한 것으로, 서문까지 포함해서 모두 1천48쪽에 이르는 분량이다. 그는 이번 출간을 두고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대서사시의 첫 줄을 겨우 썼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방의 작은 대학에서 영문학자로 연구하고 가르쳐온 최 교수는 ‘겸손한’ 출판기념 인사말을 했지만, 이날 출판기념회는 남다른 광경으로 기억돼야 할 것 같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태조실록』이라는 조선 건국기의 총체적 기록물을 ‘한국 고전 세계화’의 디딤돌로 자리매김했다는 것. 둘째, 이러한 한국 고전의 세계화 작업을 빚어낸 ‘어떤 만남’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 셋째, 학자로서의 자의식의 문제가 깊이 표출되고 있다는 것.


『태조실록』은 한국고전번역센터가 향후 10년 이내에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을 최소 7권 이상 번역해 미국의 저명 대학출판부를 통해 출판한다는 계획에서 나온 첫 결과물이다. 또한 최 교수의 말대로 ‘10명의 번역인재 양성’ 계획과도 연결된 상징적 작업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또한, 하버드대에서 『태조실록』이 출간된 것은 단순히 한국학 서적의 해외 출간이란 의미 지평선을 넘어서, ‘예사롭지 않은 만남’의 문제를 환기하는, 고전 세계화의 일대 사건으로 회자될 수 있다. 축사를 한 김병국 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고려대·정치외교학과)이 그 중심에 있다. 그는 “남들이 하지 않는,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혼자 묵묵히 하고 있는 최 교수를 아주 우연하게 만났는데, 그 짧은 만남이 계기가 돼 오늘 같은 성과로 이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버드대출판부의 에디터에게 메일을 보내 최 교수의 작업을 소개했고, 그것이 흔쾌히 받아들여져 책이 번역됐을 뿐이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우리 모두는 흩어져 있지만, 결국은 하나의 큰 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고전을 세계 고전의 반열에 세우고, 세계인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태조실록』 번역은 그 첫 성과입니다”라고 의미를 짚어냈다.

 


『태조실록』 영문판 작업은, 이 땅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최 교수가 인사말에서 거듭 질문을 던진 것처럼, ‘수많은 학자들이 우리 문화를 관련 외국어로 그 나라에 제대로 소개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공부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자의식은 학문공동체가 지녀야 할 소중한 自省의 태도다. 최 교수는 낯선 지방 대학에서 묵묵히 그 질문을 곱씹으면서 학자의 길을 걸어왔고, 영역 『태조실록』은 그 실천적 응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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