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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평화 공존을 위한 도덕적·정치적 판단 기준이다”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평화 공존을 위한 도덕적·정치적 판단 기준이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1.20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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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41회차 강연_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 공동소장, ‘국가와 세계시민’


“힘과 부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국제사회의 현실 속에서 다양한 집단의 자유로운 합의만을 강조하는 것이 극히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발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비지배’의 원칙이 약하고 뒤쳐진 국가들의 의사를 힘과 부의 불평등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면, ‘비지배적 상호성’에 기초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다음 세대의 평화 공존을 위한 도덕적·정치적 판단 기준의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안국빌딩 4층 W스테이지에서 열린 ‘문화의 안과 밖’ 41회차 강연에서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 공동소장은 약육강식의 국제 질서 속에서 새로운 평화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읽어냈다.
곽 소장은 미국 시카고대에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고려대·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이탈리아 볼로냐대 방문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 공동소장이며 세계 유수의 인문학 출판사인 영국 루틀리지(Routledge)의 ‘Political Theories in East Asian Context’의 책임 편집자로 있다. 그의 주요 연구분야는 소크라테스에서 마키아벨리에 이르는 고대중세 정치사상과 르네상스 정치사상, 그리고 공화주의, 민족주의, 헌정주의, 민주적 리더십 등 고전 사상의 현대적 적용에 초점을 둔 정치이론들이다. 저서 및 편저로는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비지배를 꿈꾸는 현실주의자』(2014), 『지배와 비지배: 마키아벨리의 『군주』 읽기』(2013), 『아직도 민족주의인가』(공저·2012),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우리시대 정치철학자들과의 대화』(2010), 『근대성의 역설』(공저·2009) 등이 있다. ‘비지배적 상호성과 세계시민주의’라는 부제가 붙은 이날 강연 ‘국가와 세계시민’에서 곽 소장은 무엇보다 공화주의 전통에서 세계시민적 가치를 구현하려는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지구적 가치와 민주적 시민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비지배적 상호성’에 기초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을 제시”했다.
과연 그가 제시한 독법은 어떤 내용인지, 관련 내용을 발췌 정리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자료·사진 제공= 네이버문화재단
최근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의 규범적 근거와 제도적 전망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지정학적 경계와 집단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세계시민’의 출현이 장기적으로는 가능하리라는 견해를 갖게 됐다. 1990년대 초부터 지속돼 온 세계시민주의는 ‘어떤 기준과 어떤 방식으로 보편적 가치를 확보하느냐’에 대한 질문을 ‘다양한 정치사회적·문화적 특징을 갖는 집단이 어떻게 보편적 가치에 이르게 되느냐’의 문제로 이해했고, ‘민주적 심의(democratic deliberation)’를 자유주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절차와 내용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시민의 경우 ‘민주적 시민성’의 요건을 충분히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주창하던 ‘민주적 시민성’의 이상적 모델이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느냐는 것과 다양하고 이질적인 집단들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다수결을 통한 의사결정이 민족국가에서와 동일한 시민적 순응을 가져올 것이냐는 것이다.


결국 ‘법적·제도적 권리’에 국한되지 않으면서도 세계시민의 민주적 시민성이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즉 어떻게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가 문화적 특수성을 넘어 세계시민의 민주적 시민성의 내용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특히 마키아벨리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공화주의의 근원을 찾고자 붙여진 ‘新로마’ 공화주의는 ‘非지배 자유’에 주목했다. 신로마 공화주의에서 시민적 책임성이란 비지배 자유를 유지하려는 시민들의 정치행위의 결과이고, 국가 또는 공동체의 개입과 이러한 개입에 대한 저항까지 非지배라는 조건을 통해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그럼에도 비지배가 정치사회적 맥락을 넘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판단기준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다만 비지배 자유가 개별 행위자에게 실질적 동기를 부여하면서도 민주적 심의의 결과에 대한 순응을 요구할 수 있는 규범적 근거가 무엇이며, 이러한 근거에 대한 이해가 상충될 때 어떻게 상호적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지가 좀 더 설명돼야 한다. 여기에서는 심의를 통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비지배 자유에 근거한 민주적 심의가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로 비지배적 상호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민주적 심의를 통해 보편적으로 적용될 가치의 내용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은 비지배적 상호성을 보장해 주는 데 있다. 비지배를 통해 불평등한 힘의 구조가 심의 과정에서 개선되고, 동일한 이유에서 약자가 잠재적 지배에 대항하는 실질적인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심의를 통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비지배적 상호성은 反정초적이지는 않지만 정치사회적·문화적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심의적 구성에 주목한다. 또한 심의에 참여한 모든 행위자들에게 균등한 힘을 부여함과 동시에 서로의 의사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실질적 힘을 제도화해서, 그 결과 이문화간·국가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용될 수 있는 보편의 내용을 구성하는 조정원칙인 것이다. 지금까지 본 강연자는 ‘세계시민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보편주의’와 ‘민주적 시민성’에 대한 정치사상적 연원을 살펴보고, 공화주의 전통에서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세계시민적 가치를 구현하려는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자연적으로 부여된 권리가 아니라 심의를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서 인권을 비롯한 보편적 가치를 이해하는 공화주의 전통에서 정치사회적 특수성과 세계시민적 가치를 조화시킬 수 있는 조정 원칙으로 비지배적 상호성을 제시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세계시민’의 가능성이 큰 시대에 살고 있다. 이른바 ‘인권’과 ‘민주주의’가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정치적 정당성의 주요한 내용으로 자리 잡은 시대에 살고 있다. ‘좋은 시민이 곧 좋은 사람일 수 있을까’라는 정치철학적 질문을 되물어 볼 때, 민족주의만큼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주제는 없다. 개별 국가 구성원의 연대가 안으로는 민주주의의 일반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밖으로는 인류공영의 보편적 가치와 부합되어야 한다면, 나는 ‘비지배적 상호성’에 기초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비지배적 상호성’에 기초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족주의가 담당해 온 공적 역할을 ‘시민적 연대’로 대체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시민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 소속감이나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스스로가 향유하는 ‘비지배 자유’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 행동으로 이해되던 시기의 연대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비지배적 상호성’에 기초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추상적인 ‘민족’ 또는 전체로서의 ‘국민’보다 법적·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향유하는 시민을 주체로 함으로써 ‘민족주의’를 ‘시민적 애국심’으로 대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지배적 상호성에 기초한 ‘시민적 연대’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적 민족주의가 수행해 온 긍정적인 역할을 수정·보완할 수 있다. 아울러 ‘비지배적 상호성’에 기초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당면과제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반도의 통일은 ‘세계시민주의’의 흐름과 갈등관계에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으나, 개별 민족 또는 국가들의 차이와 다양성이 고려되는 여러 수준에서의 합의를 통해 지구적 평화공존,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의도하고 있기에 세계가 함께 추구해야 할 해결책으로 바라본다. ‘비지배’의 원칙이 약하고 뒤쳐진 국가들의 의사를 힘과 부의 불평등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면, 비지배적 상호성에 기초한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은 다음 세대의 평화 공존을 위한 도덕적·정치적 판단기준의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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