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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 사상가들의 대담집 출간 붐
책들의 풍경 : 사상가들의 대담집 출간 붐
  • 교수신문
  • 승인 2002.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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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9 11:37:09
최성일 / 출판평론가

‘체 게바라 평전’이 기폭제가 돼 평전·전기 출간 붐이 일어난 2000년을 ‘전기물의 해’라고 한다면, 2001년은 ‘대담집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일간신문 출판면의 연말결산에서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가 무려 세 곳의 신문에서 책 중의 책으로 뽑혔고,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물론 ‘춘아, 춘아, 옥단춘아…’가 여러 사람의 대담을 한 데 모았다는 점과, ‘서양과 동양이…’는 출판사의 기획력이 승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있지만 말이다.

보신주의와 경박함이 대담문화 막는다

아무튼 본격 대담집의 출간은 2002년에도 이어지고 있다. 자크 데리다의 ‘에코그라피-텔레비전에 관하여’(민음사 刊)와 노암 촘스키의 ‘프로파간다와 여론’(아침이슬 刊)이 나왔고,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이끌리오 刊)이 재출간됐다. 사실, 해외 석학의 육성이 담긴 대담집의 출간은 꾸준했는데 장 보드리야르의 ‘무관심의 절정’(동문선 刊)이 지난해 나왔거니와, 지지난해에는 에릭 홉스봄의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이끌리오 刊), 마루야마 마사오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刊), 그리고 ‘칼 포퍼-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등이 선을 보였다.

이밖에 기억할 만한 대담집으로는 절판돼 책을 구하기가 쉽진 않지만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 刊), 미셸 푸코의 ‘권력과 지식’(나남출판 刊), 파울루 프레이리의 ‘인생은 학교다’(분도출판사 刊), 레이몽 아롱의 ‘참여자와 방관자’(홍성사 刊) 등이 있다. 그런데 지난 시기에 나온 국내 인물의 단독 대담집으로는 ‘강원룡과의 대화’(평민사 刊)나 김수환 추기경의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刊) 같은 종교인 대담집이 고작이다. 본격대담집은 김용옥과 김우중의 ‘대화’(통나무 刊)뿐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해외 석학의 대담집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데 비해 국내 석학의 대담집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까닭은 무얼까. 그 이유로 우선, 국내 학계에 두루 퍼져 있는 보신주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워낙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어온 탓에 자신의 속내를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정황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렇더라도 대화를 통해 후학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달하는 것은 원로 학자들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한다.

캠벨의 대담집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외상으로 산 책들을 독파한 대공황기의 가난했던 시기를 “정말 멋진 시절”로 회고하는 대목이 사뭇 감동적이다. 촘스키의 대담집에서는 노암(Noam)이라는 이름이 나오미(Naomi)라는 여자 이름으로 잘못 읽혀 병역 면제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는 언급이 흥미롭다.

우리나라 방송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또한 국내 석학의 대담집이 드문 까닭으로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올해 출간된 해외 석학의 대담집 세 권은 모두 방송 매체와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캠벨의 대담집은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를 통해 방영된 언론인 빌 모이어스와의 방송대담을 풀어쓴 것이다. 방송사에는 두 사람의 대담 원고를 요구하는 시청자의 편지가 쇄도했는데 그 수가 무려 1만 4천통이나 됐다고 한다.

기획은 꾸준하지만, ‘인터뷰어’ 부재가 문제

하지만 우리에게도 가능성은 열려 있다. 세기말 기획으로 한국방송이 심야시간대에 편성한 인터뷰 프로그램인 ‘원로와의 대화’가 비록 시청률은 낮았지만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젊은 학자들과의 대화를 지면에 담았던 계간 ‘현대사상’의 시리즈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와 ‘한겨레’의 ‘인문학 데이트-열린 지성과의 대화’ 역시 대화집의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기획의 사례로 충분하다.

그런데 국내 석학의 대담집을 보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보다 석학의 말문을 터줄 인터뷰어의 부재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번역된 석학의 대담집은 단독저서가 아니라 공동저작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실제로도 책 표지나 刊記에 석학과 인터뷰어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재돼 있다. ‘캠벨-모이어스, 촘스키-데이비드 바사미언, 데리다-베르나르 스티글러, 보드리야르-필리프 프티, 홉스봄-안토니오 폴리토, 마사오-가토 슈이치, 프레이리-프레이 벳토, 곰브리치-디디에 에리봉’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가운데 가토 슈이치와 프레이 벳토는 각기 일본과 브라질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면서도 기꺼이 조연 배역을 맡았다. 디디에 에리봉은 정평있는 푸코 전기인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刊)의 지은이로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기도 하다. 빌 모이어스는 대담을 통해 캠벨의 제자를 자임한다. 레이몽 아롱과 견해가 달랐던 장 루이 미씨까와 도미니끄 볼똥도 대담 중에는 아롱과 티격태격하지만 그들이 겪은 아롱의 인품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한다. 우리도 얼른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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