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45 (목)
‘정치적 문제’가 된 논쟁에 학문적 방책을 제시하다
‘정치적 문제’가 된 논쟁에 학문적 방책을 제시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1.04 15: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57회 전국역사학대회 ‘국가권력과 역사서술’


세부 발표들도 역사서술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갈등적 경험을 중심으로 이를 동서양의 다양한 사례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가권력과 역사서술이 맺어야 할 타당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

2014년 제57회 전국역사학대회가 ‘국가권력과 역사서술’을 공동주제로 지난달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이틀간 서강대에서 개최됐다. 이번 전국역사학대회는 전국역사학대회협의회가 주최하고 역사학회가 주관하며 서강대가 후원했다.
최근 역사학계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보다 ‘역사(국사) 서술’과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집중됐다. 이번 전국역사학대회 역시 정부의 시대회귀적 움직임을 겨냥, ‘국가권력과 역사서술’을 공동주제로 검토한 뒤, 이 문제의식을 15개 패널로 이뤄진 부별발표, 11개 패널로 진행된 자유발표에서 소화하는 형식이었다.


윤병남 제57회 전국역사학대회 협의회 의장 겸 역사학회 회장은 공동주제를 ‘국가권력과 역사서술’로 설정한 것을 놓고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국가권력이 역사서술에 어떤 방식으로 관련을 맺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근대역사학의 중요한 중심 주제 중의 하나가 돼 왔다는 점이다. 이른바 국민국가의 국민화 과정에서 역사학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긍부 양론이 엇갈려왔다.


둘째, 한국사회에서도 중등학교 한국사교과서의 성격을 둘러싸고 10여년 전부터 열띤 논쟁이 되풀이돼 왔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뉴라이트’라고 명명된 정치 성향을 가진 집단이 선명하게 부각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정부의 의사표시로 인해 교과서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문제가 더욱 첨예한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고 있는 듯하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갈등이 한국사 교과서의 역사서술을 둘러싸고 폭발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한국 역사학계가 이 문제에 ‘학문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윤병남 역사학회장의 말대로, 역사학계는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현 상황의 성격과 본질을 객관적으로 엄밀하게 진단하는 한편, 역사 서술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학문적 방책을 모색해야 할 소명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과 역사서술’의 문제는 또한 ‘동아시아 역사논쟁’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공동주제 발표와 각 부별발표를 통해 한국사와 세계사에서 이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경험적, 이론적 사례가 제시되고 분석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특히 세부 발표들은 역사서술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갈등적 경험을 중심으로 이를 동서양의 다양한 사례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가권력과 역사서술이 맺어야 할 타당하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


이번 제57회 전국역사학대회의 공동주제는 모두 5개의 발표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제1발표 ‘역사서술의 권력, 권력의 서술’에서 이성규 서울대 명예교수는, 인터넷 시대에 다양한 역사서술의 버전이 생산되고 유통됨으로써 그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다양한 역사서술의 상호존중과 이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충족 조건이란 이렇다. 첫째, 어차피 당파성을 면하기 어렵다면 먼저 자신의 당파성을 선명하게 선언하고 그 상대성과 일면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역사서술과 토론은 일정 수준의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셋째, 진위나 당부를 불문하고 자신에게 호소력 있는 주장만 경청하려는 인간의 한계가 존중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우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권력과 그 신화’를 해체함과 동시에 ‘역사전능의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


이어진 제2발표 ‘과학적 역사학과 국가주의 역사서술’에서 임상우 서강대 교수는 유럽의 근대역사학을 ‘실증주의 역사학’과 ‘랑케사학’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유럽에서 근대역사학은 ‘시민종교’로서 시대적 사명을 완수했음을 강조했다. 여기서 임 교수는 이 유럽의 근대역사학이 제국주의 침탈과 아울러 동아시아에서는 기꺼이 ‘과학의 일원’으로 수용됐으며, 이는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과 아울러 국가의 정당성과 영속성을 담보하는 ‘국사’로 정착됐다는 사실을 짚어냈다. 특히 임 교수는 한국에서 과학적 역사학의 외피를 쓴 국가주의 역사학은 시민종교로 기능하고 있는바, 시민종교의 경전을 하나의 정전으로 고정시키려는 시도는 국가주의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제3발표에서 정태헌 고려대 교수는 발표문 「한국근현대사에서 국가권력과 역사서술」을 통해, 역사서술 방식의 전개 및 그 특징을 중심으로 한국의 근대역사학의 전개과정을 살폈다. 19세기 말에 역사교과서의 국정 및 검정제도가 도입됐으나 미처 역사서술 체제를 갖추기도 전에 조선총독부에 장악됐고, 해방 이후에도 체제를 갖춘 검정제도를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다가 유신체제기에 국정으로 고착됐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정 교수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시도는 교과서를 이념전쟁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로서,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역사지식의 국가 독점을 인정하는 한편, 이것이 학문적 권위의 원천으로서의 학계의 위기를 반영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제4발표 「역사지식 정보의 유통과 국가권력」을 발표한 김태승 아주대 교수는 역사정보의 유통체제와 국가권력과의 관련 양상을 사적인 맥락에서 검토한 뒤 “역사적 경험에 비춰볼 때, 역사지식 정보의 도구화 내지 정파적 이용은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고, 또 유일한 권위의 원천임을 강조하는 국가가 그것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려는 유혹 역시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이제 국가개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학문적 권위의 원천으로서의 ‘학계’도 함께 위기에 처했음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제5발표에서는, 「서구에서 국가권력과 역사서술」을 발표한 최갑수 서울대 교수는 프랑스혁명사 연구를 중심으로 국가권력과 역사서술을 분석했다. 프랑스혁명사 연구는 크게는 근대성과, 작게는 프랑스의 국민적 정체성과 관련해 연구 경향이 달라져왔음에도 근대역사학이 제도화함에 따라 프랑스혁명사 연구 역시 특권화하게 됐다는 점, 그리고 1950년대 이후 수정주의 해석이 대두하면서 혁명사 연구가 정치화함으로써 ‘정치의 혁명학’이 전개됐다. 요컨대 학문의 자유 혹은 학계의 자율성은 상대적인 것이고 그만큼 취약한 것일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임을 프랑스혁명사 연구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게 최 교수의 지적이다.


이번 전국역사학대회의 공동주제 발표가 원래 의도대로 한국사회의 갈등을 완화하고 새로운 전망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