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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시민인문학'을 준비하는 이유
오늘도 '시민인문학'을 준비하는 이유
  • 교수신문
  • 승인 2014.11.0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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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장성규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조교수

명색이 국문학 연구자이다 보니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 싼 여러 얘기들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대략 2000년대 이후 실용학문 위주의 대학 구조조정이 본격화했고, 실제 학생들의 취업이나 소위‘스펙’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과학 분야의 위기가 대학 현장에서 매우 강력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이후 강의나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면서 인문학이 대학에서 일종의‘계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문학의 위기를 단순히 대학 구조조정의 문제나 학문의 실용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뭔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과학 분야는 ‘언제나’그 현실적인 존립 이유에 대한 의문에 부딪히곤 하지 않았는가? 교육의 측면에서는 학생들의‘생사’가 걸린 취업 등의 문제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며, 연구의 측면에서도 당장 가시적인 사회적 효용가치를 증명할 수 없으니, 어쩌면 이는 인문학의‘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문제는 인문학의‘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내부’에서 찾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예컨대 1980년대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과학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 더듬어보자. 이 시기에도 여전히 인문학은 딱히 실용적인 효용가치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고립돼 있는 죽은 학문이 아니라, 당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급진적인 문제제기를 수행하면서 광장의 대중들과 폭넓게 교감할 수 있었다. 당시 한 편의 시나 소설이 한 사람의 가치관에 끼친 영향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경향이다. 반면 1990년대 이후부터 점차 인문학은 아카데미의 다소 고답적인 논의,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그들만의 리그’로 한정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사회적 위상은 점차 축소될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는지도 모른다.

운 좋게도 최근 시민들과 교감할 수 있는 인문학의 발랄한 실험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됐다. 서울시와 서울대가 함께 진행하는 시민인문학 강의나, 빈곤 지역 소수자들을 대상으로 한 치유의 인문학 강의 등이 그렇다. 이를 통해 꽤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인문학을 통해 주체의 자존감과 덕성을 고양할 수 있고, 나아가 보다 나은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아카데미 밖의 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현실과 호흡하며 스스로를 갱신하는 인문학의 생명력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인문학은 몇몇 지식인에게 국한된 고답적인 지식일 수 없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인문학 역시 인류의 지혜가 축적돼 형성된 지식이며, 따라서 소수의 지식인에게 국한해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제공돼야 할 공공재의 성격을 지닌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인문학의 진정한 위기는 그 공공성이 탈각되는 경향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역으로 인문학의 위기는 곧 그 공공재적 성격을 복원하는 것으로부터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인문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공간은 무궁무진하다. 젠더의 측면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 내셔널리즘에 의해 배제되는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지적·문화적 향유의 기회를 박탈당한 경제적 소수자, 지역적 한계로 인해 지식을 접할 수 없는 주변인들. 이들과 함께 교감하는 인문학의 발랄한 도발을 통해, 그리고 이를 통한 인문학의 공공재적 성격의 복원을 통해 비로소 인문학의 위기는 새로운‘기회’로 전환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오늘도 시민인문학이나 치유의 인문학을 준비하는 이유다.

 

장성규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조교수

성균관대 인문학부와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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