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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페스트는 자연발생 아닌 세균전 일환”
“1940년 페스트는 자연발생 아닌 세균전 일환”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4.10.28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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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종 서울대 교수, ‘일본군 731부대 현장세균실험’ 입증했다


<사회와 역사> 통권 제103집(2014년 가을)에 실린 서이종 서울대 교수(사회학과)의 논문 「일본 제국군의 세균전 과정에서 731부대의 농안·신징 지역 대규모 현장세균실험의 역사적 의미」는 1940년 중국 농안·신징 지역에서 발생한 ‘페스트’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 세균전에 대비한 일본 제국군의 현장실험이었음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논문의 ‘결론’ 부분을 발췌했다.

농안과 신징의 인구밀집지역에서 세균무기의 대규모 현장실험을 실시한 것은 일반 주민들이 대거 거주하는 생활현장 전체를 실험장으로 삼아 세균 무기를 살포해 잔인하게 학살하는 것으로서 생명윤리사적으로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역사적으로도 그러한 현장세균실험의 결과를 통해서 이전에 실행된 생체실험 결과 및 이후 진행된 일본제국군의 세균전의 성격과 전모를 특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역사적 의의 또한 크다.


본 논문은 농안·신징 지역의 대규모 현장세균실험의 역사적 존재를 입증하고 그 배경을 살펴보고 전개과정의 특성을 분석했다. 일본제국군 731부대의 세균전 과정에서의 그 역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균전에 앞서 농안·신징 지역에서 대규모 현장세균실험을 실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2011년 새로이 발견된 가네코 준이치의 논문(1943)에는 농안·신징 지역에서 대규모 현장세균실험을 실시했으며 그 결과를 수집하고 분석한 내부자료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관동군 사령관이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보문과 1943년 육군성 의무국 회의에서 이시이 시로의 발언 등 기존의 자료와도 논리적으로 정합한다. 이러한 대규모 현장세균실험의 존재는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규모 세균전의 실시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잘 말해준다.


이미 1940년 봄 육군본부의 작전명령, 즉 大陸旨 제690호에 따라 화중지역 전선에서 세균전을 실시하기로 결정됐으며, 실제 세균전은 현장세균실험과 더불어 1940년 10월에 실시돼, 저장성에서 4일 취현, 27일 닝보, 진화 지역에서 대규모 페스트 세균전을 수행했다. 즉 비행기로 상공에서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대량으로 살포했다. 비행기에 의한 페스트균의 대량 살포는 민심 혼란이나 퇴각 시 방어용을 넘어 대단히 공격적인 세균전을 의미한다. 아직 동결건조된 페스트의 효율 등이 낮아 공중에서 페스트에 감염된 쥐벼룩을 소맥, 콩 등과 함께 대량으로 뿌리는 방식이었다. 취현에서 페스트균의 대량 살포로 1차 피해자 219명, 2차 피해자 9천60명이었으며, 2차 감염이 인근지역에서 발생했다. 닝보에서도 각각 104명, 1천450명으로 이들 지역에서 직접 피해자만도 도합 1만여명을 넘어섰다. 그런 결과로, 취현과 닝보의 세균전이 성공적이라고 보고 이시이 시로는 영화를 제작해 홍보할 정도로 더욱 자신감을 갖고 세균전을 확대했다.


둘째 세균의 전염을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세균전은 불가능하다는 국제적인 전문가들의 평가 속에서 농안·신징 지역의 대규모 현장세균실험은 세균무기의 효과성 못지않게 방어력을 테스트했다는 사실이다. 중국인의 집중거주지인 농안 지역에서 효과성 실험을 하고 인근 신징 지역에서 방어력을 확인하는 인체실험을 실시한 것이다. 731부대는 농안 지역을 집단격리해 쥐 등의 감염경로를 조사하고 부검 등을 통해서 인체 전염상태를 확인했으며, 신징지역에서는 관동군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초음파백신과 약독화된 MII40 생균백신을 사용해 예방주사를 집중실시했다.


하지만 초음파 사균백신은 방어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체 부작용을 낳았으며 MII40 생균백신 또한 사균백신보다 낫지만 생균백신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방어력이 낮고 부작용이 컸다. 이러한 불완전한 방어력을 볼 때, 일본제국군은 수많은 중국인을 살상하는 세균전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 일본군도 다수 희생되는 ‘잔인한’ 세균전을 실시했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5월 일본 해군은 육군과 경쟁하면서 이들보다 앞서서 비행기로 자신들의 탄저균과 종기균 등 세균으로 저깐선 진화와 윈터 지역을 공격했다. 6월에는 육군에서도 콜레라, 장티푸스, 페스트, 적리균을 살포해 이후 이 지역에 진격한 일본 육군도 큰 타격을 입었다.


셋째 농안·신징 지역의 현장세균실험의 성과를 볼 때, 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후 세균전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현장세균실험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제국군의 세균전은 농안·신징 지역의 최종점검 현장세균실험 이후에도 그 문제점을 보완하고 더 나은 세균무기 및 살포방식을 개발하기 위한 현장세균실험의 성격을 지녔다. 1942년 육군성도 이시이 시로 소장에게 작전명령(대륙지)을 내려 1942년 5월 말 화중지방 취현을 포함한 저깐선 철로 연변에서 세균전을 준비하고 쌍발기를 사용해 페스트균 이외 콜레라균, 티푸스균, 파라티푸스균 등 복합적인 세균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42년 8월 저깐 일대에서 퇴각시에도 전략적으로 세균실험격 세균전을 실시했다. 공중 대량 살포에 대한 중국정부의 비난과 국제적 여론 악화를 우려해 지상에서 은밀하게 직접 살포하는 방식으로 전환해 퇴각 시 공격목표 지역별로 상이한 균을 상이한 방법으로 살포해 세균전과 더불어 세균실험을 병행했다.


그러나 페스트건조균은 당시 아직 성공하지 못한, 실험용이었다. 1943년 가을에는 허베이, 허난, 산둥 등에서 대규모 콜레라 세균전을 실시했다. 이 작전도 세균전이며 동시에 더 나은 세균전을 위한 세균 실험이었다. 하지만 세균전은 국제적 비판여론과 더불어 그 효과 못지않게 부작용이 적지 않아 일본제국군 대본영은 1945년 1월 세균전의 중지를 지시하고 終戰이 임박한 1945년 7월에 최종 중지했다. 하지만 731부대는 모략적으로는 세균무기를 계속 사용할 것을 결정했기 때문에 세균무기 300㎏의 생산을 목표로 생산체제를 유지했고, 더 나아가 ‘더 나은’ 본격적인 대규모 세균전을 꿈꾸며 세균무기 개발과 세균생산을 패망 때까지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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